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개 성씨가 모인 2세대 가족의 미래를 그리다
2014년 이주 이래 4번째 '모국 방문'. 뭐든 메모하고 곱씹기 좋아하는 기록 강박자로서 이번 여행을 정리하면서 자신에게 물었다. '가장 의미있었던 일은?' 몇 달이 지나고 사금파리가 물 속에 가라앉듯 답이 이렇게 나왔다. '그건 가장 의미심장한 사진 한 장과 식사 한 끼로 요약할 수 있지.'
먼저 사진을 꺼내볼까. 천고마비의 깨끗한 하늘 아래 7명의 인간들이 어깨동무하고 서 있다. 신장은 114~187센티미터, 검은 머리 5명, 금발 머리 1명, 연갈색 1명. 성별은 여자 4명, 남자 2명, 논바이너리 1명이다. 국적으로 보면 스웨덴 1명, 미국 1명, 한국 5명이고, 출생연도는 1964년에서 2015년으로 폭넓게 분포해있다. 이 인간들은 나와 여동생, 언니와 언니의 딸, 그리고 세 자매의 현재 짝궁들이다. 기혼, 폴리아모리 파트너십, 동거 연애 중.
그러니까 이 사진은 우리 7명이 모두 한국에 모인 최초의 시간에 대한 기록이다. 할로윈 파티, 모닥불과 바비큐, 수목원 산책, 가족오락관 게임, 다국어 수다로 2박 3일 여행을 채웠다. 이 사진이 내게 각별해진 건 한 친구의 예리한 코멘트 덕분인 듯 하다.
내게는 순탄치 않았던 그동안의 가족 관계를 잘 아는 친구가 진심으로 기뻐하며 말했다.
의미심장한 식사 한 끼는 그 사진을 찍은 다음 날 부모님 집에서 7명 더하기 엄마가 나눠 먹었다. 메인 메뉴는 꼬막비빔밥. 간장 양념으로 무친 꼬막은 아이 때부터 내가 좋아했던 것인데, 독일에서도 가장 허기진 날이면 생각난다.
엄마표 꼬막은 8년 만인가. 청와대 요리사 뺨치는 헌신과 열성, 완벽주의를 가진 엄마는 당신 생각에 가장 이상적인 조합의 재료와 양념을 비장의 카드처럼 썼을텐데, 그 결과물은 실로 뛰어났다. 외국인과 아이가 있으니 맵지 않게, 친숙한 비빔밥이면서 향토적 변형으로 식상하지 않게. 엄마는 이렇게까지 헤아렸을까.
모두가 순식간에 먹어치우고 입맛을 다셨으니 어쨌거나 대성공. 우리들이 나고 자란 곳은 무안과 부산, 서울, 스톡홀롬이나 캔자즈 시티 근처 시골로 제각기 다른데도 똑같은 음식에 그렇게 한 몸으로 몰입한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다.
사진 한 장과 식사 한 끼를 나는 이렇게 골똘히 기억하고 기념하고 있다. 두 사건들이 아예 일어나지 못할 뻔했다는 것이 여전히 온몸으로 생생해서다. 정상성(이성애 동족)에서 다소 벗어난, 사회적 인증 절차(결혼)를 거치지 않은 관계들을 정상 가족으로 초대하기까지, 부모이거나 자녀, 언니 또는 동생, 인터내셔널한 연인 사이인 우리들은 지난한 양보와 타협, 포용과 인정, 설득과 배려, 단절과 기다림의 시간을 통과해야 했다.
또한 내국인과 외국인, 여행자와 거주자, 아이와 어른, 집주인과 손님으로서 그 역할 속에서 혹은 그 역할을 초월해서 서로에게 다정하고 관대하기로 했기 때문에 사진을 함께 찍고 밥을 나눠 먹을 수 있었다. 그 어떤 것도 당연하지 않다. 놀랍고 고맙다.
독일 집에 돌아와 사진은 벽에 붙여놓았고, 꼬막비빔밥은 혀를 굴리며 그리워한다.
현재 5개의 성씨로 구성된 이 집안의 2세대가 활약하는 시간이 이제 막 시작된 셈인데, 모계중심으로 흘러갈 것이 거의 확실하다.
집안의 어른 김여사는 많은 독자들이 열광한 장편소설 '시선으로부터'에 나오는 임시선 여사 같은 유명인사가 아니고 그런 카리스마형 가모장은 아니지만, 특출난 손맛과 미감과 기도발로 가족을 번성시켜왔다. 그녀의 딸들이 그 기질과 기술을 제각각 계승해나가고 있다. 게다가 기존 문법대로 말하자면 딸들이 오롯이 '친정'에 집중할 수 있는 조건이다.
기혼인 큰딸에게는 시부모님이 안 계시고 둘째와 셋째딸들의 유사 '시댁'은 유라시아 대륙 반대편에 있는 데다, 문화적으로 학습된 기대치가 완전히 다르다. 명절이나 생신에도 전화 한 통 내지는 5만원 미만 선물과 카드 한 장이면 충분하다. 눈치 볼 필요 없이 '친정'에 부비고 퍼줘도 된다.
여성 가족 구성원들의 조합이 다양하면서 조화롭다. 교육계-예술계-산업계로 일하는 분야는 다르지만 취미나 가치관, 관심사에서 공감대가 단단하고 성격과 기질의 다름과 닮음에 대한 상호 분석값을 꾸준히 공유해왔다. 트렌드에 발맞춰 혈액형에서 MBTI까지 아주 진지하게 파고 든달까.
마지막으로 이 집안은 말하자면 '수평적 다자 리더십 모델'이 구현되는 곳이다. 어른 1 엄마는 대체로 정답을 확고하게 갖고 있지만 고압적이지 않고, 어른 2 아빠는 고비 사막도 나홀로 걸으며 니체와 가상 연애를 할 사람이라 가족 리더십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큰딸은 촘촘한 효도와 교류 플랜을 그리면서도 결코 강요하지 않는다. ‘돌아온 탕자’ 둘째는 앞으로 빚 갚는 심정으로 적극 협조할 것이며, 셋째는 주장은 강한데 자원은 딸리는 둘째 몫까지 경제력을 지원할 수 있다. 사위는 과묵하고 경우가 바른 편이라 보기 불안하지 않고, 유사 사위들은 한국말이 짧아서 나설래야 나설 수가 없다. 대신 주는 대로 복스럽게 잘 먹고 등산이나 김장 같은 육체 활동 시에 몸을 사리지 않는다.
흠, 일견 치밀해 보이는 이 모든 분석과 전망은 닭보고 봉황이라고 우기는 재주가 탁월한 나, 둘째딸의 과대망상인지도 모른다. 너무 나갔나?
그래도 좋아. 지금, 이제, 나는 충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