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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까마구 Apr 09. 2018

반봉만

Repetition


목요일 저녁 8시. 카페에 매주 이 시간만 되면 나타나는 여자가 있었다. 항상 머리에 알록달록한 반다나를 하고 다녀 카페의 직원들은 그녀를 반다나라고 불렀다. 반봉만은 카페의 주방에서만 2년을 일하고, 홀 직원으로는 일한 지는 6개월밖에 되지 않았다. 반봉만은 처음에 반다나에게 흥미를 갖지 않았으나, 직원들이 종종 반다나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떠드는 이야기를 듣고 흥미를 갖기 시작했다.

목요일 저녁 8시가 되자 반다나를 한 여자는 카페 구석자리에 앉았다. 작은 몸집에 하얀 얼굴, 갈색 긴 머리를 가진 그녀는 곤색의 꽃무늬가 들어간 반다나를 하고 있었다.

'진짜 예쁘다. 남자친구는 있을까? 말 걸어볼까?'

반봉만은 속으로 생각했다.

넓은 어깨에 키가 185cm 가 훌쩍 넘는 반봉만은 준수한 외모는 아니었지만 외적으로 그가 주는 왠지 모를 듬직한 느낌은 여자들의 호감을 쉽게 샀다. 반봉만은 말주변이 서툴고 아는 것이 많지 않아 말을 많이 하지 않았는데, 여자들은 이것을 곧 과묵한 남자구나라고 생각하고 좋아했다. 남녀 모두 관심이 가는 상대가 생기면 일상의 색채가 풍부해지기 때문에 어떠한 일도 흥미로워진다. 반봉만은 매주 목요일 저녁 8시에 찾아오는 반다나를 한 여자 때문에 목요일 전전날인 화요일부터 자신도 모르게 콧노래를 불렀다.


목요일 저녁 8시가 되고 어김없이 반다나를 한 여자는 카페에 들어와 라떼 한 잔을 시키고 가방에서 프랑스 자수를 꺼내 자수를 놓기 시작했다. 반봉만은 그녀를 의식하지 않으려고 애를 썼지만 본인도 모르게 그녀가 있는 쪽으로 시선이 가곤 했다. 몇몇 손님이 오고 가고 가게 안은 한적했다. 가게 주인은 반봉만에게 "오늘 손님이 별로 없으니 일찍 들어가 쉬도록 해"라고 말했다. 반봉만이 앞치마를 벗고 짐을 정리해 나올 때까지도 반다나를 한 여자는 프랑스 자수에 집중하고 있었다. 반다나 여자가 보이자 반복만은 그녀에게 말을 걸고 싶다는 생각으로 간절했다. 주변에는 가게 주인과 동료들이 있었고 반봉만은 그들의 눈앞에서 그녀에게 말을 걸 자신이 없었다. '그냥 집에 가자' 반봉만은 속으로 생각하며 가방을 고쳐매고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막상 몇 미터 떨어지지 않은 눈앞에 그녀를 보자 반봉만은 그녀와 함께 웃고 떠들며 길을 걷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손을 잡고 마주 앉아 있는 상상을 했다. 반다나가 생겨난 이유가 그녀 때문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반봉만은 머릿속이 멍해졌다.  "이거 프랑스 자수죠? 프랑스 자수를 두기에는 카페 안이 조금 어두운데 불을 좀 더 밝혀드릴까요?" 그가 말했다. 반다나를 한 여자는 천장과 주변을 둘러보더니 그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

"아니요 괜찮아요. 이제 곧 일어날 거라서. 가게 안이 조금 어둡긴 하네요"

"그렇죠? 카페 안이 조금 어두워요. 저기 바 자리는 조금 밝아요. 프랑스 자수 계속하는 거라면 저쪽 자리에 앉는 게 좋아요. 다음번에 저쪽에 앉아보세요."

"아. 네 감사해요."

여자는 반봉만에게 시선을 거두고 고개를 숙이며 본인이 한 자수를 들고 이리저리 살피며 말했다.

카페 안은 시끌벅적했지만 둘이 있는 이곳만큼은 우주의 한구석에 있는 공간처럼 고요했다.

반봉만은 무어라도 이야기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렵게 낸 용기를 이렇게 허무하게 떨쳐버릴 수는 없었다.

"어.. 프랑스 자수 재밌나요? 매일 이 시간에 오시는 것 같은데 프랑스 자수.. 그러니까 바느질이죠?"

여자는 고개를 숙인 채 옆으로 살짝 얼굴을 돌려 반봉만을 쳐다보고는 한 쪽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네 바느질이요."

그리고 또다시 적막이 흘렀다.

반봉만은 온몸에 땀이 스멀스멀 올라와 가려움이 느껴졌고, 입술을 지그시 물고 머리를 긁적거렸다.

여자는 고개를 좌우로 돌리며 스트레칭을 하더니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무엇이라도 해야 한다.' 반봉만의 머릿속에는 계속 같은 생각이 맴돌았지만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

"바느질! 아 바느질! 그렇죠 바느질 좋아요."

그가 말했다.

그 말을 듣고 그녀는 어이없다는 듯이 미소를 지으며 그를 쳐다보았다.

"저기.. 커피 마실래요?"

반봉만이 물었다.

"지금까지 여태껏 커피 마셨어요."

"아.."

반봉만의 머릿속은 하얗게 됐다. 뒤에서 그 상황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던 가게 주인과 동료들은 반봉만을 보며 키득거렸다.

"그러니까 커피 말고 맥주 마셔요 맥주."

반다나 여자는 웃으며 말했고, 반봉만은 그녀의 말에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세차게 끄덕거리고는 그녀를 밖으로 이끌었다. 반봉만은 그녀에게 카페 사람들이 그녀를 반다나라고 부르고 있음을 이야기해주었고, 그녀는 평소 반다나 하는 것을 매우 좋아하며 그 별명이 마음에 든다고 했다. 그녀의 이름은 유미였다. 두 사람은 맥줏집에서 맥주를 마셨다. 둘은 아직 어색했다. 반봉만은 목요일이 되면 유미가 카페에 오는 날이구나라는 생각을 했다는 이야기와 원래는 손님에게 관심을 갖은 적이 한 번도 없다는 쓸모없는 이야기와 변명 아닌 변명을 늘어놓았다. 한편 유미는 그가 본인 외에 많은 손님들에게 말을 걸었든 안 걸었든 상관없다고 했다. 반봉만은 자신이 어디 살고 있으며 어떤 전공을 했지만 지금은 커피가 좋아 카페에서 일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녀는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으며, 평소 여러 사람들을 자주 만나기 때문에 일주일에 하루 정도는 혼자 보내고 싶어 그 카페에 간다고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반봉만의 눈은 생기로 가득 찼고 말이 점점 빨라져 횡설수설하거나 맞선에서 할 법한 질문들을 묻기도 했다.

"아메리카노 좋아해요? 아니면 라떼 좋아해요?"

"음.. 플랫 화이트요"

유미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럼.. 제일 좋아하는 영화는 뭐예요?

"영화 잘 안 봐요"

"그럼.. 좋아하는 만화 있어요? 만화책 같은 거 봐요?"

"초등학교 이후로 안 본 것 같은데.."

반봉만의 두서없는 질문에 유미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단답으로만 대답했다.

'왜 예쁜 여자들은 항상 이렇게 단답으로만 이야기하는 걸까. 아니 내가 싫은 건가.' 반봉만은 어떻게든 그녀와 대화를 이어나가고 싶어 머리를 쥐어 짜냈다. 가게 안은 선선했으나 반봉만의 이마와 손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반봉만은 계속 말도 안 되는 이야기들을 늘어놓았고 다행히도 유미는 그런 반봉만이 재미있는지 소리 내어 웃기도 하고 하얀 이를 드러내고 크게 미소 짓기도 했다.

"산책하는 거 좋아해요? 걷는 거 어때요? 잘 안 걸어 다니죠? 왠지 그럴 것 같은데 매일 차만 타고 다니고"

반봉만은 심술궂은 표정을 하며 유미를 놀리듯이 비아냥거렸다.

"좋아해요"

유미는 눈을 반짝이며 환한 미소를 짓더니 답했다.

"네! 네?"

"걷는 거요. 산책하는 거 좋아해"

본인의 대답에 당황하는 반봉만을 보며 유미는 소리 내어 웃었다. 반봉만은 환하게 웃는 유미의 미소가 좋았다. 반다나가 잘 어울리는 유미가 좋았다. 갈색으로 염색한 유미의 머리칼과 커다란 눈이 좋았다.

맥주를 좀 더 주문하고 시답지 않은 이야기를 하며 대화를 나누었다. 이제 막 피기 시작하는 벚꽃들과 살랑거리는 봄바람을 맞으며 가로등이 듬성듬성 나있는 거리를 산책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했다. 유미는 많은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한두 번씩 반봉만의 이야기에 공감한다는 듯이 반봉만의 팔을 살짝살짝 치며 답했다. 유미와 헤어지고 나서 반봉만은 몇 시간 전에 벌어진 믿을 수 없을 만한 엄청난 일과 때론 미친 척하고 딱 20초만 용기를 내 볼 필요가 있다는 영화를 계속 떠올렸다.

반봉만은 그녀와 연애를 하는 상상을 하며 잠들었다.

그 뒤로 매주 유미가 카페에 오는 목요일이면 반봉만이 퇴근하는 10시 30분 이후로 둘은 가볍게 맥주를 마시거나 산책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유미가 카페에 오지 않는 날에는 최근에 개봉한 영화 이야기나 프랑스자수 이야기를 전화나 문자로 나누었다. 반봉만은 카페 안에 있는 꽃들을 보며 유미가 하는 반다나를 떠올렸고, 카푸치노를 만들며 유미의 얼굴을 떠올렸다.


반봉만이 유미를 알게 된지 한 달 반이 되던 날은 벚꽃이 만개한 축제 기간이었다. 날씨가 포근하고 벚꽃이 만개한 날이어서 그런지 밤인데도 불구하고 거리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반봉만은 이렇게 멋진 벚꽃은 처음 본다며 들떠서 이야기했고, 유미는 웃으면서 "그렇네 근데 사람들이 너무 많다."라고 답하며 반봉만의 옷자락을 살짝 잡았다. 반봉만은 유미가 쥔 자신의 옷자락이 신체 일부가 된 것 마냥 온 신경을 곤두세웠고 유미 쪽으로 고개를 돌리지 못하고 앞만 보았다. 벚꽃이 만개한 거리를 지나 둘은 와인 바로 들어갔다. 가게는 포근했고 은은한 꽃향기와 초 타는 냄새가 풍겼다. 가게 안은 천장에 매달린 조그마한 전등과 듬성 듬성 있는 초가 불빛의 전부였는데 덕분에 바닥이 잘 보이지 않아 유미는 반봉만의 팔을 살짝 잡고 자리로 갔다. 와인을 주문하고 반봉만은 유미를 쳐다보며 생각에 빠졌다. 그동안 많지는 않지만 다양한 사랑이 있었다. 너무 집착한 나머지 가게 안에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와 곤란하게 만든 여자도 있었고, 무심하여 하루 종일 연락이 잘 되지 않던 여자도 있었다. 말하는 것을 좋아해 하루 종일 재잘재잘 거리던 여자도 있었고, 핸드폰을 보느라 반봉만을 쳐다봐주지 않는 여자도 있었다. 모든 사랑의 처음은 특별하고 작은 감정에도 커다란 불로 번지기도 하지만 결국 모두 다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앞에 있는 유미는 달랐다. 유미에게는 처음 가본 이국적인 나라나 처음 맡아보는 설레는 향기처럼 머릿속이 아득해지며 감상에 젖어 푹 빠져들게 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유미가 문득 입을 열었다.

"나 사실 만나고 있는 사람이 있어"

"뭐라고?"

멍하니 유미에게 빠져 있던 반봉만은 갑작스러운 그녀의 고백에 눈이 번뜩 뜨였다.

"만나고 있는 사람이 있어. 너하고 이렇게 될지 몰라서 이야기하지 않았어."

반봉만은 그녀를 쳐다볼 자신이 없어 고개를 푹 숙이고 상황을 이해하려고 애썼다.

유미는 반봉만에게 깊은 감정을 가질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이야기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리고 그 사람과는 5년을 만났지만 최근 사이가 좋지 않아 헤어지려고 서로 연락을 하지 않는 중이며 최근 한 달 반 동안 한 번도 보지 않았다고 했다. 반봉만에게 숨길 수도 있었지만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반봉만이 너무나 좋아 숨기고 싶지 않아서라고 했다. 그리고 반봉만이 원한다면 더 이상 만남을 이어나가지 않아도 되나 유미는 계속 반봉만과 만나고 싶다고 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그게.."

잠자코 듣고 있던 반봉만은 일을 살짝 벌리고 턱을 내밀며 정색을 하고 말했다.

"미안 얘기해서"

유미는 고개를 숙이고 나지막하게 이야기했다. 와인이 나오고 주변의 초들은 방금 열리고 닫힌 문의 바람에 위태위태하게 흔들거렸다. 어이가 없어 허탈한 마음으로 고개 숙인 유미를 보던 반봉만은 유미의 얼굴에서 반짝이며 떨어지는 눈물을 봤다. 유미는 글썽이는 눈으로 반봉만에게 미안하다고 했다. 그리고 만나던 그 남자가 얼마나 못된 남자고, 연락하고 싶은 마음도 없으며 사랑은 진작에 끝난지 오래라고 했다. 반봉만은 유미의 말을 더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갑작스러운 그녀의 고백과 순수한 말투, 대화와 어울리지 않는 방금 전까지의 분위기가 반봉만을 얼떨떨하게 만들었다. 반봉만은 유미가 장난을 친 것이라거나 이 상황이 꿈이라고 믿고 싶었다. 유미는 고개를 들더니 눈물이 그렁한 커다란 눈으로 반봉만을 보았다. 반봉만은 마음이 조급해졌다.

"아니. 나는 무슨 소린지 모르겠어. 그래서 어떻게 하자는 거야."

유미는 다시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내가 좋으면 기다려줘. 정리하고 올게. 아니면 그냥 오늘 나를 버리고 가줘. 거짓말해서 미안해. 거짓말을 한건 나니까. 말하지 않은 것도 거짓말이야."

유미가 어깨를 들썩이며 훌쩍거리자 반봉만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반봉만은 유미의 옆자리로 가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알았어. 알았으니까 이제 울지 말고 뚝 그쳐."

반봉만은 유미를 안아주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달래주었다. 반봉만은 계속해서 그녀를 토닥여주었고 들썩이던 유미는 차츰 평온을 되찾았다.

눈물이 정말 그치고 나서 그녀는 반봉만을 올려다보았고 반봉만은 그녀에게 키스를 해주고 나서 다 이해한다며 그녀를 다시 안아주었다.

그들이 가게 밖으로 나왔을 때 벚꽃이 만발한 거리에는 어떤 그림자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반봉만은 유미의 어깨를 감싸고 집까지 바래다주었다. 그리고 집 앞에서 가벼운 키스를 나누고 헤어졌다.

집으로 돌아온 반봉만은 침대에 누웠으나 잠에 들지 못했다. 그는 새벽시간 안에 갇혀 차분한 마음으로 생각에 잠겼다.

모든 게 순탄할 것만 같은 사랑은 왜 없는지 그리고 영화 같던 만남이 해피엔딩으로 가지 않고 시련이 오는지 고통스러웠다.

반봉만은 오히려 본인은 화를 내고 그녀는 충분한 용서를 구했어야 했는데 어째서 유미를 위로해주느라 진땀을 뺏는지 알 수 없었다.


그날 이후로 반봉만과 유미는 완전한 연인과 같았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불쑥불쑥 스킨십을 했고, 매주 목요일뿐만 아니라 일요일에도 둘은 만났다.

영화를 싫어한다던 유미는 반봉만과 영화를 보고 밤거리를 산책하고 사랑을 속삭였다. 유미는 반봉만을 만날때면 반봉만이 선물한 반다나를 항상 하고 반봉만은 유미가 짧은 머리를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머리를 짧게 잘랐다.  둘은 며칠간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고 사랑하며 보통의 연인과 같이 하루하루를 보냈다.

한 달 동안 반봉만은 그녀와 보낸 순간순간들이 행복했지만 마음은 조금씩 초조해했다. 유미는 한 달째에도 아직 그 남자와 정리를 못했다며, 어떻게 이야기를 꺼내고 접어야 될지 모르겠다고 했다.

반봉만이 그 문제로 화를 내면 유미는 5년이라는 세월을 어떻게 단숨에 잘라낼 수 있겠느냐며 눈물을 글썽였다. 그리고 반봉만에게 지금이라도 힘들면 자신을 내쳐도 좋다며 미안하다고 했다.

유미의 눈물을 보면 반봉만은 또다시 그녀를 위로해주었다.

반봉만의 마음속 끓는 점은 100도씨에 다 다르었고 불타는 마음은 감추지 못해 그녀에게 집착했다.

목요일이 되어 유미가 카페에 오면 카페인에 집중하지 못하고 그녀 주변을 서성거렸고, 꽃다발이나 액세서리 같은 것을 불쑥불쑥 선물했다.

그리고 그 남자와 정리가 되었는지 시도 때도 없이 그녀에게 물었다. 보름 넘게 반봉만의 조급함이 계속되자 유미는 신경질을 내기도 했고 종종 반봉만에게 이상해졌다고 타박했다.

그날 이후로 한 달이 넘도록 그 남자와 아직 헤어지지 않은 것이 이상했으나, 반봉만은 계속해서 기다렸다.

그는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남자에게 질투심을 느껴 유미에게 툴툴거리기도 했고 갑작스럽게 혼자 두려움에 빠져 유미에게 사과를 하며 선물을 건네기도 했다.

고백하던 날과 달리 유미는 굉장히 차분했다. 반봉만이 시도 때도 없이 연락을 보내어도 유미는 짧게 답장을 했고, 데이트를 할 때도 오랫동안 있으려 하지 않았다.

반봉만이 이로 인해 짜증을 부리고 유미에게 조금이라도 소홀해지면 유미는 반봉만의 팔짱을 끼고 같이 산책하며 반봉만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여러 달콤한 말을 속삭였다.

반복되는 상황 속에 반봉만은 갈증이 더욱더 심해졌지만 유미가 주는 물은 한두 방울씩밖에 떨어지지 않았다.

반봉만의 조급함이 끝에 다다를 즈음 그녀는 떠나기로 결심했다.

"이제 더 이상 이 카페에 오지 않으려고 그 사람을 다시 만나는 건 아니야. 그냥 우리는 만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 "

목요일 밤 10시 30분 막 퇴근한 반봉만에게 유미는 이 말을 남기고는 더 이상 카페에 오지 않았고 반봉만이 보내는 어떠한 연락에도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20초의 용기와 함께 20초만큼이나 짧았던 반봉만의 사랑은 끝이 났다.

반봉만은 모든 것이 헛되고 얼마나 의미가 없는지 생각했다. 숱한 우연히 일어나고 선택을 하고 이런저런 일들이 발생하지만 결국 남는 것은 허무함뿐이라고 생각했다.

돌이켜보면 일상은 얼마나 가치가 없고 별 볼 일 없이 반복되고 있는가. 뒤돌아보면 잊어버릴 많은 것들과 쓸모없이 장황한 이야기들, 폭음, 밤샘 게임 그리고 다음날이면 잊힐 모든 것들. 그러면서도 다음날이 되면 똑같이 되풀이되는 일상이 쳇바퀴를 굴리는 햄스터와 같다고 생각했다. 반봉만은 그날 밤 한숨도 자지 못하고 무언가에게 화를 냈다. 그리고 아침이 되어 극심한 두통에 시달렸다.

매주 목요일밤 퇴근을 하고 나면 반봉만은 카페 옆 골목길에 쪼그리고 앉아 먼 곳을 멍하니 바라보며 밤이 내는 소리에 귀 기울였다.


유미가 자신을 가지고 놀다가 실증이나 그를 버렸는지, 아니면 반봉만의 조급함이 그녀를 지치게 만들었는지 그것도 아니라면 갑작스럽게 만나던 남자에게 사랑이 불타올랐는지 어떠한 것도 단정 지을 수 없었다. 반다나가 뭐라고 갈색 머리가, 이를 들어나고 웃는게 얼마나 별로인지 곱씹었다.

벚꽃이 만발했던 거리는 이제 푸릇푸릇 한 잎들이 돋아났고 날씨는 조금 더 따듯해졌다. 반봉만은 한참을 쪼그리고 앉아 있다 밤공기가 차분하게 가라앉을 즈음 집으로 향했다.



여름이 가까워져 카페는 여름 준비로 분주했다. 여름맞이 메뉴와 카페 안에 묵어두었던 먼지를 털어내고 테라스를 정비하기 시작했다.

반봉만은 모든 것이 흥미롭지 않았다. 분주한 카페와 달리 반봉만의 행동은 느릿느릿했고 동료들의 농담도 지긋지긋했다. 저녁이 되어 잠시 쉬는 시간이 찾아오면 반봉만은 산들산들한 초여름 바람을 맞으며 길거리를 산책했다. 꺄르르 하고 웃는 아이들의 소리와 분주한 자동차 소리들을 들으며 걷다 보면 잡생각이 사라지고 차분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반봉만이 카페로 들어서자 오랫동안 같이 일한 바리스타가 반봉만에게 말을 걸었다.

"반봉만이~ 저기 저 여자 봐봐. 또 왔어."

반봉만이 무표정으로 시선을 돌리자 검은색 단발머리에 짧은 원피스를 입고 초커를 한 여자가 양팔을 벌리고 입을 살짝 벌린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초커 말이야. 맨날 이 시간만 되면 와서 저렇게 멍하니 있는단 말이야. 흔들의자라도 가져다줘야겠어. 저렇게 딱딱한 의자에 거의 누워있다 싶은 자세로 몇 시간을 어떻게 있지" 바리스타의 말에 반봉만은 무표정으로 초커를 한 그녀를 계속 쳐다보았고 바리스타는 그런 반봉만을 보며 킥킥댔다.

"역시 반봉만이구만"

반봉만은 초커를 한 여자가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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