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정원 시인의 <내가 네번째로 사랑하는 계절>이라는 산문집을 읽었다. 난다출판사에서 <시의적절>이라는 시리즈로 매달 한 명의 시인이 산문집을 내고 있다. 1월부터 쭉 사고 있지는 않고 좋아하는 시인의 달에만 구매하고 있다. 한정원 시인의 내가 좋아하는 시인이라서 직접 만나러 가기까지 했다. 작가의 말의 제목이 <잔서의 날들>이다.
일곱 달을 잃고, 나는 붓을 든다. 곧 가뭇없을 8월, 7월과 9월 사이의 그림자를 붙잡으려고. 그 시도는 실패가 자명하다. 어떻든 시간은 붙잡히지 않을 것이므로. 그렇더라도. 없어질 한 사람을 어루만지듯이. p.9 내가 네번째로 사랑하는 계절, 한정원
8월은 이미 지났고 9월도 어느새 20일에 다다랐다. 그런데도 여전히 폭염경보가 이어진다. 추석연휴기간 무척이나 더워서 여름이 다시 돌아온 것만 같았다. 잔서의 날들을 지나 가을로 접어들었다고 생각했는데 늦더위가 기승이다.
여름이 지나가고 있다고, 금세 사라질 여름을 아쉬워하며 남아있는 날들을 애틋하게 보자고 했다. 선명하고 쨍한 여름의 한가운데에서 나는 벌을 받듯 앓았다. 스스로가 내린 벌이었지만. 햇볕은 눈부셨고 기억은 선명하여 가슴을 지지듯 파고들었다. 이보다 강렬했던 여름이 있었던가. 사라지지 않기를 바랐지만 견디는 것은 더 두려웠다. 분명 우리는 겨울이었는데 어째서 여름을 앓게 되었을까? 더위 한풀 수그러든 줄 알고 선풍기를 닦아 들여놓으려 했는데 폭염은 그치질 않는다. 이제 다 지나가버렸겠거니 했던 마음도 잔서처럼 남아 나를 뭉근히 어지럽게 했다. 지나가버린 마음을 멀리서 다시 되돌아보며 그저 안타깝고 쓸쓸해지는 것뿐이다. 이제 너무 멀어져서 흐릿해지고 번져가는 기억이라고 믿었는데 이 여름은 자꾸만 선명해지고 그래서 눈이 부셔서 눈물이 난다고. 그것이 설령 그리움의 눈물이라 할지라도, 그림자를 붙잡을 수는 없는 거라고.
이상한 날이다. 내내 폭염경보가 이어졌다. 따가운 햇빛은 여전했는데 갑자기 어둠이 내려왔다. 오늘은 밖을 나가야겠다. 비가 내린다면 더 좋겠다. 쏟아지는 햇볕을 피해 빗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번쩍거리는 하늘에 깜짝 놀라 뒷걸음질 친다. 하늘은 번쩍이고 쾅쾅거리는 엄청난 천둥에 귀가 윙윙거렸다. 빗줄기가 날아와 얼굴을 때리고 한 손에는 빨간 우산 하나. 나는 쏟아지는 빛도 피하지 못하더니 쏟아지는 비에게서도 도망친다. 슬금슬금 다시 되돌아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