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시를 조금 넘긴 시간.
그녀에겐 아직 5시간이나 남아있다. 생각해 봐야 뾰족한 방법이 없을 그녀의 선택. 티브이를 켠다.
홈쇼핑과 뉴스와 이런저런 예능을 순회하며 그렇게 몇 시간을 소비해 내곤, 그녀의 하루 중 가장 흥미진진한 시간이 될 드라마가 방영될 채널에 멈추어서야 리모컨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냉장고에서 시원한 맥주와 견과를 조금 꺼내어 작은 술상을 차리고 젊고 예쁜 여자와 여자보단 나이가 있지만 역시 젊고 멋진 남자의 연애 이야기에 빠져든다.
'언제부터 나를 좋아하게 됐어요?’
'당신을 처음 본 순간.’
꽤나 몰입하고 보던 드라마이지만 첫눈에 반했다는 남자주인공의 대사에 피식하고 웃음이 난다.
'첫눈에 뭘 안다고. 니가 예뻐서 좋아했단 거 아냐. 그저.’
그럼에도 불구하고 ‘첫눈에 반한다.’란 말은 왜 그리 로맨틱의 함유량이 많은 것인지.
‘첫눈에 반한다라..’고 혼잣말하던 그녀는 오래된 상념의 기억 속으로 빠져든다.
미인이라고 할 수 없는 외모의 그녀였지만 ‘첫눈에’라고 할 만한 고백의 기억이 있었다.
대학1학년 5월.
어린이날이었던가 어버이날이었던가.
주말에 이은 공휴일 연휴라, 기숙사 생활을 하던 거의 모든 학생들이 집으로 갔던 때. 마땅히 갈 곳이 없어 기숙사에 남아 있던 그녀가 김밥을 사러 나오던 길이었다. 이제 막 정오를 넘긴 시간이라 아직 학교로 돌아온 학생들은 거의 없었다.
한 달 전만 해도 꽃비가 날리던 도서관 옆 벚나무 터널은 이제 막 올라온 연두잎으로 흐드러져있고 오월의 일요일 낮의 햇살이 그 사이로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
그 찬란한 풍경 속을 다소 쓸쓸히, 하지만 나쁘지 않은 걸어내려가고 있을 때 저 아래 연두의 터널 끝으로 실루엣이 하나 비쳤다.
왠지 갈 곳이 없었던 자신의 사정을 들킨 것만 같아 난감해졌지만, 그렇다고 되돌아갈 수도 없어 그렇게 그녀와 그 실루엣은 왠지 희미한 긴장이 흐르는 일종의 대치 상태처럼 서로 가까워져 갔다.
서로 간의 거리가 서로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가 되었을 때, 다행인지 불행인지 향우회 모임에서 본 적 있는 같은 학년의 학생이었다.
바람에 흔들려 사르락 거리는 소리만이 가득한 찰나의 침묵을 견딜 수 없었던 그녀가 먼저 말을 건넸다.
‘안녕.’
예상밖의 인사였을까.? 놀란 표정의 실루엣은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어 그래’ 따위의 말을 했었던 것 같다.
그리고 다음 날 울린 삐삐 속의 메시지에선 도서관 앞에서 기다리겠단 말이 녹음되어 있었고, 그곳에 다다르자 장미꽃 한 송이를 쥔 그 실루엣, 순호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곤 부산에서 첫 직장생활을 하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
사무실에 젊은 남자 손님이 찾아왔다. 같이 근무하던 2년 선배의 입사동기라고 했다. 커피 한 잔 정도의 담소가 오가고 저녁에 술을 한 잔 하자고 이야기가 오가던 중, 선배언니는 그녀를 보며 얘기했다.
‘같이 가자.’
남포동 어딘가 사회초년생들에게 적당할 호프집에서 적당히 적절하고 적당히 어색한 술자리 후 그녀를 데려다주겠노라 일행과 헤어진 그는 벚꽃이 흐드러지던 어느 골목에서 ‘네가 좋다.’라고 얘기했다. ‘갑자기 왜요?’라는 그녀의 물음에 ‘네가 일찍 결혼하고 싶다던 얘기가 좋았어.’라고 하며.
그 둘의 고백은 연애의 설렘과 그들도 그녀도 알았을 관계의 한계 사이를 위태롭게 오가다 우습게 정리되어 버렸지만 어쩌면 짧았기에 그나마 젊은 날의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을 수 있었으리라.
‘생각해 보니 첫눈에도 아니네, 첫말엔가...’라고 읇조리며 그녀는 피식 웃는다.
그때 알림음과 함께 그녀의 핸드폰이 깜빡였다.
‘사랑합니다. 당신만을’
오래된 상념에서 채 깨어나기도 전에 온 뜻밖의 문자에 그녀는 당황하며 핸드폰 잠금 해제를 하고 문자메시지를 열어 문자를 확인한다.
사랑합니다. 당신만을
당신의 생일을 가장 먼저 축하합니다!
당신을 사랑하는 ㅇㅇ화재
12시 1분.
하루를 다 소비하고 다시 하루를 할당받는다.
그녀의 생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