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9. 대관령에서 정동진

44.63km 63,933걸음 06:30~18:22

by 하란

마지막 날 대관령면 횡계리에서 정동진까지 44.63km 63,933걸음 06:30~18:22


지난밤 식사를 마치고 숙소로 들어가며 나 밖에 없을 듯 하지만 혹여나 손님이 더 올 수도 있겠다 싶어 출입문을 열어두고 내려갔는데 새벽에 짐을 챙겨 나오다 보니 잠겨져 있다. 내가 들어왔는지 확인하시고 조용히 문단속을 해주셨을 손길은 생각하니 쌀쌀한 새벽 날씨에도 잠시 온기가 머문다.

아직 아직 어둑어둑한 날씨와 잔뜩 흐린 하늘, 저 멀리 산자락에 피어오르는 물안개가 가득한 풍경 속에서 마지막 날의 걸음을 시작한다. 오늘은 대관령을 지나 강릉시내를 가로질러 정동진으로 향한다. 오늘도 인도와 자전거도로는 그 가는 바가 달라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도보길이 훨씬 짧아 고민할 필요가 없다. 다만 며칠 오는 비를 핑계로 짧은 거리를 걸어왔기에 오늘의 거리가 다소 부담스럽다. 역시나 평창올림픽의 손길이 덕인지 지방도임에도 고속도로 못지않게 길이 시원스레 뻗어있다. 걷다 보니 오른쪽으로 ‘평창 트레일 길’이라는 표지판이 보이고 숲길이 펼쳐져 있다. 다소 돌아가는 듯 보였지만 지도상 다시 이 도로로 합류가 되는 걸 확인하고는 그리로 들어선다.

오랜만에 걷는 흙길이 반갑다. 그렇게 우거진 나무 숲 사이를 기분 좋게 걷고 있으려니 맑은 물이 흐르고 단풍이 흐드러진 작은 계곡이 나타난다. 조용한 숲길에서 마주한 그곳은 비밀의 커튼을 열고 엿본 듯 신비하다. 언젠가 다시 와야지 생각했지만 왜인지 그때는 지금의 이곳은 만날 수 없을 거란 생각이 든다. 어쩌면 같은 공간 이란 건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잠시 정신이 팔린 탓인지 생각 없이 걷다 아차 싶어 지도를 확인하니 가야 할 길과 멀어지고 있었다. 다시 길을 되짚어 가보니 분명 지도 위 표시되어 있는 길이 보이지 않는다. 난감한 마음을 뒤로하고 풀숲을 찬찬히 살피니 사람의 지나간 흔적이 보인다. 사람이 발길이 뜸해 자연에 다시 덮여버린 길인 듯하다. 그래도 사람의 발자취가 보이니 길이 있을 거라고 나를 다독이며 풀숲으로 들어섰다. 풀이 잔뜩 우거진 개울길이다. 끊길 듯 이어지는 발자취를 따라 불안한 마음을 누르며 걸어가다 보니 저 위로 내가 가야 할 길이 보인다. 저 길과 이 길이 이어지지 않는 것만이 분명한 상황, 다시금 주위를 살피니 나처럼 당황하여 길을 찾아 헤매었을 누군가의 발길이 어지러이 찍혀 있고 이윽고 결심을 한 듯 가파른 둔덕을 올라간 흔적이 보인다. 그 흔적이 불안이 되고, 그 흔적이 위안이 되어 이윽고 나도 결심을 하고 둔덕을 올라 다시 차들이 먼저인 길로 합류한다.

누군가는 또 내가 남겨 놓은 흔적을 따라 이 길로 접어들겠지 그리곤 뒤돌아 갈 수도 후회할 수도 있지만 그건 길을 걷는 각자의 몫이다. 나는 벗어난 길에서 마주한 단풍 계곡의 풍경 만으로 충분했고 앞선 이의 흔적은 내게 누군가도 이 길을 갔다는 ‘안도’를 주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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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나를 다른 곳으로 이끈 길

넓은 도로이지만 아직은 이른 시간이라 고요하다. 멀리 보이는 바람개비를 따라가자 대관령 휴게소가 보인다. 그곳에선 라이딩을 준비하는 한 무리의 라이더로 인해 분주하다. 아직 휴게소는 장사를 시작하지 않은 시간. 자리에서 짐을 정리하고 화장실을 다녀오려 했는데, 화장실마저도 시작 전이다. 하릴없이 잠시 앉아 라이더들이 준비를 마치고 떠나는 걸 지켜보며 쉬다가 나도 발걸음을 뗀다. 비가 좀 흩뿌리지만 약간 무거워지려는 발걸음을 좀 가볍게 하려 판초를 접어 넣는다. 조금 더 걸으니 신재생에너지 박물관이 보인다. 무슨 공사인지 공사가 한창. 저곳은 화장실이 개방되어 있을 듯하여 들릴까 고민하다, 왕복 백여 미터만큼의 요의는 아니었기에 그대로 지나쳤다.

잠시 뒤 대관령 표지석이 보이고 저 아래로 강릉 시내와 동해 바다가 구름 아래로 펼쳐진다. 그대로 산등성이를 달려 내려가면 닿을 듯 가깝기도 멀기도 한 풍경이다. 아, 이젠 내리막이구나. 내리막이라는 생각만으로도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가다 보니 대관령 옛길 표지판과 화장실이 보인다. 나무로 지어져 마치 오두막처럼 보이는 화장실 앞에 짐을 풀고 화장실을 다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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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관령의 풍경

이젠 제법 굵어진 빗줄기에 판초를 다시 꺼내어 든다. 이쯤에서 자전거길과 도보길의 차이가 생긴다. 길을 살피니 옛길 표지판 옆 등산로로 보이는 산길. 설마 이건가? 휴대폰 화면 속의 지도와 내 눈앞의 길을 번갈아 살핀다. 눈에 보이는 길이 믿기지 않는 시대가 되었다.

아직은 푸른빛의 단풍나무 숲길

이 길이구나 하는 결론을 내리고 숲길로 들어선다. 아직은 푸른빛이지만 터널을 이루듯 울창하게 우거진 단풍나무 숲길이다. 나는 금세 이 길이 좋아졌다. 빗소리로 가늠해 보건대 꽤나 굵은 빗줄기일 텐데 울창한 나무가 우산이 되어 주어 나는 판초를 벗어버리고 기분만큼이나 가볍게 걷는다. 아, ‘옛길’. 예전엔 이곳을 지나려면 모두가 이 길을 걸어야만 했겠지. 지금처럼 사람 길, 차길, 자전거길이 다르지가 않았겠지. 하는 생각을 할 즈음 신사임당이 남긴 시구가 크게 적혀 있다.


대관령을 넘으며 친정을 바라보다.

늙으신 어머님을 강릉에 두고

이몸은 홀로 서울길로 가는 이마음

돌아보니 북촌은 아득도 한데

흰구름만 저문산을 날아 내리네.

신사임당


늙으신 어머니를 뒤로 하고 걸어 돌아가는 맘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시에 남겨진 그 마음을 알 듯도 모를 듯도 하다.

이 길은 강릉 ‘바우길’ 2구간이다. 한창 산을 다닐 때 웬만한 등산 코스는 다 다녔는데 이곳을 왜 안 왔었지 하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왔을지도 모르지만 그때의 나는 이 길이 보이지 않았나 보다. 더 가을이 깊을 때 다시 한번 찾아야겠다 싶다.

비 오는 날이건만 등산을 하시는 분들이 간간이 지나쳐 가신다. 그렇게 비를 맞으며 걷다 보니 잠시 후 시원한 계곡길이 이어진다. 아, 여름에도 찾아야겠구나 싶다.

옛 주막터에 잘 조성되어 있는 쉼터에서 다리를 풀고 계란과 에너지바로 가벼운 요기를 한다. 다람쥐 한 마리가 슬쩍 나왔다가는 별 볼일 없어 보였는지 다시 가버린다. 한 동안 물소리, 빗소리를 들으며 멍 때리다. 다시 발걸음을 옮긴다.

기분 좋은 숲길에 후회는 없으나, 역시 산길은 산길. 도로길과의 거리 차이가 무색하게 걸어도 걸어도 거리가 줄어들지 않는다. 산길 1km는 도로길의 3km와 맞먹는다. 다시 한번 시간과 공간은 절대적이지 않음을 그렇게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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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들었지만 후회 없는 선택이었던 대관령 옛길

계곡길을 걸어 내려와 대관령박물관에 다다랐다. 잘 가꾸어진 야외 전시장은 비가 와서인지 인적이 없는 가운데 고요하다. 산책 나온 듯 잠시 돌아보고 짐을 정비해서 다시 빗길을 걷는다.

빗 속을 30분쯤 걸으니 남대천이 나온다. ‘여기는 강릉입니다.’라는 표지판이 나를 보고 ‘이제 다 왔다’라고 이야기하는 듯하다.

천변을 끼고 성산면이 나온다. 오래된 식당들이 많이 보인다. 간판이 ‘빈대떡집’인 곳에서 멈칫하는 발걸음을 ‘다음에 오자’하고 달랜다.

이제 남은 거리는 23km. 안인해변까지는 강릉시내를 관통하고 안인에서는 바다를 옆으로 하고 정동진으로 향할 것이다.

빗방울은 굵어지고 그냥 판초를 벗어버릴까 고민할 만큼 바지와 신발을 축축이 젖어버렸다. 담장 위로 열린 탐스러운 감. 샛노란 들판. 골목길. 비가 오지 않았다면 좀 더 그 길을 즐길 수 있었을 텐데, 쏟아지는 비와 막바지를 향해가는 다리의 피로로 풍경보단 길 가에 놓인 공유 킥보드에 더 시선을 빼앗긴다. 일정을 좀 더 여유롭게 했다면 ‘바우길’로 걸어 좀 더 강릉을 마음에 담았을 텐데, 아쉽다.

어두워지기 전에 도착하자 싶은 마음에 그저 가장 빠른 길을 선택하여 걷다 보니 도로 옆 좁디좁은 갓길이 위험하다.

그리곤 어느덧 안인에 도착했다. 공사장 인부 숙소인 듯 한 곳이 보이는데 컨테이너를 2~3층 높이로 쌓아 수십여 개가 설치되어 있어 마치 작은 연립 단지를 보는 듯하다. 공사의 규모가 꽤 크겠구나 하고 걷다 보니 저 멀리 석탄화력발전소 건설 현장이 보인다. 어마어마한 규모이다. ‘건설’이라는 일의 스케일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걷다 보니 저 앞으로 바다다. 동해바다다. 서해바다에서 출발해 이제 동해바다다. 시원한 바다를 쳐다보고 감상에 젖기도 잠시. 길이 애매하다. 이곳은 자전거 도로 표시는 있지만 그저 차와 길을 공유할 뿐이다. 지리적 문제인 듯 부분 부분 자전거 전용 도로도 조성되어 있지만, 찻길과 겹치는 곳은 도로 자체도 좁아, 차와 자전거 모두 서로를 조심하며 지난다. 거기에 사람까지 더해져 서로가 모두 조심스럽다.

날이 어둑해지기 시작할 무렵 저기 앞 ‘정동진’이다. 근처에서 맥주를 한 캔 사고 해변으로 가려 ‘기차역’을 지나쳐 백 미터 정도 아래에서 정동진 해변으로 들어선다. 사진을 찍고 바다에 발을 담그고 춤을 추고 영상도 남겨보며 나만의 ‘마무리’를 기념한다. 소란스러운 감격의 시간이 지나고 어둑해진 바닷가에서 파도 소리를 들으며 맥주 한 캔을 마신다.

시원보단, 아쉬움이 더 큰 걸 보니, 이번 여정도 나에겐 ‘도전’보단 ‘여행’에 가까웠나 보다.

이제 끝이다.

20211009_181916.jpg 정동진


부록 – 먹고 마시는 이야기 9편 ‘지금,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해변에 앉아 맥주를 한 캔 마시고는 이제는 완연하게 어두워진 바다를 뒤로 하고 나왔다. 아직은 이번 여행의 끝이 실감이 나지 않아 혹은 너무 실감이나 배가 고프진 않다. 하지만 술이 고팠다.

원래는 강릉 시내 숙소 근처에서 술 한 잔 하려 했는데 왠지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

그 사이 빗방울은 다시 떨어지기 시작하고 망설임 없이 역 앞에 있는 한산한 포장마차로 들어섰다. 라면과 소주를 시켰다.

보통의 라면과 보통의 소주.

비는 제법 굵어져 포장마차의 천막을 때리고 비 내리는 거리를 바라보며 소주 한 잔과, 뜨끈한 라면 국물을 마신다. 아무 생각이 없다. 이제 감격도 아쉬움도 없이 그저 고요하다.

사람들은 오고 가고, 비는 내리고 나는 길의 끝에서 소주와 라면을 마시고 먹는다.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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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올해의 걷기는 이것으로 마무리가 될 듯하다. 두 번의 걷기로 나에겐 무엇이 남았나.

무엇을 남기려 시작한 건 아니었고, 그냥 그저 걸었던 것 같기도 하고 조금은 속 시끄러웠던 주변 상황을 좀 떠나 있고 싶었던 것도 같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의 나의 걷기는 성공적이어서 딱히 꼬집어 말하기는 어렵지만 다녀오고 나면 에이스 침대 같이 흔들리지 않는 편안한 마음이 생겼던 것 같다. 물론 유통기한이 그리 길진 않았지만, 무에 대수인가. 또 걸으면 될 일이란 걸 알게 되었는데

그리고 퇴직 후 무엇을 할 건인가. 아니 나는 무엇을 하고 싶은가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의 답을 강변을 너른 들판을 걸으면 어렴풋이 알게 된 듯하다. 이 길이 맞는지 틀린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저 나는 내가 지금 정한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걸, 잘못된 길이라면 새로운 길을 찾아보기도 혹은 되돌아오기도 하며, 그렇게 걷다 보면 어찌어찌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임을 이제는 안다.

살며 앞이 보이지 않아 답답한 때가 온다면 당신도 그저 걷기를, 그 길이 당신을 잘 데려다 주기를 가만히 기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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