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방 하나가 있다. 아파트가 살짝 ㄴ자 구조로 되어 있는데, 그 모서리 부분에 접해 있는 방이다. 그 방은 현재는 세라젬과 자전거 관련된 부품들을 모아 둔 방으로 쓰고 있다. 하루에 한 번은 세라젬을 하고 있으니, 매일 들락날락하는 방인 셈이다. 이 방에서 누워서 세라젬을 하고 있으면 아무래도 여러 소음들을 잘 듣게 된다. 윗집에서 운동을 하는 기구로 추정되는 물체에서 나오는 소음들도 종종 들리고, 외부에서 차량이 지나다니는 소리도 들리곤 한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팅팅 하면서 쇠가 진동하는 소리들이 들리곤 했다. 사실 크게 거슬리는 소리는 아니라서 크게 신경을 쓰지는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방의 유리창을 툭툭 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럴 수가 없는 것이 우리 집은 아파트 11층에 위치해 있다. 다른 소음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분명하게 유리창을 건드리는 소리. 참을 수가 없어서 세라젬을 하던 중에 번쩍 일어났다. 커튼을 확 제치니까 순간 눈앞에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진 것이다. 비둘기 수십 마리가 창문 앞 난간과 창문 밑에 앉아서 있었고, 수시로 들락날락거리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날개가 창문에 부딪쳐 소리를 만들어 내는 것이었다. 잠시 정신을 놓고 멍하게 있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 창문을 막 쳤다. 그랬더니 비둘기들이 놀라서 도망갔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이 우리 집 근처의 창문틀에 훨씬 더 많은 비둘기들이 앉아 있는 것이었다.
어떻게 비둘기를 쫓을 수 있을까. 인터넷에 검색해보니 이미 수많은 피해자들이 있었다. 대부분은 에어컨 실외기가 문제였다. 야외에 설치된 실외기 위에 알도 까고 똥도 싸고 별의별 짓을 다 하는 것이었다. 사람들의 대처 방법은 크게 몇 가지로 나뉘었다. 첫 번째는 케이블 타이를 이용해서 실외기 위에 앉을 수 없게 촘촘하게 가시를 세우는 일이었다. 그런데 요즘은 그 사이사이를 비둘기가 앉아있는다고 한다. 두 번째는 큰 독수리 연을 구입해서 묶어두는 것이었다. 비용이 많이 들긴 하는데 찾아보니 꽤 효과가 있다는 것이 아닌가. 마지막은 아주 가는 망사를 난간에 두르는 방법. 아무래도 가는 망사 위에는 비둘기가 앉기가 불편하니 효과가 있다고는 하지만 난간 위에 걸터앉는 비둘기에는 그다지 효과적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결과적으로 선택한 방법은 4번째 새로운 대안이었다. 바로 독수리 사진을 창문에 붙이는 것이었다. 인터넷으로 무섭게 생긴 대머리 독수리 사진을 찾아서 칼라로 여러 장 인쇄했다. 그리고 날개를 활짝 펼친 독수리 사진도 찾아서 여러 장에 나눠서 인쇄해서 큰 사이즈로 붙였다. 과연 비둘기들이 도망갈 것인가. 나도 내심 꽤 궁금했다. 그러던 와중에 재활용 쓰레기를 버리러 내려가는 길에 아래층 옆 라인에 사시는 주민 분을 만나서 비둘기에 대해서 물어보았다. 그러니 그분은 별로 대수롭지 않게 비둘기가 좀 있죠? 누가 먹이를 주나 봐요? 하면서 넘어가시는 것이었다. 분명 그 집 창문에도 비둘기 수십 마리가 앉아 있는데 말이다. 너무 쿨한 반응에 신기했다. 우리 집은 난간 위에 비둘기 똥이 수두룩하고 난간 밑 콘크리트 턱에는 비둘기 똥이 산을 이루고 있는데 어떻게 저렇게 무심하게 이야기할 수 있지? 하는 순간 깨달음이 왔다.
그 집의 창문은 사람의 가슴 높이에서 천장까지 있는 반창이었다. 그러니 외부에서 봤을 때 난간이 없고 그저 창턱이 있는 구조. 그러니 비둘기들이 앉아만 있지 그 자리에서 용변을 보거나 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 집 창문은 바닥부터 천장까지 이어진 통창이었고, 허리 높이의 철제 난간이 설치되어 있다 보니 비둘기들이 난간에 앉아서 용변을 보기 좋은 구조였던 것이다. 으슥하게 ㄴ자로 꺾인 모서리 부분의 아늑한 환경에서 철제 난간이 일종의 변기 역할을 한 셈이다. 그리고 난간에 앉아서 본 용변들은 아래쪽 콘크리트 창턱에 고스란히 쌓이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 근방에서 우리 집은 변소였다. 속된 말로 비둘기 똥간인 것이다. 그 생각이 들자 너무나 웃기면서도 너무나 화가 났다. 이놈의 자식들.
다 같이 지구라는 행성에서 먹고사는 동물끼리 자연의 현상을 해결하는 그들의 욕구 자체를 비난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왜 우리 집인가. 왜 그 많은 집 중에 우리 집이 변소인가. 억울했다. 찾아보니 비둘기 똥이 건강에도 그리 좋지 않은 균이나 곰팡이가 많다고 한다. 건강을 위해서라도 뭔가 조치를 취해야 했다. 우선은 창문을 열고 철제 난간에 묻은 용변들을 모두 닦아냈다. 부식의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래쪽 턱에 쌓인 용변들은 비 오는 날에 청소를 하기로 하였다. 그 뒤로는 낮에는 와이프가, 밤에는 내가 번갈아 가며 비둘기 경비를 섰다. 잘 때는 깜빡 거리는 자전거 전조등을 밝게 틀어 놓아서 비둘기들이 오지 않도록 하였다. 다행인 것은 대머리 독수리 사진이 꽤 효과가 있었다는 것이다.
이제 3,4일이 지났는데 그 뒤로 비둘기들이 우르르 몰려오는 일은 없었다. 가끔 눈치 없는 녀석들이 한 두 마리 와서 대머리 독수리 사진이 없는 구석 쪽에 잠시 머무는 경우는 있었지만, 그때마다 경비를 서고 있는 와이프가 유튭에서 틀어놓은 맹금류 울음소리를 듣고 도망을 갔다. 저녁에도 인근에서 숙면을 취하는 비둘기들이 많이 줄었다. 한 2주 정도 꾸준히 경계태세를 유지해서 비둘기들이 더 이상 이 근방에 얼씬거리지 않도록 할 계획이다. 만약 이게 실패로 돌아가면 큰 독수리 연을 사서 철제 난간에 묶어 두는 방법밖에 없을 듯하다. 아파트 단체 채팅방을 보니 우리 동에서 비슷한 피해를 본 분들이 계셨다. 소문에는 누군가가 비둘기 먹이를 근처에서 주기적으로 주고 있다고도 한다. 뭐가 되었든 어서 빨리 장마철이 와서 남아있는 용변들이 씻겨 내려가기만을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