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필을요?
#나의무해한글쓰기
오늘은 오롯이 나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기로 결정했다. 안과검진을 갔다가 시력교정에 변화가 있어서 안경을 교체했다. 이른 점심으로 베이커리 카페에 가서 샌드위치와 라테, 구움 과자를 먹었다. 빵냄새가 솔솔 풍기는 한갓진 카페에서 바깥일기를 조금 쓰고 시집필사도 하고 책도 좀 보다 보니 주변이 시끌시끌해졌다. 카페가 붐비기 시작해서 자리를 옮기기로 한다.
집순이인 나는 집에 있으면 마냥 집에서만 놀아도 심심할 틈이 없지만 밖에 나오면 도장 깨기 하듯 여기저기 뽈뽈뽈 잘도 돌아다니는 편이다. 드디어 다녀온 여기, 머물다가게이다. 머물다가게는 대전동네책방으로 예전에 작은 책방이었는데 새로 이사를 해서 시즌2로 다시 오픈한 책방이다. 주택을 개조한 책방이라 초록대문에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니 친구네 집에 놀러 가는 기분이었다.
들어서자마자 알았다. 여기 내 스타일이야! 아기자기한 소품들과 오래된 주택의 창틀, 사방이 책을 둘러싸여 있고 중앙엔 커다란 책상에다 작은 쪽방(?)과 다락방까지 있었다. 너무 아름다운 공간이었다. 창가에 테이블도 있어서 밖을 바라보며 책을 볼 수도 있고 안쪽 숨은 공간에서 뒹굴거리며 만화책을 볼 수도 있는 어쩐지 추억의 아지트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한참 동안 책장을 구경한 후에 책 두 권과 스티커, 연필 한 자루를 구매했다. 책을 사서 읽으려고 가방만 달랑 들어와서(보통을 필사책가방이 따로 있다) 밑줄 그을 연필이 없기도 했고 블랙윙 독립서점 한정판 연필이 있어서 고민하지 않고 골랐다. 그런데 다른 연필은 깎아서 판매하지만 블랙윙은 깎지 않은 상태라 사장님께 말씀드렸다.
연필 좀 깎아주실 수 있나요?
네?? 연필을 깎아달라고요?
무척 당황하는 선생님의 모습에 아차 싶었다. 사장님께선 할인해 달라는 얘기인 줄 아셨던 것이다. 우리는 웃음을 터트렸고 나는 깎아달라고 하면 깎아주냐며 너스레를 떨었다. 실제로 그런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책방사장님들이 기피하는 빌런이 될 뻔했다. 저는 책방 가면 무조건 책 사는 사람입니다. 책방은 책 파는 곳이니까 당연한 소리겠죠?(진지)
그렇게 작은 해프닝으로 웃고 나니 마음이 조금 더 편안해졌다. 머물다 가게의 시그니처 캐릭터가 선인장인지 곳곳에 선인장이 있었고 스티커와 스탬프도 있어서 산 책에 도장을 찍고 스티커를 붙였다. 겨울 같지 않게 햇살이 쏟아지는 책방에서 밑줄을 그으며(사장님께서 연필깎이를 빌려주셨다) 시집을 읽었다. 나른한 토요일 오후, 나무냄새, 책냄새, 커피냄새로 가득한 친구네 집 같은 책방에서 잠시 머물다가 돌아왔다.
좋아하는 것을 위해 보내는 시간, 좋아하는 것들이 가득한 공간, 그 공간에 머물면서 좋아하는 책을 읽는 하루. 혼자서도, 혼자라서 충분히 행복한 하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