DAY8. 장평에서 대관령면 횡계리

36.64km 51,876걸음 06:30~15:36

by 하란

여덟째 날 평창 장평리에서 대관령면 횡계리까지 36.64km 51,876걸음 06:30~15:36


아침에 일어나 신발과 양말을 확인해보니 아직 축축하다.

4월 부산 갈 때와 기온은 비슷하지만, 그땐 전날 빨래를 널어 말리면 아침이면 다 말랐는데 이번엔 종일 배낭에 주렁주렁 달고 다녀야 오후쯤 마른다.

날씨의 차이도 미묘해서, 추움에서 더움으로 넘어가는 봄과 더움에서 추움으로 넘어가는 가을은 다르다. 봄은 더위의 맹렬한 공격세에 추위가 기세를 뽐내다 결국은 물러가는 느낌인데, 가을은 그 반대이다.

그리고 4월의 봄은 나중엔 감흥이 없어질 정도로 그 막바지의 흐드러진 꽃잔치를 만끽했는데, 10월의 가을은 가을의 시작이라, 이제 하루 이틀 남겨둔 길인데 가을은 그저 여기저기 끝자락에만 살짝 머물러 있어 다소 아쉽다.

하지만 아무리 방금 신 내린 애기 무당 마냥 날짜를 잘 잡았다고 하더라도 일주일 이상의 기간이라면 비와 함께 하는 여정은 당연히 감안해야 하고 그러기에 지금보다 가을이 완연한 시간이란 내게는 추운 날씨와, 비 온 뒤 더 추운 날씨, 그리고 더 무거운 짐을 의미하기에 이번의 선택에 만족한다.

젖은 양말과 신발을 드라이기로 살짝 말린 후, 양말은 배낭 뒤에 옷핀으로 달고 그리 소용은 없어 보이지만 휴지로 신발의 물기를 한 번 더 찍어내고는 발을 집어넣는다.

신을만하다. 고로 걸을만하다.

밖을 나서니 비는 오지 않지만 하늘이 잔뜩 흐리다.

시내를 나와 6번 국도로 접어든다.

오늘의 목적지는 대관령 직전의 횡계이다.

남은 거리가 사흘로 쪼개기는 가깝고 이틀로 가기에는 멀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이틀로 하기로 했고, 마지막 날이 좀 덜 힘들려면 오늘 더 많은 거리를 가야지만 숙박장소가 애매하여 내린 결정이다.

횡계까지는 주로 6번 국도를 따라 걷는 여정이고 가끔 엇갈리며 마주치곤 하던 영동고속도로와 계속 나란히 뻗어있다.

이번 길도 도보와 자전거로 사이에는 4킬로 미터 정도의 차이가 있었다.

지도를 따라 여정을 살펴보니 차이는 속사 터널, 어제의 경험으로 자전거로로 가도 괜찮다는 것과 터널은 다소 위험하다는 미키지식(나만의 지식백과)이 생겼는데, 속사 터널의 길이가 상당히 길다. 무리라고 결론짓고 오늘은 도보길로 안내되는 길을 따른다.

평창 올림픽의 영향인 듯 국도가 고속도로 못지않게 넓게 닦여져 있어 걷기가 만만찮다. 고속도로처럼 사람의 통행이 금지된 곳은 아님에도 남에 집에 무단으로 침입한 듯 차들의 눈치를 보며 걷게 된다.

도로 표지판에 주문진이란 지명이 추가되었다. 여정의 끝이 다가오고 있나 보다.

가능한 한 도로 옆 길을 걸으며 길가의 맨드라미 그리고 이름 모를 풀이건만, 마치 가위손의 관리를 받은 듯한 풀에 눈길이 간다. 소소한 풍경이 발길을 자꾸 잡아끈다. 길가에 있는 제재소의 나무 향도 기분 좋다.

눈길과 발길을 잡는 건 그리 대단한 풍경들은 아니다

마을길이 있으면 국도변 옆 마을길로 걷고 마을길이 끊기면 국도변 갓길로 걷다 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어느덧 10km가 넘는 거리를 걸었다.

그리고 사람 길과 자전거길이 나뉘는 속사에 도착했다. 그렇게 6번 국도와 잠시 이별하고 길로 접어드는데 다시 그 길이 경강로와 속사재로 나뉜다.

일단 지도상 안내되는 길은 경강로였는데, 위아래 높이 차이를 두고 쭉 같은 방향으로 이어져 있고 경강로 보다는 한적해 보여 좀 불안은 하지만 일단 속사재로 접어들었다.

그렇게 가다 보니 오른쪽 시골집에서 차량 한 대가 나오는 게 보인다. 얼른 쫓아가 인사를 하고 두 길이 두 길의 차이를 여쭌다. 연세가 지긋하신 할아버님이신데 속사 재가 옛 지방도이고 그 옆에 경강로가 새로 깔린 길이라고 차이가 없다고 하신다.

편한 마음으로 길을 즐긴다.

차량의 통행이 많지도 않은 것 같고 길을 다 걷고 보니 정말 경로 차이도 없는데 왜 새로 길을 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 키의 두 배 정도 위쪽으로 나있는 경강로에도 차 지나가는 소리가 뜸하고 내가 걷고 있는 옛길은 차가 거의 없다.

'차 한 대도 마주치지 않을 수도 있겠는 걸' 하고 생각할 즘 트럭이 보란듯이 지나간다.

걸으며 보니 길 옆으로 수수밭, 배추밭 등 밭들이 있고 속사재 정상 즈음에서 무밭에서 일하시는 분들이 있다.

문득 나도 그 곁에 섞여 일하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남들보다 다소 잡생각이 많은 나는 항상 신경이 팽팽한 느낌이다. 그 팽팽함이 다소 느슨해지는 건, 책을 읽을 때와 술을 마실 때, 그리고 노동 또는 운동을 할 때이다.

생각하니 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

내게 필요한 건 느슨한 마음이고 그걸 줄 수 있는 것들을 좋아하게 되나 보다.

객관적 기준에서 운이 좋아 22살 때 공무원이 되어 42살까지 20년을 일반적인 기준에서 편히 일했다.

하지만 예민한 성격 탓에 주관적 기준에서 참 힘들게 직장생활을 했던 듯하다.

정해진 일의 기준이 없으면 내가 항상 부족한 게 아닌지 고민했고, 프로젝트성 일을 할 땐 끝이 날 때까지 밤잠을 설쳤다.

민원일을 할 때는 오늘 마주쳤던 사람들과 일에 잘못이 없었는지 밤새 고민했고, 주변 동료들과의 관계에서도 지나치게 민감했다.

대전에서 막바지 직장생활을 할 때 팽팽하던 신경은 최대치를 찍었고 퇴직 후부터 무작정 천변을 걷기 시작했던 것 같다.

쉬는 날은 아침 식사를 차려놓고 집을 나서 여러 갈래갈래 뻗어있는 천변을 종일 걸었다.

그렇게 걷고 온 날은 저녁 식사와 맥주 한 캔을 마시면 그대로 뻗어 아침까지 단 잠을 잤다.

그때, 나에게 맞는 일에 대한 고민과 답을 좀 더 명확히 했던 것 같다. 몸을 쓰는 일을 하자고.

‘노동’은 나의 고되고 달콤한 로망이다.

소도둑놈마을이라니!

잡다한 생각들이 오가며 걷다 보니 재미있는 지명 안내판이 보인다. ‘소도둑놈마을’

도둑들이 사는 마을이란 말인가? 나중에 유래를 찾아보니 소도둑놈마을은 평찬 진부면 하진부2리 마을로 숲 속에 숨어 있던 산적들이 겨울철 마을에 내려와 소를 잡아먹었다는 데서 유래했다고.

예부터 이쪽 방면 소가 맛있긴 했나 보다, 츄릅.

이름 모를 주황색 꽃이 잔뜩 핀 길가의 버스정류장에서 달걀과 간식을 먹으며 좀 쉬다가 다시 걷다 보니 어느덧 진부면이다.

꽤나 규모가 큰데 거리는 무척이나 한산하다.

전통 장이 열린다는 현수막이 있어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겨본다. 진부 오일장은 3,8일 열리는데, 주말이 아니라 그런지 아직 오전 시간이라 그런지 볼 게 별로 없다.

발 길을 돌려 뭘 좀 먹을까 기웃거리다가 좀 전에 쉬면서 이것저것 간식을 먹어 허기가 지진 않았고, 잠깐씩 흩뿌리다 개다를 반복하던 하늘이 잔뜩 무거워지기 시작한 걸 보니 마음이 급해진다.

편의점에 들러 물을 하나 사고는 다시 길을 걷는다.

오대천변을 지나 456번 지방도(경강로)로 접어들었다. 6번 국도를 따라 가면 오대산인데, 예전 오대산 민박집에서 재밌게 보냈던 기억이 있어 그리로 가볼까 하는 생각도 있었지만 추억보단, 내 다리가 우선이라 그냥 빠른 길로 가자 싶었다. 안 가본 곳으로 가야지라는 명분도 있고.

횡계까지 남은 거리는 15km 남짓,아니나 다를까 무겁던 하늘이 빗방울을 내려놓기 시작한다.

아직 덜 마른 신발과 잔뜩 습기를 머금은 판초, 이제 막 시작된 오르막길.

살짝 불행해하려던 찰나 길 옆으로 쭉 펼쳐진 당근밭에 한 무리의 아주머니들이 당근 수확에 한창이다.

비옷을 입으신 분도 있지만 그냥 모자 하나로 비를 맞으면 일하시는 분들도 계신다.

‘아’

비 맞으며 일하고 계신 분들도 있는데, 불평은 고이 접어 길가에 내버리자.

옆으로 자전거 두 대가 지나간다. 음 저분들도 나보단 힘들어 보이신다. 아직은 오르막길이니까. 훗.

오르막이 끝나는 지점 즈음 버스정류장이 보이고 판초의 물기를 좀 털어내고 가야지 하고 그쪽으로 가니 앞서 힘겹게 오르막을 오르시던 자전거 라이더 분들이 쉬고 계신다. 인사를 해야 하나 정류장이 좀 좁은데, 하며 가까이 가자 짐을 정리해서 다시 길을 나서신다.

나도 그곳에서 잠시 머물며 생수병에 지난밤 모텔에서 챙겨 온 커피가루를 넣어 냉커피를 준비하고 맞은편 둔덕에 흐드러진 감국과 내리는 비를 하염없이 바라본다.

이만하면 꽤 괜찮은 한 때가 아닌가.

내리는 비 탓에 쉬지 않고 걸었더니 예상보다는 빠르게 이동했다. 저 멀리 대관령을 연상시키는 언덕이 보인다. 물론 대관령은 아니었고 농촌진흥청한우연구소가 있는 곳이다. 아마도 소를 키우나 보다. 넓은 초지가 시원하다.

곧이어 대관령 초등학교 근처에 꽤나 큰 천변에 닿는다. 맑은 강물 저편으로 울긋불긋 단풍이 어우러진 작은 동산이 보인다.

걸으면서 처음으로 가을과 정면으로 마주한 듯하다. 사진과 동영상으로 순간을 남기고 멀리 있는 이들에게 이곳의 지금을 보낸다.

빗줄기가 제법 굵어지고 판초 끝을 타고 흐르는 물줄기에 채 마르지 못한 신발은 다시금 흠뻑 젖는다.

워낙 스키 시즌 찾는 이의 많은 곳이라 민박집이 꽤나 많았고, 도착해 그중 한 곳에서 쉴 자리를 마련하자 했는데 다니며 천천히 찾기는 힘들 듯해, 어느 다리 아래에 비를 피하고 지도 앱에서 민박을 검색해 적당한 곳에 전화를 해본다.

민박에는 어머니가 계신다고 연락해 놓을 테니 가보라고 하신다.

민박집에 도착해 판초를 벗어 물기를 털고 있자니 인기척을 들으신 듯 허리가 굽은 할머님 한 분이 나오시고 안내를 받아 지하에 있는 게스트하우스로 들어갔다.

오래된 외갓집 같은 곳. 구석구석 바지런한 손길이 닿은 듯 깔끔하다.

5만 원을 건네 드리니 허리춤에 찬 전대를 뒤적여 3만 원을 건네주시며 연신 감사하다 하신다.

손님이 기대되지 않는 평일에 시골 어르신의 용돈 벌이로는 기분 좋으실 수 있으나, 그저 송구할 뿐이다.

2층 침대가 3개 놓인 방에 손님은 나 하나다. 욕실과 화장실도 잘 갖추어져 있다. 씻고 젖은 옷들을 빨아 널고 식사를 하려 나서려니 할머님이 계단에 올려놓은 판초를 거둬 널고 계신다.

감사하다 인사를 하고 나서려니 우산을 하나 건네주신다.

오늘은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좋은 날이구나.

할머님의 정으로 따뜻한 샘터게스트하우스


부록 – 먹고 마시는 이야기 8편 ‘빗소리와 소주’

이유가 뭘까?

왜 비 오는 날엔 미친년은 뛰쳐나오고 나도 미친년 마냥 술을 마시러 뛰쳐나가게 되는 걸까?

비 오는 날엔 파전과 막걸리라는 모범생 답안이 있고, 파전의 지글지글 소리가 빗소리와 비슷하다는 그럴듯한 이유까지 마련되어 있다.

하지만 내가 비 오는 날 찾게 되는 건 소주. 안주는 그저 거들뿐.

‘비와 비를 뿌리는 어두운 하늘’이 주는 음울한 분위기가 소주의 그것과 맞닿아 있기 때문일까? 그냥 주로 먹는 게 소주이고 비 오는 날엔 멀리 가기 싫어 보통의 평범한 곳에서 가장 무난한 소주를 찾게 되는 것뿐일지도 모른다.

오늘의 메뉴는 아니 식당은 일찌감치 정해놨다.

평창 올림픽이 한창일 때 출장으로 왔던 이곳에서 맛있게 먹은 기억이 있는 곳이다.

평소 맛집은 일부러 피하는 편인데, 이곳은 맛집으로 꽤나 알려진 곳이지만 주저 없이 곳으로 정했다.

메뉴를 ‘물갈비’로 할지 ‘오삼불고기’로 할 지만 잠시 고민하다. 평소 메뉴 결정의 8할은 그러하듯 매콤한 메뉴로 결정한다.

금천 회관

좁고 가파른 계단을 올라 식당 문 앞으로 가자 너무 조용해 ‘혹시나’하는 생각이 든다. 안 쪽을 살피는 다행히 식사를 하고 있는 가족이 보이고 문을 열고 들어선다.

자리에 앉아 오삼불고기 1인분이 가능하냐고 하자 안된다 하신다. 되는 건 황태해장국뿐이라고. 한 사람의 손님을 그다지 반기지 않는 분위기 때문에 살짝 상하려는 맘을 누르고 오삼불고기 2인분과 소주 한 병을 시킨다.

빠르게 맛깔 스러 보이는 찬들이 놓이고 저기 주방 앞에서 오삼불고기를 볶고 계신다.

그렇게 볶아진 오삼불고기를 놓아주시면 약한 불에 식지 않게 두고 먹으면 된다.

모두 다 상상하는 딱 그 맛.

오징어와 삼겹살, 고추장 양념. 그 진부하고 뻔한 맛의 조합은 한 번도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오징어와 삼겹살을 한 점씩 집고 마늘을 쌈장에 찍어 살짝 올린 뒤, 소주 한 잔.

상추에 쌈을 싸서 한 잔.

그리고 흰 밥에 양념 가득 비벼 또 한 잔.

그렇게 몇 차례 순번을 돌다 보니 어느덧 2인분의 오삼불고기는 바닥을 보인다. 살짝 상하려 했던 맘이 부끄러워진다.

단지 평일이라 손님이 적은 것일 거라 생각했는데, 앞서 식사하던 가족이 나가고 나만 남은 가게에 어머니와 아들로 보이는 두 주인의 대화가 귓 전에 닿는다.

주말에도 손님이 적어 이렇게 해서 가게가 유지가 될지 걱정이라고.

코로나로 인한 어려움은 이곳도 피해가질 못했구나 싶고, 그나마 유명하지 않은 다른 가게들의 어려움은 어떨지 싶다.

나라도 계속 열심히 먹고 마셔주는 것 밖에 없다 생각하며 마지막 잔을 비우고 다시 비 오는 거리로 나선다.

금천회관 평창군 대관령면 대관령로 92 오삼불고기 1인분 13,000원

샘터게스트하우스 평창군 대관령면 축제길 22 6인 도미토리 20,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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