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남호남정맥 #꿈
좋아하는 게 무엇인지 알게 된 것은 고2 때였다. 그때는 꿈을 늦게 찾은 것 같아 불안하기도 하고 힘들기도 했지만 그 늦은 꿈을 이어가는 일은 더 녹녹지 않았다. 18의 꿈은 36년간 끊김 없이 이어져 왔다. 하고 싶은 것을 찾았고 공부했고 직업으로 삼아 생계를 유지하고 양육비 없이 홀로 아이를 키워내는데 큰 힘이 되어 주었다. 경제적인 부분도 있지만 실상은 흔들리지 않는 마음에 중심이 되어 주기도 했다.
젊은 날에는 억울한 게 너무도 많았다. 하고 싶은 게 많았고 이루고 싶은 것도 많았다. 하지만 인생은 내가 가려는 방향으로 나와 걸어주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지난날 그 많은 사연을 한 번에 꺼 내놓을 수 없을뿐더러 대부분 잊힌 그 시간들이 이제는 억울할 것도 분할 것도 없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젊은 날에 부족함과 주체할 수 없는 뜨거움이 스스로를 괴롭혔을 뿐 별거 없었다.
내 앞에 놓인 길을 마음에 불이 들어있으면 화가 난 체로 꽃이 들었으면 향기로운 채로 그냥 그렇게 그 길을 가는 것 그것이 인생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냥 인생이라는 길을 걷고 있을 뿐이나 너무 깊은 의미를 담아 무거울 필요 없고 너무 가볍게 여겨 낭비할 필요도 없다. 그냥 그렇게 주어진 길을 묵묵히 가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속도로 가는 거다.
건강이 좋지 않아 회복기에 있는 나는 오르기보다는 수평으로 걸어야겠다는 다짐으로 지난겨울 진안고원길 걷기에 참여했었다. 몇 차례 걷기에 참여해 지역에 정취에 흠뻑 빠져 올해는 진안고원길 완보를 계획하게 되었다. 하지만 인간은 망각에 동물이라고 오르기 직진 본능은 다행히도 아직 내 안에 살아 숨 쉬고 있어 어느 사이 산에 오르려 꿈틀거리고 있었다.
한때는 한주도 빠짐없이 150회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산에 오른 적이 있었다. 히말라야를 가겠다고 히말라를 가서, 히말라야가 그리워서 산앓이를 했었던 시간이 있었지만 삶에 치이고 건강을 잠시 놓치면서 그립지만 두려운 존재가 되었다. 그런 내가 사고를 냈다.
정맥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금남호남정맥을 오르겠다고 덜컥 신청을 했다. 조선 시대 우리 조상들이 인식하였던 산줄기 체계는 하나의 대간(大幹)과 하나의 정간(正幹), 그리고 이로부터 가지 친 13개의 정맥(正脈)으로 나누었다고 한다. 그 13개 정맥 중 하나인 금남호남정맥에 겁 없이 발을 들였다는 것을 허리가 휘도록 걷고 또 걸으면서 알게 되었다.
비가 오면 걷고 있는 능선을 기준으로 왼쪽으로 흐르면 섬진강, 오른쪽으로 흐르면 금강이 된다는 기준선을 지금 걷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니 기분이 묘해졌다. 어떤 의미를 부여하느냐에 따라 걷는 길의 의미도 달라지듯 내 앞에 놓인 길을 어떤 마음으로 걷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인생 아닐까?
1,089m의 장안산을 오르고 879m의 신무산을 오르는 사이에 작은 능선을 파도를 타듯 여러 차례 오르고 내리고서야 마침표를 찍을 수 있었다. 끝없이 너울 치는 파도처럼 펼쳐진 능선은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역시 힘듦을 이겨낸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일까? 이제 나는 금남호남정맥의 위용을 아는 사람이 되어 있고 그 과정은 힘들었지만 찬란했고 짙은 추억이 생겼다.
힘든 산행 3시간 후 먹은 점심이 맛없기란 쉽지 않지만 이곳의 밥은 특별했다. 장수군에서 지원하고 원수분 마을에서 운영하는 홍보관에서 엉겅퀴 비빔밥을 받아 든 순간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정성 어린 손길에 얼어붙은 몸뿐만 아니라 일상 속에서 얼어붙은 마음까지 몽글거리고 있었다. 누군가에 정성이 담긴 음식은 위로이고 치유가 아닌가 싶다.
식사 후에는 나른해지기 마련이지만 일행인 어르신들도 툭툭 털고 일어나시니 무거운 몸을 이끌고 다시 산을 오르고 올랐다. 내가 누구인지 여기가 어디인지 의미가 없을 때즈음에서 야 산행은 마무리가 되었다.
매운바람 아직 녹지 않은 눈 길이 나지 않는 자연 그대로의 산길은 이유를 알 수 없지만 푸근했다. 세련됨 없고 인위적인 어떠한 모습도 갖지 않은 깊은 산은 멋진 풍경을 뽐내진 않았지만 내겐 투박하지만 깊은 아버지의 품과 같았다.
감사했던 이번 코스는 밀목치 >> 사두봉 >> 바구니봉재 >> 수분재 >> 원수분 마을 >> 신무산 >> 자고개
산행 17.20㎞ / 6시간 32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