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한창 IMF를 지나면서 부업이 유행처럼 번지던 시기가 있었다. 지금에야 대부분 당시를 회상하는 추억의 소재로 쓰이거나 궁핍한 상황을 조금 과장해서 희화화하는 용도로 쓰이곤 하지만, 그 당시엔 정말로 인형 눈알 하나에 10원씩 받고 붙이던 시절이 있었다. 하나에 10원이라니. 100개를 붙여야 천 원. 만개를 붙여야 10만 원이 되던 부업도 누군가에게는 매우 소중한 일거리였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인형 눈알 붙이기가 매우 박한 일거리 임은 분명하지만 반대로 인형 눈알 붙이기는 매우 공정한 일거리이기도 했다. 연차와 관계없이 누가 얼마나 많은 눈알을 붙이냐에 따라 공평하게 그 소득이 지급되었기 때문이다.
기업의 최전선에서 일어나는 여러 일이야 인형 눈알 붙이기에 비교할 수준이 되겠냐만 그 일을 측정하고 평가하는 방식은 인형 눈알 붙이기보다 훨씬 더 구시대적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업무가 복잡하고 상호 연관성이 크다는 것을 핑계로 우리는 오랜 시간 동안 업무의 성과를 객관적으로 측정하는 데 큰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물론 그 이면에는 평생직장, 혹은 제2의 가족으로 대변되는 조직 문화도 한 몫했을 터. 굳이 그 안에서 잘난 사람과 못난 사람을 나누어 차별하기보다는, 적당히 묻고 보듬어서 함께 하는 문화가 팽배했다. 나 자신의 모자람을 회사가 조금 눈 감아 주는 대신에 우리는 기꺼이 전체주의적인 기업의 권위를 눈감는 일종의 거래가 오랜 시간 이어져 온 것이다.
그러나 평생직장의 개념이 점점 희미해지고, 자신의 성과를 있는 그대로 인정받고자 하는 새로운 세대가 출현하면서 과거의 근로계약에 대한 사회적 합의도 조금씩 변하고 있다. 성과를 객관적으로 측정하기보다는 단순히 근면적 성실을 바탕으로 보상을 제공하던 기업들은 변화의 흐름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어떤 기업들은 이를 기회로 삼고 재빨리 유연한 근무형태를 기반으로 성과 기반의 보상제도를 도입하는가 하면, 어떤 기업들은 여전히 과거의 근면적 성실에 함몰되어 구태한 제도를 고수하기도 한다. 물론 겉으로는 성과 기반의 보상 제도를 갖춘 것처럼 보이지만 속으로는 여전히 근면성실의 관념에 머물러 있는 기업들도 있다.
이러한 선택의 결과는 당연히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서서히 드러나는 것이겠지만, 세상은 예상하지 못했던 코로나 시대로 접어들면서 생각보다 그 결과가 빨리 드러나게 될 것 같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재택근무. 특정 장소에 정해진 시간까지 직원들을 모아서 원하는 배치로 자리를 구성한 다음, 서슬 퍼런 임원의 시야에 직원들의 모니터를 발가벗기고 업무를 수행하게 하는 기업의 권위가 일순간에 해체되는 것이다. 또한 재택근무는 근면성실의 가장 중요한 판단 기준인 근무 시간의 산정 조차 무의미하게 만든다. 성과 기반의 보상 제도를 갖추고, 직원들의 근태보다 성과를 중시하는 기업과 그러지 못한 기업들은 코로나 시대를 지나면서 명암이 크게 엇갈리게 될 것이다. 왜냐면 성과 기반의 조직문화가 많은 것을 바꾸어 놓을 것이기 때문이다.
첫째는 바로 근면적 성실에 대한 인식이다. 과거에는 똑같은 일을 8시간에 걸쳐 해내는 사람과, 12시간에 걸쳐 해내는 사람이 있으면, 12시간에 걸쳐 해내는 사람에게 더 많은 보상을 지급했다. 그만큼 회사를 위해서 많이 노력했다는 것이다. 사실, 더 적은 일을 하더라도 오래 일했다는 이유만으로 더 많은 보상을 받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성실하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성과였던 것이다. 이는 성과를 객관적으로 측정할 수 없던 시대에는 근무 시간이 성과를 어설프게 가늠하는 미봉책이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러한 근면 성실의 시대에서는 일을 잘하는 것보다 얼마나 많은 정성을 들이느냐가 중요한 요인이 된다. 가족과 삶, 여가를 모두 바치게 되는 충성경쟁이 중요한 요인이 되는 것이다. 객관적 성과를 기반으로 보상을 하게 되면, 이런 충성경쟁이 사라진다. 대신 더 효율적으로 일하는 방법을 찾게 된다.
그러고 나면 자연스럽게 불필요한 규율이 사라진다. 성과 기반의 보상이 아닌, 근면적 성실을 기반으로 한 보상 제도는, 태생적으로 선후배 문화를 기반으로 할 수밖에 없다. 역량으로 인해 위계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입사 연수, 근무 기간 등 회사에 바친 성실의 축적 값에 의해서 위계가 만들어진다. 이러한 위계는 논리적으로 매우 취약한 위계로, 이런 위계를 굳건히 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불필요한 규율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대학생들의 군기 문화, 군대에서 탄생하는 부조리한 규율 들이 과연 기업의 조직문화에도 숨어들어 있지 않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생존이 위태롭고, 하루가 다르게 혁신하지 않으면 미래를 보장받지 못한다고 이야기하는 CEO들의 절규와 대비하면 이런 기업의 조직문화는 태만 그 자체다.
성과 기반의 문화가 되면, 업무와 직접적으로 관계가 없는 불필요한 규율들은 소위 유교적 꼰대 문화가 된다. 정장에 넥타이를 입고 일하는 것과 업무 성과 사이에는 하등의 영향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기 시작하면, 신입 사원이 외제차를 끌고 출근하는 것이 업무 성과에 아무런 영향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기 시작하면, 이메일 첫 문장에 연일 격무에 노고가 많으십니다와 같은 상투적인 문장이 없어도 업무 성과에 아무런 영향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기 시작하면, 그동안 회사의 발전을 핑계로 개인에게 강제하던 규율 들은 모두 그 권위를 잃게 된다. 실제로 최근 IT업계의 복장이 자율화되고, 유연근무제나 재택 근무제가 도입되는 것도 그런 맥락에서 해석이 가능하다. 임원의 파티션이 사라지고, 기업 내 직급이 없어지면서, 모두가 단일한 직책을 가지는 것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흐름인 셈이다.
그다음은 무엇일까? 바로 퇴근 이후의 삶에 대한 인식이다. 과거 근면 성실의 세상에서는 근면과 성실에 해가 되는 것들을 죄악시하는 문화가 있었다. 당연히 퇴근 이후의 삶에도 회사의 권위가 미쳤다. 겸업금지가 대표적인 사례. 회사 외에 다른 영리 활동을 하는 것이 근무 시간의 근면성실을 방해한다는 이유로 전면 금지가 되었다. 과연 그것이 사실인가? 겸업을 한다고 해서 근무 시간의 근면 성실이 저해된다는 합당한 근거가 없으면 기업은 결코 개인의 퇴근 이후의 삶에 대해서 강제할 수 없다. 물론 근면 성실이 저해되는 경우에 한해서 기업은 개인과 근로 계약 상 해당 의무를 부여할 수 있겠으나, 이 역시 업무 성과의 저하가 명백하다는 입증의 책임은 기업에게 있다. 그러니 묻어두고 전면적으로 개인의 겸업을 금지하는 조항은 당연히 위헌이다. 실제 판례도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성과 기반의 보상 제도가 현실화되면, 개인이 그동안 침해받던 여가에 대한 권리가 강화되고, 이는 자연스럽게 제2, 제3의 직업으로 연결될 확률이 높다. 특히 요즘처럼 돈을 버는 행위가 시각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시대에서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처음 유튜브가 도입됐을 때는 유튜브를 한다는 이유만으로 인사팀에 불려 가서 면담을 하고 회사와 유튜브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강압을 받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데 시간이 조금만 지나도 이제 개인의 유튜브 운영은 기업의 영향이 미치지 않는 곳이 되어 버릴 것이다. 회사와 맺은 근로 계약 상의 의무를 다 하는 이상, 기업은 더 이상 개인의 사생활에 영향을 미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전히 기업은 직원들의 삶을 기업의 사적 이익을 목적으로 침해할 수 있다고 믿고 있는 것 같다.
코로나가 심하게 확산될 때 국내 기업에서 해외여행을 가기 전에 부서장의 결재를 받으라는 지침을 내렸다가 화제가 된 적이 있다. 개인의 휴가를 어디서 어떻게 보내는 지를 기업이 결정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물론 제조업 기반의 기업들은 직원의 코로나 감염이 기업의 명운에 미치는 영향이 크겠지만, 그것은 기업이 검역절차를 강화하는 것으로 해결해야 하는 문제이지, 개인의 헌법적 자유를 침해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 왜냐면 직원은 단 한 번도 근로 계약을 맺으면서 그러한 헌법적 자유를 침해당할 권리에 대해서 동의한 바가 없기 때문이다. 또 어떤 기업은 해외 파견 시 가족을 데리고 가면 안된다는 규정을 만들어 이를 시행했다. 해외 파견 시 가족 동반에 대한 경제적 지원과 관계없이 가족 동반 그 자체를 금지한 것이다. 이는 기업의 임직원 외 그 가족의 거주 이전의 자유까지 기업이 영리를 목적으로 규제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기도 하다.
요약하면, 평생직장으로서 기업이 제공하는 무형의 보상은 점점 그 가치가 퇴색되고, 가장 활발하게 경제 활동을 하는 세대는 성과에 따른 보상을 적극적으로 요구하고 있다. 그리고 계약 상 제공하기로 한 성과를 제공하는 이상, 그 외 불필요한 권위, 규제에서 부터 벗어나려는 합리적 요구도 늘어가고 있다. 근태와 같은 집단적 규율은 점점 사라지게 되고, 개인의 성과를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방식의 보상제도가 점점 더 고도화될 것이다. 재택근무는 점점 활성화되고, 모여서 일하는 일도 그 필요성을 공감하는 구성원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발생할 확률이 높다. 점점 고도화되는 통신 기술과 협업 Tool 등 인프라의 발전은 개별적 개인들의 업무를 유기적으로 연결할 수 있게 되고, 부서와 조직의 개념은 사라지고 모두가 개별적 프리랜서와 같이 일하게 되는 세상이 온다. 동시에 두세 곳의 회사와 계약해서 일을 하는 사례도 쉽지 않게 찾아볼 수 있게 될 것이다. 드디어 인격이 아닌 성과물을 사고파는 시대가 오는 것이다.
어떤 체제가 더 창의적인 인재를 끌어당길 것인가? 결국 이것이 기업의 승패를 좌우하게 된다. 뛰어난 인재들은 당연히 성과 중심의 보상을 선호할 것이다. 창의적인 인재들은 성과를 정확하게 측정하지 못하는 기업의 무능을 감내할 이유가 없다. 다시 말해, 기업이 무능하다는 이유로, 내가 원하지 않는 시간에, 내가 원하지 않는 장소에 출근해서, 내가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일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한 근로 계약상 필요한 서비스를 모두 제공하고 나서도 불필요하게 나의 퇴근 후의 시간을 규제받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기업이 필요로 하는 인재들의 대규모 이동이 발생하게 된다. 연봉도 중요한 요소이지만, 본질적으로는 기업이 개인을 어떻게 대우하는가가 더 큰 요소가 된다. 전자는 어떻게든 맞춰줄 수 있으나, 후자는 쉽게 맞춰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반대로 기업의 근로 안정성이 낮아지고 성과 위주의 보상 체계가 도입되면, 당연히 구성원들의 불안은 증가한다. 성과를 내지 못하면 과거와 달리 직접적인 불이익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근로자들의 프리랜서화가 가속되면, 기존에 기업이 침해하던 근로자들의 권리는 보호받게 되지만, 반면에 근로자들은 차별적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한 치열한 경쟁에 처하게 된다. 게다가 기업이 원하는 기술이 지금처럼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에서는 더욱 그렇다. 경쟁은 당연히 과열될 우려가 있고, 그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도태된 사람들을 발생시킨다. 사회적으로 이를 어떻게 잘 관리할 것인가가 큰 문제가 될 것이다. 그러나 사회 전반으로 보면, 이러한 경쟁은 지금 사회에서 꼭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지금도 어차피 기업이 나의 인생을 책임져 주지 못한다는 불안은 팽배하다. 지금 필요한 것은 나 같이 안절부절하는 사람 뒤에서 누군가 빨리 엉덩이를 걷어 차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