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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소록 Nov 12. 2024

조선 1930_여행의 시대

성현경 엮음  『경성 엘리트의 만국 유람기』

독립과 해방에 관한 정치적 발언이 금지된 식민지 조선의 상황에서 기행문은 그것이 할 수 없는 정치적 역할을 감당하고 있었다. 이들 기행문은 여타 피식민지의 발견을 통해 조선의 억압된 상황을 이야기하는, 정치성을 내장한 텍스트였던 것이다.(p9)


『경성 엘리트의 만국 유람기』, 성현경 엮음, 현실문화


이 책은 1930년 전후 식민지 조선의 지식인이 외국여행 후 적은 기행문을 엮은 책이다. <삼천리>라는 잡지에 실린 내용을 읽기 쉽게 정리하여 묶었다. 일제의 검열을 거치는 잡지인 만큼 노골적으로 정치적 소견을 제시하는 내용은 없지만, 인도나 아일랜드, 필리핀 같은 식민지나 신생 독립국들에 대한 지대한 관심과 연대의식을 확인할 수 있는 글들이 많다.


이 책에는 허헌, 최승희, 나혜석, 박인덕, 정석태, 최영숙, 손기정, 오영섭, 안창호 등의 기행문이 실려있는데, 특히 인상 깊은 작품은 나혜석과 최영숙 두 여성의 기행문이다. 나혜석은 조선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였고, 최영숙은 조선 최초의 유학파 경제학사였다.




나혜석은 만주에서 러시아, 스위스, 벨기에, 베를린, 파리, 런던에 이르는 세계 여행을 통해 자유를 만끽했고, '여성으로서의 정체성과 인생관'을 발견한다.(세계여행으로 형성된 나혜석의 정체성이 여행 이후의 삶을 파국으로 이끌었다는 평가도 있다.)


그녀는 스위스를 여행하며 자연경관을 이용하여 수입의 대부분을 벌어들이는 그들을 보며 조국의 미래 모습을 구상해 보기도 한다.

우리나라도 강원도 일대를 세계적인 피서지로 만들 필요가 절실하다. 동양인은 물론이요, 상하이, 베이징, 톈진 등 동양 각지에 있는 서양인을 끌 필요가 있다. 그들은 매년 거액을 들여 스위스로 피서를 간다. 강원도에는 삼방약수가 있고, 석왕사와 명사십리 해수욕장, 내금강, 외금강 등의 절승지가 있으니 이렇게 구비된 곳은 세계상 없을 것이다.(p123)


나혜석은 미술을 전공한 사람으로서(일본 도쿄의 사립 여자미술학교에서 공부했다.), 세계여행 중 미술관 관람을 빼놓지 않았다. 영국의 그림을 감상하며 프랑스와 비교하기도 하고,

"인상파적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아서 프랑스에 비하면 1세기쯤 뒤떨어진 느낌이 든다."(p138)

유명 화가의 작품을 모사하기도 하며,

"주목할 것은 풍경화의 시조로서 프랑스 19세기 인상파에게 큰 영향을 끼치고 미술사상 저명한 지위를 가지고 있는 컨스터블의 작품이다. 광선의 방향과 구도와 색채가 활기 있었다. 컨스터블 그림을 카피하기 위해 여러 번 다녔다."(p138)

미술관의 규모와 전시법에 놀라기도 한다.

"영국 회화 중 초상화는 세계적으로 인정한다. 영국 박물관은 진열 방법과 이용 방법이 교묘하며 풍부한 표본과 수집에는 놀랐다."(p139)


그리고 자신이 묵은 프랑스 가정의 생활모습을 보며 "아무래도 자유로운 곳에 참사랑이 있는 듯싶다.(p151)"라며 부부 중심의 가정생활에 대해 언급하기도 한다.(이런 경험이 여성에게 억압적인 조선의 부부생활을 견디기 힘든 것으로 느끼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나혜석은 세계여행을 통해 자신의 지향점을 발견했고, 여성의 삶에 대한 고찰과 각성을 품었다. 세계여행 기간은 조선 여성으로서는 누리지 못할 것들을 체험하고 누리는 시기였다. 그녀는 여행 후 돌아온 조선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채 사생활 문제로 이혼을 겪고, 처참한 경제적 곤란과 사회적 비난으로 고통받다 불행한 최후를 맞았다.


(*이 책에 실린 그녀의 그림들이 눈길을 끈다. 1931년 미술전람회에 세 작품을 출품하여 출품작 모두 특선을 비롯한 입선을 하고 뒤이어 일본 제국미술대전에도 입선할 정도의 그림실력이었지만, 그녀는 자신의 작품을 팔기 위해 일본인 실업가에게 편지로 사정을 해야했다.)

 




최영숙은 열여덟의 나이로 중국 유학을 떠났고, 이후 스웨덴 스톡홀름 정치경제과를 졸업했다. 졸업 이후에는 유럽을 비롯한 세계 20여 개국을 여행했다. 유럽 각국과 이집트 등을 거쳐 도착한 인도에는 4개월간을 머문다. 그녀는 제국주의의 식민지인 조선의 처지와 닮은 인도의 현실을 보며 동질성과 연대감을 느낀다.


조선에 돌아온 최영숙은 경제적으로 심각한 집안 형편으로 취업이 절실했으나 그만한 인텔리 여성을 수용할 일자리가 조선에는 없었다. 조선 최초의 스웨덴 유학생이자 경제학사였던 최영숙은 '콩나물 장사'로 연명하며, 은사였던 김활란이 계획한 공민학교 건립 계획을 돕다 과로로 쓰러져 숨졌다. 그녀 나이 28세였고, 조선에 돌아온 지 5개월 만이었다.


조선에 돌아와 노동운동에 투신하며 경제사회학을 살려보려 했던 최영숙의 원대한 꿈은 그렇게 사그라졌다.  




시대를 앞서 나간 두 여성에게 조선 땅은 혹독하여 그들의 삶은 결국 불행으로 치달았다. 여성해방론자로서의 면모를 보이던 나혜석은 이혼과 사회적 지탄 속에 괴로워하다 무연고자 행려병자로 세상을 떠났고, 최영숙은 5개 국어에 능통한 뛰어난 사람이었지만 조선에 돌아온 후 일거리를 얻지 못한 채 궁핍함에 시달리다 5개월 만에 사망했다.


뛰어난 두 여성의 참혹한 말로는 조선 사회의 폐쇄성과 여성에 대한 잔인한 편견과 대우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이 책에 함께 엮인 기행문을 쓴 다른 남성들이 조선 사회에서 지도자의 역할을 담당하며, 그들의 외국여행 경험이 높이 쓰인 점을 볼 때 조선이라는 사회가 유독 여성에게 얼마나 가혹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1930년대 조선은 대중문화가 만개한 시기였으며, 그로 인한 대중들의 세계에 대한 열망이 한층 고조된 시기였다. 대중 종합지의 등장으로 해외여행 기행문은 일종의 문화적 교양의 영역으로 자리 잡았다. 기행문은 대중적 읽을거리로서 식민지 조선인에게 국제 정보와 세계에 대한 지식을 전달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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