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째 날 횡성 둔내면에서 평창 장평리까지 24.73km 38,807걸음 06:48~15:04
이 날의 여정은 전날부터 고민했건만 왠지 결론이 나지 않아 아침에 눈을 떠서 지도를 몇 번이나 검색하며 30여분을 보냈다.
사실 단순할 수도 있고, 나는 내가 내릴 결론이 뻔하단 걸 알고 있었지만.
일단 목표점으로 잡은 곳은 평창의 장평리인데, 이게 도보로 경로 검색을 하면 태기산(1,258.8m)을 경유하는 6번 국도로 34km가 나오고 자전거로 검색하면 청태산 기슭의 자연휴양림을 경유하는 청태산로로 24km가 나왔다.
사실 10km가 차이가 나는데 당연히 청태산로를 선택해야 할 듯 하지만, 네이버가 도보길을 이렇게 안내할 땐 그럴 만한 이유가 있지 않겠냐는 네이버 소액주주로서의 기업에 대한 신뢰, 그리고 태기산 길이 경치가 너무 끝내주면 어쩌지 하는 하나 마나 한 걱정이 선택을 늦췄다.
하지만 자리를 털고 일어나 창밖을 본 순간, 보슬보슬 내리고 있는 비.
태기산 바이 바이. 혹 횡단하실 예정이신 분 중 태기산 길로 가보시고 정말 경치가 어마 어마 하진 않은지, 그리고 네이버가 왜 그리로 가라고 했는지 알려주시길.
가장 중요한 준비인 화장실을 다녀오고 씻고 가방을 챙기고, 판초를 입고 숙소를 나선다.
나서는 길 어제 산 100% 유기농 통밀빵이 하나 남아 있는 관계로 ‘빵과 와인’의 프레임이 뇌리 속에서 사라지질 않는다. 그렇다고 750ml 와인병을 들고 다닐 순 없는 노릇. 미니 와인을 찾아 편의점 순례를 시작한다.
소읍 치고 편의점이 어마 무시하게 많다. 하지만 내가 찾는 미니 와인은 좀처럼 찾아지지 않는다.
그러다 4번째 편의점을 들어가니 한눈에 꽂히는 작은 와인병, 그런데 내가 원하는 드라이한 레드와인이 아닌 샹그리아 와인이다.
잠시 고민하다 더 이상의 옵션은 없을 듯한 예감에 병을 집어 들었다.
그렇게 배낭에 빵과 와인을 담고 나니 어찌나 든든한지 백두산 꼭대기라도 오를 듯한 기분이다.
판초 모자를 쓰기도 벗기도 애매할 정도로 안개비는 흩뿌리고 인적 없는 새벽길 옆으론 양배추밭이 드넓게 펼쳐져 있다.
양배추는 제 속을 꽁꽁 싸매고 싸맨 단단해 보이는 모습이, 새초롬하고 야무져 보인다. 그 옆의 배추는 그 보단 무슨 일이든 허허하고 웃고 넘길 소탈한 성격의 친구 같고.
언덕 아래는 대여섯 명의 머릿수건을 한 아주머니들이 배추를 뽑고 계신다. 뽑힌 배추밭이 너무도 칼 같이 사각형이라, 그 일사불란한 모습에 웃음이 지어진다.
한 시간쯤 걸으니 빗방울은 굵어지기 시작하고 길은 꽤나 가팔라지고, 백두산을 오를 것 같던 내 의욕도 급격히 사라지기 시작한다.
한 시간쯤 비를 맞고 걷자 판초 끝자락을 타고 흐르던 빗물이 그대로 신발을 향해 양말 속까지 젖어버린다.
음, 부산 갈 때 경험해놓고도 이번에도 신발 방수 따위에 신경 쓰지 않은 심지 굳은 나 좀 보소.
올라갈수록 산새도 안개도 짙어져, ‘조난’에 대한 걱정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와중에 저 멀리 ‘청태산 벌꿀’이란 간판과 천막이 보였다.
지금 무슨 장사를 할 것 같진 않지만 일단 천막 아래서 잠시 비를 피하자는 생각에 그리로 가본다. 꿀벌 통과 꿀을 파는 매대가 있는 곳이다.
천막 아래 비를 좀 피할까 하고 가다 보니 아주머니 한 분이 계신다. 혹시 벌꿀차 같은 거 파시나요? 하고 여쭈니 안 파신다고.
‘그럼 비 좀 잠시 피하고 갈 수 있을까요?’란 그 한마디를 못하고 가슴에 묻고서는 다시 젖은 발걸음을 내딛는다.
영동 1 터널, 사진은 찍지 말자! 위험!
안개는 더 짙어지고 가시거리는 십여 미터가 채 안돼 보이는데, ‘영동 1 터널’ 표지판이 보였다.
음. 이래 가지고 차가 나를 볼 수 있겠나 하는 생각이 들어 급히 ‘깜빡이 앱’을 다운로드하여 켜고(그 비가 주룩주룩 오는 와중에) 판초를 벗어 노란 배낭이 보이게 하고는 터널에 들어선다.
나는 진정 몰랐다. 나의 삶에 대한 애착이 이렇게나 강할 줄.
터널에 들어서자 다행히 차도 안 지나가고 비도 피하고, 걱정과는 다르게 기분이 좋았다.
그렇게 잠시 또 방심해 사진 한 장 박고 있으려니 어디서 굉음이 들린다. 터널에 차가 한 대 들어선 것이다.
탱크 수준의 굉음과 제트기 수준의 속도로 승용차가 한 대 지나갔다. 정신이 번쩍 든다.
과한 걱정과 들뜬 마음 그 사이 어디쯤으로 정신을 다잡고 터널을 통과하니 저 앞으로 횃불 모양의 ‘평창’ 표지석이 보인다!
비는 잠시 소강상태이고 짙은 안개 사이로 이제 막 울긋불긋 해지기 시작한 나무들과 떨어진 낙엽들이 내 마음을 가을날로 이끈다.
잠시 그렇게 가을 기분에 젖어 걷다 보니 다시 빗방울이 굵어지기 시작한다. 이미 잔뜩 젖은 판초의 물기를 대충 털고는 다시 판초를 뒤집어쓰고 걷는다.
청태산 기슭까지만 걸은 듯한데 꽤 높이 올라온 듯 내려가는 길도 길다. 태기산으로 안 가길 잘했어. 음. 그렇고 말고.
그렇게 고개를 다 내려와 좀 쉴만한 곳이 있겠지 하고 생각하고는 진조리 마을회관을 향하는데 그 옆으로 배추밭을 앞에 두고 조르륵 내려앉은 알록달록 펜션의 풍경이 사랑스럽다.
그렇게 풍경을 핸드폰에 담고 마을회관으로 갔는데 꽉 닫힌 문에 차마 두드려 볼 용기가 없는 소심한 나는 그 옆에 농산물 창고 인 듯한 곳의 너른 지붕 아래로 비를 피한다.
판초를 벗어 털어내고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앞을 바라보니 내가 방금 지나온 길 바로 옆으로 정자가 보였다.
아, 저길 못 봤구나.
너무 내가 보려던 것만 찾아가다 보니, 정작 더 나은 것은 지나치고 말았구나 싶다.
다시 짐을 들고 그리로 뛰어간다.
별 소용은 없어 보이지만 쌓인 먼지를 대충 닦아내고 흠뻑 젖은 신발과 양말을 벗어 널어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