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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리 May 31. 2024

019. 심술쟁이 어린이는 이렇게 자랐습니다.

사람 안 변한다?

심술궂다
 : 남을 성가시게 하는 것을 좋아하거나 남이 잘못되는 것을 좋아하는 마음이 매우 많다.

어릴 때는 누구나 이쁘고 귀여운 시절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아무리 주관적으로 봐도 특별히 예쁘지도 못생기지도 않았다. 오히려 냉정하게 말하면 못난 쪽에 더 기울어지긴 했는데 그건 친척들의 무례한 악담 때문에 심술궂고 심통이 난 얼굴로 자랐기 때문이다. 나는 심술쟁이 못난이인형 같았다.

두 살 어린 동생이 있다.(이하 영이) 얼굴이 하얗고 밝은 갈색의 곱슬머리에, 동그랗고 커다란 쌍꺼풀진 눈. 영이은 참 예뻤다. 영이를  사람들을 누구나 예쁘다고 말했다. 그렇게만 말해도 어린 나는 상처를 받았다. 그럼 나는? 그런데 사람들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동생은 예쁜데 언니는..."(뭐! 어쩌라고!!) 라며 말끝을 흐리거나 언니는 못생겼네,라는 말을 면전에 대고 잘도 지껄였다. 그들 중에는 친척들도 있었는데 고모의 독설은 정말 가차 없었다. 누구를 닮아 이렇게 못생겼지? 그것은 잘생긴 아빠를 칭찬함과 동시에 엄마를 대차게 까는 잔인한 공격이었다. 훗날 엄마는 그런 말들을 들을 때마다 자기 들으라는 말이 아니었겠냐며 상처받은 마음을 털어놓았었다. 역시 그 마음엔 나의 상처는 없었다. 이렇게 무례하고 몰상식한 인간들 틈에서 자란 나는 그들이 말하는 대로 더더욱 못난이가 되어갔다. 그들에는 슬프지만 나의 부모도 있다. 엄마는 엄마의 상처가 먼저였고 그래서 내가 미웠다고도 했다. 아빠는 나를 예뻐한 적이 있었던가...?

영이는 계속 예뻤고 칭찬은 끊이질 않았다. 영이와 함께 노는 것은 재미있었지만 어른들을 만날 때면 나는 늘 위축되곤 했다. 나의 어른공포증의 시작이었다. 내 차례는 돌아오지 않는 칭찬을 기대했던 적도 있었지만 나는 그 와중에 왈가닥이었다. 눈치도 없이 망아지처럼 날뛰던 시절이었다. 어쩌면 그렇게라도 해서 짓밟힌 나의 자존감을 숨기고 미움받아도 자유로운 영혼인 것처럼 살았던 나의 어긋난 관심 끌기였을지도 모르겠다.

영이는 커서도 예뻤다. 영이는 일찍부터 취업을 해서 집안의 기둥이 되었다. 나는 못난이 주제에 대학에 가겠다며 어려운 형편 따윈 아랑곳하지 않고 전문대도 아니고 4년제 대학에 입학했다. 이럴 때 미운 짓만 골라서 한다고 하나보다. 내 멋대로 내가 하고 싶은 전공을 골라 흥청망청 놀며 이십 대 청춘을 보냈다. 영이는 원하지도 않던 장녀역할을 떠 넘겨받고 소처럼(실제도 소띠, 소띠는 일복이 있다던데...) 일을 했다. 부모님이 원하는 선자리에 나가 중매결혼을 했고 지금도 여전히 엄마의 기댈 곳이자 집안의 일꾼으로 독보적인 딸로 살고 있다. 나는 제대로 된 일 (정규직, 사대보험, 연월차가 있는 회사)은 하지 않고 학습지와 학원가를 떠돌다 지금에 이르게 되었다. 좀 더 거창한 미래를 꿈꾸고 큰소리쳤었는데 항상 쌀쌀맞고 심술궂은 큰언니는 한결같이 걱정거리, 애물덩이가 되어 챙김을 받고 있다. 영이야말로 나를 업어 키웠다. 돈 없는 대학생일 때도, 마음이 병들어 주저앉았을 때도, 언제나 나를 부축했던 것은 영이였다. 갈 곳을 잃고 헤매는 다 늙은 언니를 가여워하고 안쓰러워하면서. (우리 가족에서 내게 부여된 역할은 미움받고 자라 심통 가득한 철부지 동생 같은 언니다. 나는 동생들에게 죄책감과 책임을 떠넘기고 나 혼자 좋아하는 것을 하고 자유를 즐기며 그러면서 어딘가 불안하게 살아가는 캐릭터를 맡고 있다.)

사실 나를 못난이로 만든 건 어린 시절의 무례했던 그들이 아니라 나 자신일 것이다. 나는 그저 사랑받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어린 시절을 돌아보니 나 생각보다 귀여웠던데? 내가 나를 예뻐해 줄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러기엔 나는 그걸 볼 수 있는 눈이 없었다. 나를 보듬어줄 어른이 필요했던 것은 맞지만 그런 이유로 투정을 부리기엔 너무 많은 시간이 흘렀다. 이제는 내가 나를 이뻐하고 사랑해 주기에도 모자란 것이다. 여전히 상처받고 슬펐던 어린 날의 나는 불쑥 나타나 나를 넘어뜨린다. 내가 씩씩하게 나아가려고 하면 심술궂은 얼굴로 나를 괴롭힌다. 하지만 심술궂으면 좀 어떠랴. 나는 심술쟁이 못난이 나여도 괜찮고, 망아지같이 날뛰던 천방지축 나도 귀엽다. 좀 더 빨리 알았더라면 좋았을 테지만 말이다.

내가 원하는 나는 다정하고 세심하면서 귀여운 나. 어린 날의 나는 천방지축 심술쟁이 못난이. 어른이 된 나는 어중간하게 다정한 거 같기도 하고 냉정한 거 같기도 한 나. 디른 사람들에게 나는 어떤 모습으로 보일지는 잘 모르겠다. 어떤 모습으로 보이더라도 모두가 나일 것이다. 나는 나 자신을 살아갈 것이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더 좋은 모습으로, 못난 모습을 조금씩 다듬어나가면서. 나를 싫어하는 사람은 신경 쓰지 않고 오롯이 나 자신으로.


그럴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맨날 다짐만 하는 프로다짐러의 고백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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