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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리 Jun 22. 2024

040. 헤매다 보면 결국 여기

이런 나를 이해할 수 있어?

모순

어떤 사실의 앞뒤, 또는 두 사실이 이치상 어긋나서 서로 맞지 않음을 이르는 말. 중국 초나라의 상인이 창과 방패를 팔면서 창은 어떤 방패로도 막지 못하는 창이라 하고 방패는 어떤 창으로도 뚫지 못하는 방패라 하여, 앞뒤가 맞지 않은 말을 하였다는 데서 유래한다.


혼자 있고 싶지만 혼자서 외롭고 싶지는 않다. 사랑하고 싶지만 사랑하기 위해 먼저 다가가지는 못한다. 나를 좋아한다고 하면 의심부터 하지만 당신이 나를 좋아한다는 믿음이 생기면 막무가내로 달려간다. 나는 혼자서도 괜찮다고 하지만 무조건적인 사랑을 바란다. 부지런하고 성실하고 싶지만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고 한없이 게으르고 싶다. 돈을 많이 벌고 싶지만 일은 하고 싶지 않다. 친구를 찾지만 친구를 만들려는 노력은 하지 않는다. 마음이 맞는 사람을 찾지만 마음을 내보이고 문을 열어주지는 않는다. 당신이 너무 좋아서 당신을 붙잡고 싶지만 당신을 감당할 주제는 못된다. 지적이고 똑똑해지고 싶지만 공부는 하기 싫다. 책을 많이 읽고 싶지만 책을 읽기 싫다. 글씨를 잘 쓰고 싶지만 정성스럽게 쓰지는 않는다. 다정한 사람이 되고 싶은데 거슬리는 게 많다. 다정하게 대하지만 알고 보면 다정하지 않다. 아무 생각 없이 살면서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것도 없으면서 똑 부러진 척 잘도 해댄다. 우울의 늪에 빠져 살면서 즐거운 척 잘도 깔깔댄다. 당신을 보고 싶지만 당신을 보는 게 두렵다. 시를 좋아하지만 시를 이해하지 못한다. 책을 많이 읽었지만 기억나는 것은 없다. 따뜻한 마음을 갖고 싶은데 뾰족하고 냉정하다. 앞으로 나아가고 싶은데 뒷걸음질만 잘 친다. 사랑을 주고 싶은데 사랑을 모른다. 사랑을 받고 싶은데 믿지 않는다. 사랑을 믿지 않으면서 오롯이 나만을 사랑해 줄 사람을 찾는다. 건강을 챙겨야 하는데 건강에 나쁜 짓만 골라서 한다. 당신을 이해하고 싶지만 나에겐 이해심이 없다. 긍정적으로 살아야지 싶다가도 부정적인 생각만 가득하다. 내가 선택한 삶이 옳다고 믿으면서도 뭔가 잘못되고 있다고 믿는다. 구구절절 설명하는 것을 좋아하지만 제대로 아는 것은 없다. 글을 잘 쓰고 싶어 하면서 글을 적당히 잘 쓴다고 착각한다. 글을 쓰고 싶은데 무엇을 써야 할지 모른다.


나는 나를 가장 미워하면서도 가장 안쓰럽게 여긴다. 나는 나를 애틋하게 여기면서 남을 우습게 여기기도 한다. 나는 늘 이런 모순적인 태도로 사는 내가 힘들고 피로하다. 극단적인 자기혐오는 결국 극단적인 자기애다. 나는 나의 마음만 생각하느라 당신의 마음은 생각하지 못한다. 나는 나의 마음에 매몰되어 당신의 마음 따위 알아주지 않는다. 나는 나의 모순 안에 갇혀서 나를 망가뜨려놓고 나를 안아준다. 아무도 나를 안아주지 않으니까. 나의 모순을 나도 이해할 수 없으므로 당신도 나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나를 잃었다. 나는 당신을 잃었다. 나는 나를 찾아 헤맨다. 나는 당신을 찾아 헤맨다. 오늘도 누군가에게 다정한 말을 건네고 농담을 하고 웃어놓고 또다시 끝도 없는 우울의 바다로 뛰어든다.


결국 여기구나.

당신도 여기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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