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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적으로 멈추는 용기

불안에서 벗어나 나를 회복하는 기술

by 하레온

고요를 잃어버린 시대


우리의 마음은 본래 고요한 수면과 같습니다. 하지만 지금, 그 수면은 쉴 새 없이 울리는 알림과 스크롤의 파동으로 일렁이고 있습니다. 엘리베이터에 타자마자 망설임 없이 스마트폰을 꺼내 무언가를 확인합니다. 그 짧은 침묵조차 낯설고 불안해서, 우리는 급히 의미 없는 뉴스를 읽거나 어제의 피드를 새로고침합니다.


우리는 언제부터 이렇게 고요를 잃어버렸을까요?


어쩌면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고요를 필사적으로 밀어낸 것일지도 모릅니다. '무엇이든 하고 있어야 한다'는 현대 사회의 강박, '세상과 연결되어 있어야만 한다'는 정체 모를 불안. 그것이 우리를 단 1초의 틈도 없는 소음 속으로 몰아넣고 있습니다.


고요는 물의 언어라고 했습니다. 소음은 바람처럼 스쳐 지나가지만, 고요는 바다처럼 우리를 담아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바다의 깊이를 들여다볼 시간을 갖지 못합니다. 늘 표면의 파도에만 휩쓸려 다니느라, 정작 그 아래에 무엇이 있는지 잊어버린 채로.


이 글은 그 잊힌 감각, 우리가 애써 외면해 온 '고요'에 대해 이야기하려 합니다.


'멈춤'을 두려워하는 당신에게, 그 멈춤이 실은 당신의 내면이 보내는 가장 절실한 '회복의 신호'임을 전하고 싶습니다.




본론 1: 우리는 왜 고요를 두려워하는가

Image_fx - 2025-10-28T210357.202.jpg 어둡고 복잡한 내면을 상징하는 거대한 문 앞에 망설이며 서 있는 한 사람의 미니멀한 삽화


고요를 마주하는 것은, 곧 나 자신을 온전히 마주하는 일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바로 그것이 두려운 것일지도 모릅니다. “나도 쉬고 싶은데, 불안해서 못 쉰다.”는 마음. 당신도 그런 적 없나요?


정리가 하나도 되지 않은 방을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싫은 것처럼, 어수선하고 정돈되지 않은 내면을 스스로 들여다보는 것이 끔찍한 거죠.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외부의 자극을 찾습니다. 귀에는 이어폰을 꽂고, 눈은 스크린에 고정하고, 손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스크롤합니다. 뭐라도 좋으니, 이 불편한 침묵만 깨트릴 수 있다면.


심리학자들은 현대인의 이런 상태를 '자기 자극 의존(self-stimulation dependency)'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자극을 주어야만 안정감을 느끼는, 어찌 보면 중독과도 같은 상태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진정한 안정이 아닙니다. 그저 불안을 잠시 덮어두는 마취제일 뿐입니다.


마치 지끈거리는 두통을 잊기 위해 시끄러운 록 음악을 트는 것과 비슷하죠. 잠시 잠깐은 두통을 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음악이 꺼지는 순간, 두통은 더 극심한 고통으로 되돌아옵니다.


우리의 불안도 마찬가지입니다.


불안은 '회피된 고요의 부작용'입니다. 우리는 흔히 불안해서 소음을 찾는다고 생각하지만, 어쩌면 그 반대일지도 모릅니다. 의미 없는 소음 속에 우리 자신을 너무 오래 방치했기 때문에, 정작 들어야 할 내면의 목소리를 듣지 못해 불안해지는 것입니다.


고요가 두려운 게 아니라, 그 안의 '나'를 마주하는 게 두려웠던 겁니다.


그래서 이 글이 다루는 ‘용기’는 외부의 위험을 감내하는 용기가 아니라, 고요 속에서 마주하는 내면의 불편함—그 어수선함, 그 지루함, 그 불안함—을 받아들이는 ‘인식의 용기’입니다. 즉, 침묵을 견디는 힘이 곧 자기 인식의 가장 깊은 형태입니다.




본론 2: 소음에 중독된 뇌의 구조

Whisk_59b636fb8ae55d1ad6746253b7a258e6dr.jpeg 뇌 실루엣의 절반은 고요하게 빛나고, 나머지 절반은 과열되어 붉게 조각난 모습을 보여주는 상징적 삽화


고요를 회피하는 것이 단순히 심리적인 나약함의 문제는 아닙니다. 여기에는 분명한 뇌과학적 근거가 존재합니다. 우리의 뇌는, 역설적이게도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 가장 중요한 일을 하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바로 '기본 모드 네트워크(Default Mode Network, DMN)'라는 것입니다.


이름은 조금 어렵게 들릴지 몰라도, 우리 모두가 경험하는 상태입니다. 우리가 멍하니 창밖을 보거나, 샤워를 하거나, 목적 없이 그저 길을 걸을 때... 바로 그때 이 DMN이 활발하게 작동합니다. 외부의 자극을 처리하는 데 쓰이던 에너지가 '내면'으로 향하는 것이죠.


그렇다면 이 DMN은 정확히 무엇을 할까요? 놀랍게도 '나'에 대해 생각합니다. 과거의 기억을 현재의 경험과 연결해 의미를 찾고, 미래를 시뮬레이션하며 계획을 세우고, 타인의 마음을 헤아리며 공감하는... 지극히 인간적이고 창의적인 활동을 처리합니다. 우리가 흔히 '번아웃'이라 부르는 상태는, 바로 이 DMN이 제대로 작동할 시간을 갖지 못했을 때 발생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1초의 틈도 없이 스마트폰을 확인하고, 정보를 쏟아붓고, 멀티태스킹을 하면 어떻게 될까요? 뇌는 DMN을 켤 시간을 갖지 못합니다. 마치 자동차가 정비소에 들러 점검받을 틈도 없이 24시간 내내 도로 위를 달리기만 하는 것과 같습니다. 결국 엔진은 과열되고, 브레이크는 마모되며, 언젠가 길 한복판에 멈춰 서게 되겠죠.


MIT나 하버드의 여러 뇌과학 연구들은 끊임없는 '정보 과부하'와 '멀티태스킹'이 실제로는 우리의 인지 능력을 향상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심각하게 저하시킨다는 것을 명확히 보여줍니다. 우리는 더 똑똑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저 '더 산만해지고 있을 뿐'입니다.


불안은 고요를 피한 결과였구나... 이제 조금씩 명확해집니다.


고요는 뇌에게 꼭 필요한 '휴식'이자 '의식적인 정비 시간'입니다. 우리가 고요를 '비생산적'이라며 죄책감을 느끼고 피하는 동안, 우리의 뇌는 자신을 재정비하고, 창의성을 발휘하며, 진정한 '나'를 찾을 가장 중요한 기회를 잃어버리고 있는 셈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은 낭비가 아닙니다. 그것은 의식을 리셋하는, 가장 고차원적인 뇌의 활동입니다.




본론 3: 고요가 주는 심리적 회복 메커니즘

Image_fx - 2025-10-28T210537.585.jpg 흙탕물이 가라앉으며 맑은 물이 드러나는 유리잔을 통해 내면의 명료함을 상징하는 미니멀한 삽화


그렇다면 그 고요 속에서, DMN이 활성화되는 그 순간에, 우리 내면에서는 정확히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우선, 고요를 '텅 빔(emptiness)'이나 '결핍'으로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이 글에서 말하는 진정한 고요는 '외부의 무소음' 상태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내면의 반응이 조용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세상이 아무리 시끄럽고 자극적이라도, 내 마음이 거기에 일일이 즉각적으로 반응하지 않고, 자신의 중심을 잡고 있는 상태. 그것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고요'입니다.


철학자 하이데거(Heidegger)는 ‘사유의 거주지는 고요’라고 했습니다. 인간은 침묵 속에서만 자기 존재의 근원을 다시 듣게 됩니다. 우리는 늘 시끄러운 소음 속에서 답을 찾으려 애씁니다. 더 많은 정보를 찾고, 더 많은 사람의 의견을 듣습니다. 하지만 진짜 중요한 답은 종종 가장 깊은 침묵 속에서, 내면에서부터 떠오릅니다.


거센 파도가 치는 동안에는 바다 밑바닥이 보이지 않습니다. 흙탕물이 뒤섞여 혼탁할 뿐이죠. 하지만 파도가 잠잠해지고, 물결이 잔잔해지며, 흙탕물이 가라앉기를 기다리면... 비로소 바닥에 가라앉아 있던 소중한 것들과 진짜 문제들이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내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도 이와 정확히 같습니다.


동양의 명상 전통에서는 고요를 '공(空)'이라 부릅니다. 그러나 그 공은 텅 비어 있음(emptiness)이 아니라, '모든 가능성이 잠재된 충만의 공간'입니다. 컵을 비워야 새로운 물을 담을 수 있듯, 내면의 소음을 비워내야만 새로운 생각과 진정한 자아가 그 자리를 채울 수 있습니다.


고요는 우리에게 '의식의 리셋' 버튼을 누를 기회를 줍니다.


끊임없이 외부로만 향하던 의식의 방향을 '나'에게로 되돌리는 과정입니다. 이 의도적인 멈춤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우리를 지치게 했던 수많은 자극과 감정들로부터 건강한 '거리'를 둘 수 있게 됩니다. 한발 물러서서 바라보게 되는 것이죠.


'아, 그건 그렇게까지 중요한 일이 아니었구나.'


'내가 정말 원했던 건 저 시끄러운 인정이 아니었어.'


'그 사람의 말에 내가 이렇게까지 흔들릴 필요는 없었네.'


...이런 명료한 깨달음은 시끄러운 광장 한복판에서는 절대 얻을 수 없습니다. 고요는 우리에게 생각할 '틈'을 선물합니다. 그리고 그 틈에서부터, 진짜 '나'를 회복하는 과정이 시작됩니다.




결론: 고요를 선택하는 용기


고요는 저절로 찾아오지 않습니다. 이토록 소란스러운 현대 사회에서 고요는 '선택'해야만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선택에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어쩌면 아주 큰 용기가 필요합니다.


남들이 모두 앞으로 달려갈 때, 잠시 멈춰 설 수 있는 용기. 실시간으로 '연결되지 않을 용기'. 모든 메시지에 '즉각 반응하지 않을 용기'. 그리고 무엇보다, '비생산적으로 보일 용기'입니다.


‘고요를 선택하는 것이 진짜 용기다’라는 통찰에 이르면, 우리는 비로소 실천할 힘을 얻습니다. '가만히 앉아 있는 기술(The Art of Stillness)'의 저자 피코 아이어(Pico Iyer)가 말했듯, 가만히 멈춰 서는 것은 포기가 아니라, 가장 능동적인 삶의 방식일 수 있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불안할 것입니다. 1분 1초가 어색하고, 마치 나만 뒤처지는 것 같은 조급함이 밀려올 것입니다. 괜찮습니다. 그것이 당연한 반응입니다.



그럴 때를 위해, 아주 작은 '의도적 침묵 3단계'를 제안합니다.


1단계: Detox (입력 끊기)


하루에 단 10분, 모든 기기의 알림을 끕니다. 스마트폰을 일부러 다른 방에 둡니다. 의식적으로 모든 정보의 입력을 차단합니다.


2단계: Observe (감정 바라보기)


그 침묵 속에서 떠오르는 불안, 조급함, 지루함에 저항하지 마세요. 그저 '아, 내가 불안하구나', '조급해하는구나'라고 이름 붙여주며 가만히 바라봅니다. 그 감정은 당신 자신이 아니라, 그저 지나가는 생각일 뿐입니다.


3단계: Stillness (멈춤 유지)


따뜻한 차 한 잔을 마시는 시간 동안, 아무것도 판단하거나 해결하려 하지 마세요. 그저 창밖을, 찻잔의 김을, 혹은 당신의 호흡을 바라보며 그 순간에 '존재'하는 상태를 유지합니다.


이제 우리는 오늘 5분은 멈춰볼 수 있습니다.


고요는 회복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존재를 회복한 인간의 자연스러운 상태입니다. 고요를 선택하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 불안에 반응하지 않고 삶을 주도하기 시작합니다.


고요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당신이 잃어버렸던, 당신 본연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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