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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리 Sep 25. 2024

105. 건들바람과 소슬바람

가을 타나 봐


오늘의 단어채집


건들바람
• 초가을에 선들선들 부는 바람

소슬바람
• 가을에, 외롭고 쓸쓸한 느낌을 주며 부는 으스스한 바람.



불과 일주일에 끝나지 않는 여름에 대한 글을 썼다. 그리고 하루도 채 되지 않아 여름이 끝났다. 추석이 지나고 나자마자 바람이 서늘해졌다. 바람은 선선하다 못해 차갑기까지 했고 무척이나 많은 비가 내렸다. 그렇게 유난히 덥고 괴로웠던 여름은 갔다.


추석이라 가족들이 모였다. 부모님과 시댁에서 넘어온 둘째와 셋째 동생네, 나와 막둥이 동생까지 오랜만에 집이 북적거렸다. 다 함께 맛있는 음식을 먹고 조카들의 재롱을 구경하고 아빠와 제부들은 술 한 잔을, 엄마와 우리(동생들)는 식탁에 모여 앉아 호두를 까먹으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화목하고 즐거운 가족의 모습, 우리 모두의 노력으로 만들어낸 장면이다. 가족은 멀리 있을 애틋할 수도 있겠지만 가까이에 있으면 괴로운 관계이기도 하다. 다정하지도 살갑지도 않은 부모와 남편과 육아에 지친 동생들, 미래가 불투명한 나와 막둥이까지 가까이에서 지켜보는 가족들의 삶이란 퍽퍽하다.


바람이 서늘해지니 마음도 서늘해진다. 선선하게 불어오는 바람과 초록의 숲이 차츰 색을 잃어가는 계절, 가을을 좋아하면서도 쓸쓸해지고 만다. 가을을 타나보다. 나는 계절이 바뀔 때마다 앓기 때문에 가을뿐만 아니라 모든 계절을 탄다고 해도 되겠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왜 가을을 탄다고 하는 걸까.  




흔히 말하는 '가을 탄다'라는 증상은 호르몬 때문이다. 행복과 안정감을 느끼게 하는 세로토닌은 햇빛으로부터 나오는데 가을부터는 낮이 짧아지고 밤이 길어져서 일조량이 감소하기 때문에 무력감과 우울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가을에 햇빛을 많이 봐야 하는 이유 (핫클립 - YTN사이언스)


행복과 안정감을 느끼게 하는 세로토닌이 햇빛으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이 낯설다. 한여름, 뜨거운 태양 아래 괴로웠는데 햇빛 덕분에 행복이나 안정감을 느낄 수 있구나. 하지만 너무 과하면 행복도, 안정감도 느껴지지 않을 수 있겠지. 이번 여름은 더워도 너무 더웠으니까.


선들선들 바람이 불고 아침저녁은 살짝 춥기까지 한 요즘, 가을로 걸어간다. 호르몬이니 세로토닌이니 그런 건 상관없고 그냥 가을이라 좀 쓸쓸해졌다고 핑계를 대본다. 사실 일하는 의미 없게 느껴져서 기운이 나지 않는다. 내가 하는 일은 누구나 있는 일이고 새로운 다른 일을 하는 것은 두렵고 걱정만 앞서서 도무지 어찌해야 할지를 모르겠다.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고 싶지만 좋아하는 일이란 무엇인지도 모르는 지경에 이르렀다. 자꾸만 제자리만 맴돌고 되돌아갈 수도 없는데 뒤만 돌아보고 앞은 너무 캄캄하고 정말이지 나이에 이렇게 막막할 몰랐다.


막막해서 쓸쓸한 가을이구나. 건들바람에 편안해지고 싶은데 소슬바람이 휘몰아치는 날들이다. 햇빛이 필요한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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