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월을 첫날. 임시공휴일이라 바다를 갈까 생각했다. 바다에 가려면 두 시간을 달려야 한다. 바다에 온통 빠져있을 땐 매주 가기도 했다. 그저 바다가 좋아서, 바다가 보고 싶어서, 좋아하니까, 보고 싶으니까 가능했다. 마음이란 그런 것이다. 못할 것 같은 일을 해내게 했던 것 좋아하기 때문이었다. 요즘은 체력이 마음을 따라가지 못한다. 일어나긴 했지만 몸이 무거워서 나가지 못했다. 이대로 휴일을 보낼 순 없는데..
느지막이 일어나 늦은 아침 겸 점심을 먹고 밖으로 나갔다. 아침엔 날이 좋은 것 같았는데 부슬부슬 비가 내린다. 좋아하는 카페에 갔는데 상수도 공사로 임시휴무라고 했다. 인스타그램에 공지가 없어서 몰랐다. 카페 문 앞에 붙어있는 휴무공지 안내문에 마음이 뾰족해진다. 그래도 이미 나왔으니 어디론가 가봐야지. 좀 멀지만 가보고 싶었던 카페에 가기로 한다. 배가 내려서 초록의 시골길이 짙어졌다. 아직은 초록의 숲. 이제 점점 바래가겠지. 그렇게 가을로 떠나가겠지. 바래버린 마음처럼.
30분을 달려 카페에 도착했다. 카페로 가는 길은 벚나무가 가득했다. 봄에는 벚꽃터널로 더 아름다웠을 길은 비와 함께 초록의 이파리와 급하게 먼저 물든 이파리가 바람에 날린다. 카페에 도착하니 비밀이 숲이 나타났다.
구하숲.
이름부터 아름다운 이곳. 구하숲이다. 구하란 '여름철의 약 90일 동안을 이르는 말'이다. 여름철의 약 90일 동안의 숲, 구하숲은 이름답게 초록의 나무로 둘러싸여 있었다. 카페주인은 지브리 스튜디오를 좋아하는지 카페 앞 넓은 잔디밭 주변에는 토토로와 가오나시, 무대가리(?)가 있었다. 지브리 캐릭터와 계곡의 물소리와 토독토독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카페로 들어가는 길이 아름다워 한참을 서성거렸다. 오래된 목조주택을 개조해 만든 구하숲 입구에는 붉은 돼지가 기다리고 있었다. 문을 열자 삐걱거리며 지브리 영화 속 환상의 공간으로 순간이동한 것만 같았다. 천장에 달린 등에는 토토로가, 천장 나무받침에는 고양이버스가 있었다. 잔잔하게 들려오는 음악에 마음이 편안해진다. 고개를 돌리니 창밖으로 초록의 나뭇잎이 흔들리고 있었다. 마루에 낮은 테이블이라 신발을 벗고 올라갔다. 비가 와서 쌀쌀해진 날씨에 따뜻한 라테를 주문했다.
옆테이블에는 두 여성이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라테를 마시며 가져온 시집을 읽는다. 시집을 읽다가 필사를 한다. 그러다 가만히 창밖을 바라본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가 아름답다. 조용하고 평화로운 공간, 이야기를 나누는 목소리, 어쩐지 뭉클해진다. 옆자리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차분하면서 단단한 목소리로 위로하고 용기를 주는 말들이 들려왔다.
너무 좋아해도 네가 가장 중요해. 좋아한다고 해서 나를 버리고 그 사람에게만 맞춰줘서는 안 돼. 너의 힘든 시간을 잘 버텨내 줘서 너무 기특해. 정말 대단해. 네가 버텼기 때문에 지금이 있는 거야. 그러니 얼마나 대단해. 대견하다, 잘하고 있다고 너 스스로에게 말해줘. 내가 들려주는 말도 위로가 되겠지만 스스로에게 말해줘야 해. 다른 누구도 아닌 네가 가장 중요하니까. 내가 나를 대견하게 여겼으면 좋겠어. 네가 이렇게 잘 버텨주고 잘 살아가줘서 고마워. 나는 고마워라는 말을 좋아해. 오래가는 관계를 위해서는 꼭 고마워라는 말을 자주 해줘야 해. 네 옆에는 내가 있잖아. 언제든 네가 필요할 때면 내가 있어줄 거야. 너에게 위안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어. 너를 일으키는 사람이 되고 싶어. 너는 잘 해내고 있어. 잘 해내지도 못하더라고 괜찮아. 지금 충분히 애쓰고 있고 버티고 있고 그렇게 조금씩 나아가는 거야. 누군가에겐 보잘것없는 작은 걸음이라도 내가 알아. 내가 너를 지켜봐 왔으니까. 한심하고 나약한 모습은 누구에게나 있는 거야. 그걸로 너무 괴로워하지 마. 너 자신을 함부로 미워하지 마. 너는 대단한 사람이야.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야. 그러니까 너도 너를 좋아했으면 좋겠어. 내가 좋아하는 네가 너를 미워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어.
그녀의 이야기는 잠시였고 그 후로는 내가 듣고 싶은 말들을 떠올렸다. 이야기는 다른 이야기로 이어졌지만 내 마음속에서는 계속됐다. 나를 칭찬하는 말, 나를 위로하는 말, 내가 듣고 싶었던 말들로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비는 부슬부슬 내리다가 토독토독 내리다가 바람에 나뭇잎이 휘날리고 창밖을 바라보다 눈물을 감추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사람들이 떠나고 홀로 남은 구하숲 속에서 나는 오래오래 창밖을 바라보았다. 내 안에서 울려 퍼지는 위로를 들으며. 환상의 구하숲이었다. 숲에서 나가고 싶지 않을 만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