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늘도 도서관 인문학 강의를 듣는다

다르게 감상하는 최후의 만찬

by 하루달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이다.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그림이다. 원근법을 사용하였고 소실점은 예수에게 향한다. 이는 모든 중심은 예수라는 것을 의미한다. 창문과 문, 천장이 모두 직사각형의 구조를 이루고 있는데 유일하게 가운데 창문 위에 아치형으로 장식되어 있다. 아치는 예수의 후광을 의미하고 르네상스 시대이기 때문에 중세 시대에 비해 은밀하게 표현되었다. 예수는 삼각형 구도이다. 안정적이며 삼위일체 종교적 메시지를 전한다. 그림은 예수가 나를 배신할 자가 이 중에 있다는 말을 한 후 열 두 제자들이 동요되는 모습이다. 예수 왼쪽 세 번째 위치한 자가 유다이다. 왼쪽에서 빛이 비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다의 얼굴에만 그림자가 지워져 있다. 빛이 유죄를 선고한다는 의미이다. 빛은 곧 신이다. 이 그림에서 가장 독창적인 부분은 조명이 어디서 비추는가 생각해 볼 부분에 있다. 창문은 예수 뒤쪽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빛은 우리가 바라보는 화면 앞 왼쪽, 즉 그림 밖에서 비추고 있다. 따라서 식탁이 환하게 비추고 있으며 인물들의 명함이 드러난다.




최후의 만찬- 라이너 마리아 릴케


현자처럼 스스로 결정한 그의 주위에

그들이 모여 있다. 놀라서 당황한 자들,

자신이 속했던 무리들로부터 떠나는 그

그들을 낯설게 지나쳐 가는 그

그를 심오한 행위로 길러냈던

옛 고독이 그를 엄습한다

이제 그는 다시 감람산 숲을 방랑할 것이며

그를 사랑하던 자들은 그에게서 도망칠 것이다



그는 그들을 마지막 만찬에 오도록 했다

(한 발의 총성이 새들을 이삭들로부터

쫓아내듯이) 그는 그의 말로써 그들의 손들을 빵으로부터

쫓아낸다: 손들은 그에게로 날아와

불안스레 원탁을 가로질러 펄럭이다가

빠져나갈 출구를 찾는다. 하지만 그는

황혼의 시간처럼 도처에 있다




릴케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그림을 보고 시를 지었다. 이를 사물시라고 한다. '그'는 예수이고 '그들'은 제자들이다. 이름을 밝히지 않고 대명사를 쓴 이유는 종교적인 의미로 한정 짓기보다는 더욱 보편적 상황으로 확대하기 위함이다. 1연은 '그'에게 집중되어 있고 2연은 '그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회화는 장면을 보여주기 때문에 정적이고 공간적이며 감각적으로 지각한다. 문학은 동적이며 시간적 흐름이 있고 정신적으로 내용을 파악한다. 1연에서 과거시제, 현재시제, 미래시제가 시간의 흐름을 보여준다. '떠나다', '지나쳐 가다', '방랑하다", '도망치다' 등의 동사는 그림 속의 예수의 정적인 고독을 동적으로 바꾼다. 1행의 '현자처럼 스스로 결정한 그"에서 예수는 무엇을 스스로 결정한 것일까. 성경에서 예수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해 목숨을 바친 구세주이다. 인간을 사랑하나 하느님의 뜻에 따라야 하는 가혹한 운명을 가진 사람이다. 그도 자신의 운명에 대해 두려운 마음이 들었고 하실 수만 있다면 이 운명을 바꾸어달라고 애원하기도 한다. 그러나 릴케는 예수는 스스로 운명을 결정했다고 재해석했다. 예수가 느낀 고독은 왜 '옛 고독"인가. 복음을 전파할 때 느낀 고독은 제자들과 분리된 고독이며 구세주로 성장하기까지 필연적으로 느껴야 했던 수행과도 같은 고독이었다. 사랑을 받는 것을 거부하고 사랑을 주는 것을 선택한 자는 고독할 수밖에 없고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예술가 또한 마찬가지이다. 2연에서 제자들의 손들이 그들을 대신하고 있다. 회화에서 열 두 제자들도 손으로 말하고 있다. 릴케는 손을 새로 비유한다. 제자들은 무엇이 두려운 것일까. 성경에서는 유다뿐만 아니라 모든 제자들이 예수를 모른다고 부정하며 죽음을 목격하지 않고 도망쳤다. 그리고 예수가 자신은 죽을 것이고 부활할 것이라는 운명을 들려주는 말도 믿지 않았다. 자신이 예수를 배신할 거라는 운명에 대한 두려움을 나타낸다. 릴케는 재해석한다. 제자들이 느끼는 불안은 절대자 그리스도에게 느끼는 낯선 감정, 내적인 상태이다. 그러나 예수는 도처에 있다. 그림에서 중심에 있는 예수처럼 그는 편재한다. 영원히 우리 곁에 있다.


그림을 보고 영감을 얻는 시는 많다. 예술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만약 그림을 그대로 언어로 표현한 시였다면 독창성이 있는 시가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림을 보고 느끼는 개인의 감정이 다 다르듯이 시인도 재해석한다. 나는 예수를 배신하고 불안을 느끼는 제자들에게 인간적인 면을 보았다. 믿음이 부족하다고 손가락질하기보다는 절대자에게 느끼는 낯선 불안에 무척 공감이 된다. 인간은 누구나 안정을 추구한다. 변화는 두려운 것이다. 그 변화가 바로 눈앞에 펼쳐지면 도망가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불안하고 두렵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최후의 만찬'은 인간적인 제자들에게 초점을 맞추어 새롭게 보게 된다.






램브란트의 "독서하는 티투스" 그림이다. 아들 티투스가 책을 읽는 장면을 그렸다. 명함이 두드러진다. 명함은 영혼적인 것의 표현을 상징한다. 인물의 얼굴, 책, 손에 밝은 빛이 비치어 있다. 인물은 눈을 아래로 뜨고 입술을 살짝 벌리고 있다. 독서에 몰입하는 모습이다. 세속적인 것에서 벗어나 젊은 그는 감정적인 격동을 느끼며 생기 있는 생각에 빠져 있다. 책에서 얻은 지식은 그의 머릿속으로 유연하게 들어간다. 그의 머리카락과 소매 주름이 곡선으로 표현되어 동적인 사고를 의미한다.




독서하는 자- 라이너 마리아 릴케



누가 그를 알겠는가

현실적 존재로부터 떠나 빽빽이 찬 책장들을

재빨리 넘기는 것을 때때로 강력하게 중단시키는

두 번째 존재를 향해 얼굴을 숙인 이 자를


그의 어머니조차도 확신하지 못하리라

저기 제 그림자로 적셔진 것을 읽고 있는 자가

그인지를. 그리고 시간을 갖는 우리는

그가 힘겹게 책에서 시선을 뗄 때까지 그에게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러갔는지 어떻게 알겠는가. 저 아래 책 속에

담긴 모든 것을 두 눈으로 들어 올리면서

눈은 받아들이는 대신 주면서

완성된 가득 찬 세계에 부딪친다

혼자 놀다가 갑자기 현존하는 것을

경험하는 조용한 아이처럼

그러나 정돈되었던 그의 용모는

영원히 전환된 채이다



1연에서 책 읽는 것을 중단시키는 '두 번째 존재"는 무엇일까. 책을 읽다가 우리는 잠깐 멈출 때가 있다. 사고가 움직이고 책 속의 내용으로 빠져들어가 주변 세계와 단절되어 고립된 몰입 상태이다. 2연의 "제 그림자로 적셔진 것"은 책에 완전히 동화된 상태이다. 그런데 우리는 '시간'을 가졌다. 그의 시간과 우리의 시간은 어떻게 다른가. 우리가 갖는 시간은 일상적으로 흘러가는 시간이고, 그의 시간은 일상적인 시간과 밖의 시간을 갖는 동시성이다. 3연에서 '눈은 받아들이는 대신 준다'라고 표현한다. 무엇을 주는가. 읽는 행위가 충만되어서 더 이상 외부로부터 받아들이지 못하고 외부를 향해 발산한다. 그리고 세계와 부딪친다. 왜 부딪치는가. 다 끝난 것이라고 단정 짓는 고정된 세계 속의 진부함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충돌하는 것이다. 독서의 정신적 영향을 보여준다. 그는 대명사로 쓴 이유는 인물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독서하는 행위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독서가 우리에게 큰 영향을 준다. 단 한 권의 책이 운명을 바꾸기도 한다. 독서하는 순간을 포착한 시가 무척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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