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돈을 지나다

레이먼드 카버 『대성당』중 <열>

by 장소록
"그는 그렇게 뭔가가 완전히 끝났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이전의 삶과 관계된 그 무언가가." (p254)


『대성당』 중 <열> , 레이먼드 카버, 문학동네


지나간다.

열여덟, 열아홉 소녀와 소년의 뜨겁게 타오르던 시간도, 둘이 함께 무언가를 이루고 함께 나이들리라던 믿음도. 속절없이, 시간의 흐름에 휩쓸려 그렇게.


여자는 떠나고 남자는 아이들과 남겨졌다. 일상이 흔들리고 평범한 하루치의 안녕이 간절하다. 그는 헝클어진 일상을 같이 세워줄 누군가가 필요했고, 그때 아이들과 가사를 돌봐줄 웹스터 부인이 찾아온다. 부인은 아이들을 씻기고, 따뜻한 한 그릇의 끼니를 준비한다. 웹스터 부인 덕분에 그의 일상의 흔들림은 잦아든다.


남자는 아내가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예감에 괴로워하며 미움의 말을 내뱉다가도, 사랑한다고 돌아와 달라고 간절한 기원을 읊조린다. 혼자 있는 밤이면 아직도 사라지지 않는 아내를 향한 사랑에 고통스럽다.


웹스터 부인 덕분에 생활의 안정을 되찾은 어느 날, 그는 심한 열병을 앓게 된다. 그에게 전화한 아내는 열병 중의 그에게 말한다. 지금의 이 고통을 적어보라고. 그 고통 속에서 메시지를 찾으라고.

'일이 지나간 뒤에야, 나중에야 그걸 읽을 수 있어.'(p248)


남자는 아픈 자신을 돌봐주는 웹스터 부인에게 아내와의 지난 시간을 이야기한다. 웹스터 부인은 그의 이야기를 모두 들어준다. 남자는 그렇게 이야기를 토해냄으로써 지난 시간을 떠나보낸다. 이야기를 모두 들어준 웹스터 부인은, 경제적 안정을 찾기 위해 다른 지역으로 떠나게 되었음을 알린다.


자신의 안에 고였던 모든 것을 고백한 후 열병의 끝자락에서 남자는 비로소 깨닫는다. 자신의 삶의 한 시절이 지났다는 것을. 보낼 수 없어 억지로 부여잡고 있던 삶의 한 구간이 영영 끝났음을.


"그는 이제 모든 게 끝났다는 걸 이해했고 그녀를 보낼 수 있다고 느꼈다."(p254)



때때로 보낼 수 없는 것들이 나를 통과해 지나가 버린다.

놓을 수 없어 간절히 매달려봐도 지나가는 것들을 돌이킬 수는 없다.

그것은 때론 한 사람의 얼굴로, 때론 한 시절의 기억으로 내게 머물던 것들이다.

그것들은 열병을 통과하듯, 깨질듯한 고통 없이는 보낼 수 없는 것들이다.


그러나,

지나간다.

한 사람도, 한 시절도.


그리고 함께 꿈꾸던 것들이 사라져도 삶은 이어진다.

열병의 기록을 더듬거리며 오늘 치의 걸음을 옮긴다.

치명적인 상실에도 존재는 한 그릇 끼니 앞에 앉는다.

우리의 오늘이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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