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북토크에 다녀왔다. <등을 쓰다듬는 사람>이라는 책을 쓴 미술비평가 김지연의 북토크였다. 김지연 작가에 대한 사전지식이 전혀 없었고 미술비평이라는 분야 역시 낯선 글이었다. 그럼에도 먼저 읽은 친구가 무척 괜찮다고 하여 북토크를 신청했다. 서점에서 책을 받기로 해서 도서관에서 책을 빌렸다. 토요일 오전, 오후에 있을 북토크를 기다리며 책을 읽었다. 첫 문장부터 마음을 흔들었다.
"타인의 완전히 알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p.8"
우리는 타인을 알고 싶어 하고 그렇게 가까워지고 좋아하고 사랑하게 된다. 그리하여 서로를 잘 알게 되었다고 착각하기에 이른다. 내가 아는 것이 전부일 수 없고 내가 알지 못하는 이면이 분명 존재할 수 있음에도 우리는 좋아하는 만큼, 사랑하는 만큼 상대를 잘 안다고 믿는다. 그런 우리에게 타인을 완전히 알기란 불가능에 가깝다고 말하는 작가의 첫 문장이 마음을 흔들었고 읽는 내내 고개를 연신 끄덕이고 밑줄을 긋고 싶어졌다. 플래그와 밑줄로 가득한 책이 되리라.
타인을 안다는 것이 불가능에 가깝다 하더라도 우리는 서로에 대한 마음과 함께한 시간을 바탕으로 서로를 알아간다. 완전히 알기는 불가능해도 어느 정도 알아가는 것은 가능하다. 특히 사랑하게 되면 더 많은 것을 알게 된다.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싫어하는 것은 무엇인지, 성격과 취향을 알아가면서 서로에 대한 마음 역시 더 커진다. 그래서 우리의 커다란 마음에는 당신은 이런 사람이다,라는 정의를 내리기 시작한다. 그것이 온전한 사실이 아닐 수 있을 텐데도. 나의 경우에는 누군가를 발견하고 좋아하게 되면 콩깍지가 씌었다고 할 만큼 많은 것을 이해할 수 있고 포용할 수 있으며 좋은 부분만 더 부각되어 싫은 부분은 보이지 않게 된다. 콩깍지는 벗겨지게 마련이고 시간이 흐르면 전에는 이해했다고 믿었던 부분이 그저 이해한 척하고 넘어갔던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과연 완벽한 이해란 가능할까.
"네가 겪은 하루를 전부 알 수 없지만 어렴풋이나마 상상해 봄으로써, 나는 너를 조금 더 알고 싶다고. 서로의 이상함을 발견할수록 우리는 덜 외로워진다. 사랑을 '이해'라는 단어로 설명할 수 있다면, '이해한다', '이해했다'처럼 현재형이나 과거형이 아닌, '이해해 보려 한다', '이해하고 싶다'라고 쓰는 미래형일 것이다. p.94"
김지연 작가는 사랑을 이해라는 단어로 설명한다면 이해하고 싶다,라는 미래형일 것이라고 했다. 사랑할 때는 이해하고 싶었다. 그것이 불가능에 가깝다 하더라도 이해하고 싶었고 이해했다고 믿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모두 이상한 구석이 있는 법이다. 그것을 이상하다 생각하지 않고 이해해보려 하고 이해했다고 믿으며 넘어가서는 안 됐다. 사람마다 자기만의 방식과 색이 존재하며 그것을 이해하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저 이상한 대로, 이상하다 하더라고 그 이상함조차 사랑할 수 있어도 되지 않았을까.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을 이해해 보려 하기보다 그 사람의 이상함을, 그 사람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줘도 되지 않았을까.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지나쳤던 많은 인연들을 생각해 본다. '왜'라는 생각에 빠져 납득할만한 이유를 찾고 그렇게 이해하려 했던 나를 생각한다. 관계가 깊어지게 되면 더욱 이해의 늪에 빠져버렸던 그 시절을 떠올려본다. 사랑을 할 때마저 나의 방식대로만 이해했던 어리석은 나를 마주한다. 김지연 작가의 말을 빌려 좀 더 넓은 세계로, 사람에게로 들어서고 싶다.
"당신은 이렇게 이상한 방식으로 존재하는군요. 제가 지금부터 그 이상함을 한번 사랑해 볼게요." p.96
이상한 나도, 이상한 당신도 다 괜찮다. 그 이상함을 사랑할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렇게 먼 풍경을 향해 나란히 걷는다. 끝내 닿을 수 없을지라도 서로의 세계에 닿기 위해 손을 뻗은 채, 따뜻한 눈으로 등을 쓰다듬으며. p.15"
우리가 평생 서로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서로가 서로의 세계에 닿기 위해 같이 걷는 것을 포기하지 않고 싶다. 다정하게 쓰다듬는 마음을 이어가고 싶다. 그런 작고 조용한 마음에도 사랑이 있다고 믿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