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 『렉싱턴의 유령』 중 <토니 다키타니>
"혼자 있는 건 그에게 있어서는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며, 굳이 말하자면 인생에서 겪을 수밖에 없는 일종의 전제 조건이라고까지 생각하기도 했다."(p132)
『렉싱턴의 유령』 중 <토니 다키타니> , 무라카미 하루키, 문학사상
다키타니와 아내가 처음 만났을 때 두 사람은 열다섯 살의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희한할 정도로 말이 잘 통했다. 두 사람은 만나면 마치 그동안의 공백을 메우려는 듯이 하염없이 이야기를 이어갔다. 세상에 태어난 지 사흘 만에 엄마를 잃은 남자와 옷에 병적으로 집착하는 여자. 그 둘은 내면에 텅 빈 방을 지닌 사람들이었다.
2004년에 제작된 이치카와 준 감독의 동명의 영화 포스터는 빈방에 각자의 방식으로 앉은 두 남녀를 보여준다. 두 사람의 '통함'은 서로의 내면에 도사린 빈 방, 서로의 그 커다란 결핍을 무의식 중 알아채고 공감하며 깊어진 동질감의 결과는 아니었을까. (『렉싱턴의 유령』에 실린 단편 제목은 '토니 다키타니', 영화 제목은 '토니 타키타니'로 표기됨.)
다키타니는 사랑을 만남으로써 고독을 발견한다. 사랑으로 채워짐으로써 비로소 자신의 내부에 뚫린 빈방의 존재를 알아채게 된 것이다. 갑작스러운 사고로 아내가 죽었을 때 그는 아내의 옷을 입고 자신의 곁에 있어줄 여자를 구한다. '습관으로 고독에 익숙해진 사람'이었던 그가 고독하지 않은 삶을 경험하고 나자 다시 또 고독해지는 것에 대한 공포를 갖게 된 까닭이다. 다키타니는 아내의 그림자인 옷들을 버리지 못한 채, 아내의 부재로 인한 고독과의 직면을 유예시키려 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곧 허망함을 깨닫고 옷들을 처분한다.
다키타니의 아내는 옷에 병적으로 집착하는 여자였다. 눈에 드는 옷을 보면 완전히 자제심을 잃고 몸에 이상이 생긴 것처럼이나 달라지는 모습을 보였다. 그녀는 옷 사는 걸 삼가라는 다키타니의 지적에, 꼭 뭔가에 중독된 것처럼 옷 사는 걸 멈출 수가 없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새 옷을 사지 않으려 집 안에 머무는 동안 그녀는 어쩐지 자신이 텅 비어버린 느낌, 공기가 희박한 행성 위를 걷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갖는다. 다키타니는 아내를 만남으로써 빈방을 채웠지만 그의 아내는 여전히 채우지 못한 빈방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를 죽인 것은 황색 신호에 무리하게 교차로를 뚫고 달린 대형트럭이 아니라 어쩌면 그녀 내부의 빈방이었을지 모르겠다. 내면의 빈방을 옷으로 채우고자 했던 그녀의 갈급함이 끝내 그녀를 죽인 것은 아닌지.
토니 다키타니는 토니라는 이름으로 인해 혼혈로 오인받고 놀림당하며 혼자만의 생활에 익숙한 사람으로 성장한다. 이름은 그 사람을 드러낸다. 첫 이름은 자신이 지을 수 없고, 누군가에 의해 지어진다. 토니가 만약 토니가 아니었다면, 미군 소령이 아닌 그의 아버지가 그에게 일본인다운 이름을 정성껏 지어 불러주었더라면 어쩌면 토니의 삶은 좀 달라지지 않았을까. 이름으로 인해 자신의 본질과 먼 모습으로 살아나가게 된 토니 다키타니가 무리에서 멀어져 고독해진 것은 어쩌면 필연이었을 것이다.
토니 다키타니는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고 재능이 있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미술대학에 진학하여 일러스트레이터가 되었다. 토니 다키타니는 그림에 자신의 생각을 가미하지 않는다. 다만 눈에 보이는 그대로 옮길 뿐이다. 누구나 좋아하는 인성을 지녔지만, 그가 누구와도 현실적인 레벨을 넘어서는 인간관계를 맺을 수 없었던 이유, 그것은 자신의 색채, 즉 자기라고 드러낼 수 있는 본질적인 모습이 없어서였을 것이다.(내부에 채워지지 않은 텅 빈 공간을 지녔기에)
자신의 색채로 누군가를 만나 상대의 색채와 어우러지고 변화를 경험하는 것, 그것이 인간관계의 본질이라는 생각이 든다. 토니 다키타니의 절대적인 고독은 자신의 색채가 없고 그래서 타인의 색채를 알아볼 수 없으며, 타인과 만났을 때 접점에서 서로의 색채에 물드는 변화를 경험할 수 없었다는 데 근본적인 이유가 있는 것 아닐까 싶다.
고독은 공기처럼 어디에나 있어서 잠시 잊어먹을 수 있을 뿐이고, 행복은 늘 등 뒤에 있어서 단지 기억될 수 있을 뿐(신형철_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 영화 평론가 이동진은 영화 『토니 타키타니』에 평점 9점을 주며, '삶 전체의 빈자리를 단 한번 내뿜는 한숨에 담는다'라는 한 줄 평을 남겼다.('씨네21'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