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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라는 무기

불안과 싸우지 않고 이기는 법

by 하레온

고요를 불안하게 느끼는 사람들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는 그 짧은 순간, 혹은 스마트폰의 화면이 꺼진 그 찰나의 정적.


우리는 왜 그토록 고요를 견디지 못할까요?


텅 빈 방에 홀로 있는 시간을, 아무런 자극 없이 가만히 앉아 있는 순간을 우리는 마치 실패한 시간처럼 여깁니다. 무언가를 보고, 듣고, 읽지 않으면 금세 불안이 스며듭니다. 2030 직장인과 크리에이터, 특히 우리처럼 늘 새로운 정보를 처리하고 성과를 증명해야 하는 사람들에게 '고요'는 휴식이 아니라 '도태'의 동의어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가만히 있는 게 더 불안한 사람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모습일지 모릅니다. 휴식을 취하면서도 다음 프로젝트를 구상하고, 휴가지에서도 업무 메일을 확인하며, 심지어 명상을 시도하다가도 '이 시간이 과연 효율적인가'를 따져 묻습니다.


우리는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끊임없이 외부의 자극을 찾아 헤맵니다. 하지만 만약, 그 불안의 진짜 원인이 '고요의 부재' 때문이라면 어떨까요? 만약 우리가 그토록 피하고자 했던 그 '고요'야말로, 이 불안의 연쇄를 끊어줄 유일한 무기라면 어떨까요.


이 글은 불안과 싸워 이기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대신, 불안을 조용히 관찰하는 감각을 배우고, 고요를 단순한 '쉼'이 아닌 '내면 회복의 구조'로 이해하는 법을 제안하려 합니다.




본론 1: 불안은 왜 고요를 견디지 못하는가

Image_fx - 2025-11-04T212149.388.jpg 우주적 사고의 정렬


우리의 뇌는 '고요'를 썩 반기지 않는 방식으로 진화했을지도 모릅니다. 특히 현대인의 뇌는 더욱 그렇습니다. 이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3단계의 악순환 고리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1단계: 불안은 자극을 찾는다.


모호한 불안감이 밀려올 때, 우리는 즉각적으로 스마트폰을 집어 듭니다. 새로운 알림, 자극적인 뉴스, 끝없이 이어지는 숏폼 콘텐츠. 이 자극들은 불안이라는 감각을 일시적으로 마비시킵니다. 내면의 소리를 외부의 소음으로 덮어버리는 것입니다.


2단계: 자극은 뇌의 소음을 키운다.


문제는 이 지점입니다. 뇌에는 '기본 모드 네트워크(Default Mode Network, DMN)'라는 시스템이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 활성화되어, 과거를 반추하고 미래를 계획하는, 일종의 '자기 성찰' 회로입니다.


하지만 현대인에게 이 DMN은 과부하 상태입니다. 과도한 외부 자극이 DMN의 활동을 쉬지 않게 만듭니다. 솔직히 말하면, DMN은 불안을 '만들어내는' 기관이 아니라, 불안을 '되풀이 재생'하는 시스템에 가깝습니다. 가만히 있어도 뇌가 쉬지 못하고, 이미 지나간 일에 대한 후회와 아직 오지 않은 일에 대한 걱정을 끊임없이 반복 재생하는 것입니다.


3단계: 뇌의 소음은 다시 불안을 부른다.


DMN이 만들어내는 이 내면의 소음이 너무 시끄럽기에, 우리는 이를 견디지 못하고 다시 1단계로 돌아갑니다. 더 강한 외부 자극을 찾아 뇌를 마비시키는 것이죠. 불안해서 자극을 찾고, 그 자극이 뇌의 소음을 키우고, 그 소음이 다시 불안을 증폭시킵니다.


이것이 '자극 과잉'의 시대에 우리가 겪는 불안의 실체입니다.


철학자 파스칼은 일찍이 "모든 인간 불행의 유일한 원인은 자신의 방에 조용히 머무는 법을 모른다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방 안의 고요함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그 고요함 속에서 울려 퍼지는 우리 뇌 속의 소음이 두려운 것입니다.




본론 2: 고요가 뇌와 마음을 재정렬하는 방식

Image_fx - 2025-11-04T212316.698.jpg 혼란스러운 파동을 막아내는 방패를 통해, 불안을 흡수하는 고요를 상징하는 추상 이미지


그렇다면 이 지독한 악순환의 고리를 어떻게 끊어낼 수 있을까요?


답은 '고요'에 있습니다. 하지만 이 글에서 말하는 '고요'는 단순히 소리가 없는 상태(Silence)나 아무것도 하지 않는 휴식(Rest)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고요는 '인지적 환경(Cognitive Environment)'이자, '정신적 공간(Mental Space)'입니다.


"불안은 자극을 원하고, 자극은 다시 불안을 키웁니다. 고요는 그 회로를 끊어주는 '인지적 스위치'입니다."


고요는 DMN의 과도한 '되풀이 재생' 루프를 멈추게 하는 '일시 정지 버튼'과 같습니다. 시끄러운 DMN의 활동을 잠시 멈추고, 뇌가 스스로를 재정렬할 시간을 주는 것입니다. 이는 감정 '조절'이 아닌 '인지 회복'의 과정입니다.


여기서 이 글의 핵심 관점이 나옵니다. 우리는 불안을 '제압'하려 할수록 더 큰 불안에 휩싸입니다. 불안과 정면으로 맞서 싸우는 것은, 늪에 빠진 사람이 허우적거릴수록 더 깊이 빠져드는 것과 같습니다.


이때 '고요'는 무기가 됩니다.


단, 이 무기는 공격의 기술이 아니라 방어의 기술입니다.


"고요는 불안을 맞서 싸우는 창이 아니라, 불안의 파동을 흡수하는 방패입니다."


고요라는 방패를 들면, 우리는 불안이라는 감정 자체에 매몰되는 대신, 그 감정을 한발 물러서서 '관찰'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게 됩니다. 에리히 프롬이 말한 '소유(Having)'의 삶에서 '존재(Being)'의 삶으로 초점을 옮기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늘 자극을 '소유'하려 하지만, 고요는 그저 '존재'하는 상태로 우리를 되돌립니다.


이 '존재'의 상태, 즉 고요함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불안이 어디서 왔는지, 나에게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조용히 들여다볼 힘을 얻습니다.




본론 3: 일상 속 고요 실천법

Image_fx - 2025-11-04T212355.713.jpg 감각 훈련을 상징하는, 찻잔 속 찻잎의 질감에 집중한 고요하고 미니멀한 클로즈업 이미지


이 거창하게 들리는 '고요'를 일상에서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까요? 매일 한 시간씩 명상을 해야 할까요? 아닙니다. 이 글에서 제안하는 방법은 거창한 수행이 아니라, 일상의 리듬을 바꾸는 작은 실천입니다.



1. 3분 감각 훈련 (The 3-Min Sensory Training)


이는 '인지적 스위치'를 켜는 가장 빠른 방법입니다. 불안이 밀려오거나 머릿속이 복잡할 때,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3분만 투자해 보세요.


중요한 것은 "고요는 소리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소리에 휩쓸리지 않는 상태"라는 정의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외부 세계가 아닌 '내면의 감각'에 초점을 되돌리는 행위"입니다.


1분 (청각): 눈을 감고 주변의 모든 소리를 판단 없이 그저 '듣습니다'. 에어컨 소리, 멀리서 들리는 차 소리, 나의 숨소리...


1부 (촉각): 의자에 닿은 엉덩이의 감촉, 옷이 피부에 닿는 느낌, 발바닥이 땅을 누르는 압력을 '느낍니다'.


1분 (시각/후각): 천천히 눈을 뜨고, 지금 눈앞에 보이는 것 하나의 색깔과 질감을 가만히 '봅니다'. 혹은 지금 맡을 수 있는 냄새에 집중합니다.



이 훈련은 DMN이 재생하는 과거와 미래의 '생각'에서 벗어나, 지금 이 순간의 '감각'으로 뇌의 초점을 강제로 이동시킵니다.



2. 의식적인 정보 다이어트 (The Info-Diet)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너무 많은 정보를 '폭식'합니다. 고요를 위한 공간을 확보하려면, 정보의 입력을 의도적으로 차단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스마트폰을 확인하는 대신, 10분간 창밖을 보거나 따뜻한 차를 마십니다.


출퇴근길에 팟캐스트나 영상을 보는 대신, 의식적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주변 풍경을 관찰합니다.


잠들기 1시간 전을 '디지털 단식 시간'으로 정하고, 화면 대신 책을 보거나 조용한 음악을 듣습니다.



이것은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 아니라, 뇌가 오늘 수집한 정보를 처리하고 재정렬할 '여백'을 주는 필수적인 과정입니다.



3. 불안 관찰 노트 (The Anxiety Observation Note)


불안을 회피하거나 억누르는 대신, 그것을 '관찰'의 대상으로 삼습니다. 작은 노트를 마련해, 불안한 감정이 들 때마다 적어보세요.


언제? (예: 월요일 오전, 주간 회의 직전)


어떤 느낌? (예: 가슴이 답답하고, 손바닥에 땀이 난다)


어떤 생각이 드는가? (예: '지난번처럼 실수하면 어떡하지', '준비가 부족한 것 같아')



핵심은 '나는 불안하다'가 아니라, '나는 지금 불안이라는 감정을 관찰하고 있다'고 분리하는 것입니다. 이 객관화 과정만으로도 불안은 통제력을 상당 부분 상실합니다. 우리는 불안에 압도되는 대신, 불안을 '데이터'로 활용하게 됩니다.




결론: 고요는 불안을 없애지 않는다. 다만, 다스릴 수 있게 해준다.


이 글을 끝까지 읽으셨다 해도, 아마 당신의 불안이 마법처럼 사라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솔직히 말하면, 이 글의 목적은 불안을 '제거'하는 것이 아닙니다.


불안은 때로 우리에게 위험을 알리고, 더 나은 준비를 하도록 독려하는 자연스러운 신호입니다. 문제는 그 신호가 너무 시끄러워, 우리 삶의 주도권을 빼앗아 가는 것입니다.


고요라는 무기는 불안을 죽이는 창이 아니라, 그 시끄러운 소음 속에서 나의 중심을 지키는 방패입니다. 고요는 DMN의 폭주를 멈추는 '일시 정지 버튼'이며, 불안에 휩쓸리지 않고 '내면의 감각'에 집중하게 하는 '인지적 스위치'입니다.


우리는 불안과 싸워 이길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불안이 앉을 자리를 내어주되, 내 삶의 중심까지 내어주지 않으면 됩니다. 고요는 그 중심을 지킬 수 있게 해줍니다.


"불안이 사라지는 날은 오지 않습니다. 다만, 그 불안을 조용히 바라볼 수 있는 나로 진화할 수는 있습니다."


이것이 '고요'라는, 세상에서 가장 조용하지만 가장 강한 무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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