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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하랑 Aug 07. 2021

감정은 나의 무기

분노와 웃음, 줄다리기

웃, 음



유치원 시절 나는 울보였다. 유치원을 마치고 집에 왔을 때 엄마가 안 보이면 울음부터 터뜨렸다. 친구들과 놀이터에서 신나게 놀다가도 어두워지면 무서워서 울었다.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 엄마는 ‘이제 초등학생이 되었으니 아무 때나 울면 안 된다’고 여러 번 다짐을 받았다. 눈물이 날 것 같은 순간에 울음을 참느라 덜덜 떨며 말했던 기억이 아직도 남아 있다. 울음을 참는다고 했지만 그래도 결국 내 별명은 울보가 됐다. 

어른이 될 때까지 울음 말곤 내 감정을 표현하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슬퍼도 울었고, 화가 나도 울었고, 무서워도 울었다. 


대학생이 되고 나서 ‘공적’인 자리에서 운다는 것은 ‘약한 척’의 표현으로 통용되었으므로, 나는 밖에선 잘 울지 않게 되었다. 그 대신 화를 내기 시작했다. 화를 내는 것엔 묘한 쾌감이 있었고, 그 쾌감을 알게 된 후로 좀 더 자주 화내기 시작했다. 그래서 내 별명은 까칠이가 되었다. 


직장 생활을 시작하고 난 후에 화는 조금 더 단단하고 차가워졌다. 

보통 두 종류의 화를 내곤 하는데, 그 첫 번째는 내가 화가 났다는 것을 숨기고 싶을 때의 짜증으로 표현된다. 그 피해자는 주로 회사 후배들인데, 그들의 태도가 거슬리지만 꼰대 소리를 듣고 싶지 않으므로 괜스레 보고서를 트집 잡거나 회의 분위기를 무섭게 하는 등의 비열함으로 나타난다. 

두 번째는 ‘내 것’에 대한 욕심이 화로 나타나는 경우이다. 아파트 계단에 쓰레기를 내놓거나 늦은 밤 소리를 지르는 이웃집엔 반드시 초인종을 누르고야 마는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태도에 대해 주변에서 ‘야무지다’ 거나 ‘카리스마 있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스스로도 내가 그렇다고 착각했던 것일까,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너무나도 화를 잘 내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화를 내는 것은 나의 권리를 정당하게 주장하기 위함이고 그것을 너에게 똑바로 알려주는 과정에 불과하다는 묘한 권위의식이 깔려 있었다. 만약 그런 상황에서 웃어넘기거나, 울면서 혼자 삭히는 것은 나를 만만하게 보게 만들 것이라는 두려움과 피해의식도 있었을 것이다. 


이런 나를 보고 엄마는 딸이 혼자 서울에서 살더니 ‘성격이 더 나빠졌다’고 말하곤 했고 내 대답은 언제나 “젊은 여자가 얼마나 만만한 상대인지 알아? 서울에서 혼자 살려면 어쩔 수 없어!”였다.


어릴 땐 울음으로, 어른이 된 뒤엔 화로 세상으로부터 ‘나’를 지키고, 나의 존재감을 드러내 보이고 싶었던 거다. 

나이가 들고, 후배들이 생기고, 직장생활의 여러 가지를 경험하다 보니 ‘좀 만만해 보이면 어때? 그게 내 전부가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상황에, 나와 별 상관없는 사람들에게 날을 세우고 선인장 가시처럼 콕콕 찌르는 태도를 취하는 게 피곤해지기도 했고. 

그래서 언제부턴가 일부러 ‘웃음’을 장착하기 시작했다. 여전히 자주 울고, 화도 내지만 ‘일단 웃기’를 시작하면서부터 유연 해지는 마음을 종종 느낀다. 


새로운 무기를 장착한 나는 또 어떻게 달라질까? 나의 사람들이 조금 덜 상처 받기를, 지금보다는 조금 더 편안해지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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