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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경자 Mar 31. 2022

작은 꽃 한 송이를 품고

눈에 익은 골목을 들어서는 자세가 사뭇 비장하다. 그도 그럴 것이 오늘은 작은 꽃 한 송이를 품었기 때문이다. 작고 여린 꽃 한 송이는 짧은 한 철 피는 것이기에 귀하고 또 귀한 것이다. 간신히 얻은 꽃 한 송이가 행여나 다칠까 봐 걸음걸이도 조심스럽다. 그러고 보니 보도블록의 틈은 왜 이리 큰 지, 횡단보도의 턱은 왜 이리 높은 지. 평소에는 몰랐던 것들이 자꾸 눈에 들어온다. 어제와 같은 길임에도 꽃 한 송이를 품었기에 전혀 다른 길이 되는 것이 신기하다.


주변의 모든 사물에 날이 선다. 빠른 속도로 지나가는 자동차와 오토바이, 자전거, 그리고 보행자 들에 나도 모르게 신경이 곤두선다. 그럴 때마다 몸을 크게 말아 꽃 한 송이를 감싸게 된다. 꽃 한 송이가 너무나 작고 여린 건지... 그 꽃을 감싸고 지키는 내가 크고 강한 사람이 된 것 같다. 잎 한 장이라도 떨어질까 애지중지하는 나의 마음은 그러나 전혀 크고 강하지 않다. 그러나 그래야 한다. 지킬 것이 있는 사람들의 마음이 모두 그러하듯이.


몇 해전 겨울, 몹시 추웠던 날, 나는 소위 말하는 쪽방촌에 봉사활동을 나간 적이 있다. 여러 단체에서 보낸 생필품을 그곳에 거주하시는 분들에게 나눠드리는 일이었다. 적당한 사이즈의 종이 상자 안에 각종 생필품을 나눠 담고, 포장을 해서 그분들에게 전달드리거나, 혹은 나이가 드신 분들의 경우 집까지 옮겨 드리는 일을 했다. 쌀과 각종 통조림들이 제법 들었던 지라 상자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나이 드신 분들이 들기에는 어려운 무게였다.


허리를 잔뜩 구부린 할머니 한 분이 오셨다. 직접 들고 가시겠다고 했다. 상자가 너무 무거울 것 같아 나도 모르게 한 마디가 나왔다. "상자가 많이 무겁습니다. 조심하세요." 할머니께서는 힘들게 상자를 들고선 준비해 온 카트에 옮겨 담았다. 그리고 나에게 일갈을 날리셨다. "뭐 이리 든 게 없어! 무겁긴 뭐가 무거워!" 겨울을 나셔야 하는 할머니 입장에서는 그 상자마저도 부족하고 부족한 것이었다. 나는 그때 관점의 차이라는 것을 몸소 느끼게 되었다.


나에게 그 상황은 그저 봉사라는 이름의 요식행위에 가까웠다. 그리고 그 행위는 본질은 노동이었다. 그러니 나에게 중요한 관점은 노동의 강도였던 것이다. 그 기준에서 상자는 그저 무거운 물건. 들고 옮기기에 힘든 물건에 불과했다. 그러니 무거우니 조심하시라는 이야기가 절로 나온 것이었다. 하지만 할머니에게 그 상자는 생존이었다. 삶의 무게보다 무거운 것이 있던가? 할머니에게 중요한 것은 상자의 무게가 아닌 삶의 무게였다.


주는 것과 받는 것 차이에는 그런 큰 관점의 차이가 있었다. 관점이라는 것은 곧 인식의 틀이다. 그러니 같은 상황, 같은 장소, 같은 물건을 대하면서도, 할머니와 나는 전혀 다른 상황, 다른 장소, 다른 물건을 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전혀 다른 세상을 살고 있었다고 이야기해도 좋을 것이다. 어떤 관점을 가지느냐는 내가 어떤 세상을 살아가느냐와 같은 힘을 가진다는 것을 나는 그 봉사활동을 통해서 배웠다.


꽃 한 송이를 품고 가는 것은 그런 기분이었다. 늘 다니던 길이 불편하게 느껴지고, 주변의 모든 사람들의 행동이 위협적으로 느껴지는 경험이었다. 길 건너 학생들의 욕설 섞인 대화마저 들릴까 꽃에 귀가 있다면 가려주고 싶은 마음. 이 정도면 괜찮아하는 세상이, 아직 더 나아가야 할 것들이 많은 세상으로 하루아침에 바뀌어 버렸다. 나의 관점이 작은 꽃 한 송이의 시각으로 옮겨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새로운 세상에는 여전히 부족한 것들이 많았다. 꽃 한 송이가 아니었다면 세상은 그냥저냥 살만한 곳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바꾸어야 할 것들은 많았지만, 잘 적응해서 살고 있었는데 뭐 굳이... 그런 마음을 계속 가지고 있을 것이다. 꽃이 점점 귀해지는 시대가 온다고 한다. 더 나은 세상을 바라는 열망이 그만큼 작아질까 하는 걱정도 든다. 오늘 열린 새로운 세상은 부족한 것 투성이지만, 그럼에도 화사하고 아름답다. 꽃 한 송이가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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