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날의 김밥 원정으로 9시쯤 곯아떨어졌다가 당연하게도 눈을 뜨니 아직 하루가 가지 않은 11시 30분.
유튜브의 망망대해를 떠돌며 얕은 잠을 자다 깨다 반복하다 보니 아침이다.
무거운 몸을 일으키고 오늘의 일정을 머릿속에 정리해 본다.
어제 실패한 키토 김밥 원정을 다시?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곧 머리를 잘래잘래 흔들어 털어버린다.
오늘은 미뤄뒀던 개인 업무를 처리하고, 적당히 좀 쉬자라고 맘먹는다.
아침 청소를 하고 집을 나서 은행과 동사무소, 마트를 바삐 순회하고 이런저런 찬거리를 사서 집으로와 하얀 쌀밥을 짓고 딸이 먹을 연근조림과 미역줄기 그리고 내가 먹을 톳나물을 무친다.
곧 푸슉~하는 소리와 함께 달큰한 쌀밥의 냄새가 풍기지만, 애써 참고 아들이 먹다 남긴 닭가슴살 조각에 자투리 버섯을 넣어 볶아 접시에 담고, 스리라차 소스를 뿌려 첫 식사를 시작했다.
음식은 왜 먹으면 먹을수록 더 먹고 싶은지, 가지면 가질수록 더 가지고 싶은 ‘욕망’의 대표선수이기 때문일까. 손을 뻗으면 가질 수 있는 거리의 하얀 쌀밥의 유혹을 뿌리치고 톳나물을 조금 덜어 후식으로 먹는다.
집에 있으면 이런저런 먹거리의 유혹을 뿌리치기가 어려워 낮 2시가 다 된 시간에 일어난 딸의 끼니를 챙겨주고 밖을 나섰다. 스타벅스에 앉아 책을 좀 보고 글을 쓰고 창 밖으로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멍을 때리는데, 핸드폰이 울린다.
‘저녁에 술 한 잔 하자~’
나름 다이어트 중이라 잠시 고민을 하다, 대신 가볍게 순대국밥에 소주 한 잔으로 메뉴를 제안한다. 밥을 안먹고 순댓국만 먹으면 되니까, 그야말로 키토제닉 식단의 정석 아닌가?!
약속한 식당에 먼저 도착해, 순댓국과 소주를 시키고 친구를 기다렸다.
잠시 후 테이블에 내어진 따끈한 순댓국과 마침 도착한 친구.
따끈한 국물에 소주잔을 주고받으며,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받다 보니 따끈한 돌솥밥이 놓인다. 공깃밥을 주면 내 몫은 무르려고 했는데 예상치 못한 전개이다.
-안 먹음 되지.
어쨌든 할 건 해야 하니, 김이 폴폴 나는 쌀밥을 그릇에 덜어 담고 돌솥에 숭늉을 부어 놓는다.
오늘따라 말이 많은 친구. 순댓국은 반도 안 비워졌는데, 소주는 벌써 빈 속을 내보인다. 소주를 한 병 더 시키고 술자리는 무르익는다. 소주를 한 병 더 시킬 즈음에서야 순댓국은 바닥을 보이고, 술이 좀 얼큰해진 내 눈앞에 뽀얀 밥과 빨간 김치, 그리고 김이 나는 숭늉이 어른거린다.
그래 조금만.
쌀밥에 쌈장에 찍은 고추 한 입, 숭늉에 김치 한 조각. 사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소주 안주는 이런 밥 안주이다. 다행히 이성줄을 놓기 전에 술이 먼저 떨어졌다.
이차를 갈까 하는 말이 목구멍을 통과할 때 즈음, 잘 가란 친구의 인사.
음 하늘이 돕는 나의 다이어트로군.
굉장히 아쉽지만, 좀 다행이다 싶은 맘으로 집으로 향하는데, 저 앞 밝고 따스해 보이는 편의점 불빛이 내 발길을 잡는다. 이끌리듯 들어가 맥주와 만두 그리고 냉동피자를 집어드는 나.
다행히 맥주 한 캔과, 만두 두 개 냉동피자 한 조각에서 끝났다. 배가 불러서...
아, 주님!
다이어트를 한다고 酒님을 포기할 생각은 추호도 없는 신실한 나이건만, 직접 지방으로 임하시진 않아도 함께 하는 안주를 몽땅 지방으로 만들어 주시는 기적과 인간의 의지란 얼마나 보잘것없는가를 깨닫게 해 주시는 酒님의 능력 앞에 한 없이 작아지는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