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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리 Jun 12. 2024

030. 인생책

대신하다

대신하다 

어떤 대상의 자리나 구실을 바꾸어서 새로 맡다.


오래도록 죽고 싶었다. 아니다. 살고 싶지 않았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어릴 때부터 축적되어 온 우울의 그림자는 항상 나를 따라다녔고 자기혐오로 가득 찬 나를 미워하는 시간을 보냈다.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은 없을 거라고 믿었었다. 누군가에게는 목소리 큰 천방지축 웃긴 친구일 때도 있었고 눈매가 사나운 성질 나쁜 사람으로 보이기도 했다. 누구라도 나를 공격할 것 같으면 온몸을 가시로 방어하는 고슴도치처럼 뾰족했었다. 죽고 싶어서 죽을 방법을 찾다가도 누구라도 좋으니 나를 좀 사랑해 줬으면, 내가 얼마나 마음 여린 사람인지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으로 살았다. 내가 작은 아이였던 그 시절에 멈춰서 그 시간을 벗어나지 못하고 주저앉아 앞으로 나아가지도 그렇다고 사라지지도 못하면서 이도저도 아닌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러니까 죽고 싶었던 게 아니라 살고 싶지 않다, 아니 살고 싶다는 마음이었던 것을 나중에서야 알았다.


그때 만난 책이 바로 이병률 시인의 <끌림>이었다. 여행과 사진, 글쓰기는 내가 바라는 미래이자 이루고 싶은 꿈이었다. 그 어떤 것도 이루지 못했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지 못했는데 <끌림>을 만나면서 이렇게 책을 읽는다는 것만으로도 설레고 있는 나를 보게 되었다. 책 속에는 여행지에서의 정보는 전혀 없이 그저 사진과 글만 있을 뿐이었다. 사진은 그곳이 어딘 궁금하게 했고 시인의 시선이 마음에 들었다. 그것만이었다면 이 책 나의 인생책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시인이어서였을까? 시인이 들려주는 이야기들이 아름다워서 눈물이 나곤 했다. 시인의 사랑이, 마음이, 시간이 마음을 채워주었고 그가 쓴 문장들을 곱씹고 옮겨적고 비슷한 글들을 적어보곤 했다.


‘나는 그렇게 시작하고 싶은 것이다.

당신의 습관을 이해하고, 당신의 갈팡질팡하는 취향들을 뭐라 하지 않는 것,

그리고 당신이 먹고 난 핫도그 막대를 버려주겠다며

오래 들고 돌아다니다가 공사장 모래 위에 이렇게 쓰는 것.


「사랑해」


그러니 나에게 시간을 달라.

나에게 당신을 사랑할 수 있는 시간을 달라.’


나는 시인의 글처럼 시간이 필요한 사람이었다. 그동안 사랑이 있기는 한 건가, 사랑받을 수 있는 가치가 있는가를 생각하며 살았는데 사랑은 여기에 있다고 사랑하고 사랑받는 일을 멈추지 말라고 말하는 이 책이 나에겐 큰 위로가 되었다. 쓸쓸한 겨울 들판 같던 내 마음에 조금은 따뜻한 온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그렇게 시인의 글들을 동력 삼아 조금씩 일어나고 싶게 만들었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다고 생각하지 말자.

가질 게 없어 불행하다고 믿거나 그러지 말자.

문밖의 길들이 다 당신 것이다.

당신은 당신이 주인이었던 많은 것들을 모른 척하지는 않았던가.’


나는 시인 덕분에 문장의 아름다움을 알았고 시인의 시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의 시집사랑이 시작된 것이다. 끌림을 시작으로 이어지는 여행산문집과 꾸준히 발표하는 시집을 읽으면서도 나는 여전히 부족하고 순간순간 나를 미워하고 자책하는 사람으로 살고 있다. 하지만 괜찮다. 더 이상 주저앉아 있지 않고 걷고 있기 때문에. 성큼성큼 걷지는 못해서 조금씩 나아가고 있다고 믿기 때문에.


이제는 안다. 

사랑은 어디에나 있다.


**오래전 인생책을 주제로 썼던 글을 대신한다. 

사랑은 어디에나 있다고 믿었던 그 찰나의 순간을 오래도록 잊지 못할 것이다.

작은 한줄기 빛이었는데 나는 그게 너무 눈부셔서 그 순간 눈이 멀었다.

사랑은 어디에나 있지만 내 곁에 없는 이 시간이 쓸쓸하지만

사랑은 여전히 너무나 두려운 일이지만

그래서 사랑은 있되 사랑하지 않는 시간을 살아가게 되겠지만

그렇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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