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산과 유로 2020의 공통점
어둑어둑한 하늘에서 희미한 빛이 조금씩 새어 나오기 시작하던 새벽 4시가 되어 우리는 들뜬 마음으로 일찌감치 눈을 떴다. 우리의 한라산 등반 여정은 잉글랜드와 이탈리아의 유로 2020 결승전과 함께 시작되었다.
승부차기까지 가는 접전 끝에 이탈리아가 잉글랜드를 꺾고 유로 2020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리면서 한 달간 우리를 잠 못 이루게 했던 유로 2020 대장정이 막을 내렸다.
유로 사상 최초의 우승을 노렸던 잉글랜드의 안타까움의 눈물과 유럽 최강을 넘어 세계 최강을 선언하며 화려하게 귀환한 이탈리아의 기쁨의 눈물. 그리고 승패와 관계없이 상대편 선수를 끌어안고 위로와 축하의 인사를 건네는 선수들의 아름다운 모습은 보고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승패를 초월한 스포츠맨십의 경이로움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다.
결승전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우리는 서둘러 호텔을 나서야 했다. 어느덧 시곗바늘이 아침 7시를 가리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허겁지겁 얼음물, 김밥, 컵라면 등 각종 간식거리와 여벌 옷을 배낭 한가득 담아 짊어 메고 한라산 등반의 대장정을 시작했다.
서귀포 월드컵 경기장 뒤편으로 보이는 한라산을 쳐다보고 있으니 묘한 위압감이 나를 엄습해왔다. 렌터카를 타고 서귀포시를 벗어나자마자 한층 더 웅장한 모습을 드러낸 한라산은 그날따라 유난히 거대해 보였다. 운이 좋게도 역대급으로 좋았던 날씨 덕분에 한라산 정상이 멀리서도 뚜렷하게 눈에 들어왔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높은 산, 한라산은 제주도에 와서 꼭 한번 올라보고 싶은 산이었지만 올 때마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오르지 못했던 산이었다. 버킷 리스트의 구석에 방치된 채 10년이라는 기나긴 세월 동안 잊혀 있던 한라산 등반이라는 숙제를 이번에는 해치울 차래였다.
우리가 오르게 될 성판악 코스는 직선거리 총 9km로 1947m 정상 백록담까지 이어지는 길이었다. 얼마 전 축구를 하다 햄스트링 부상을 당하고 등산 경험이라고는 동네 뒷산 올라가 본 것이 전부였던 나에게는 조금 버거운 코스인 것처럼 보였다. 걱정이 앞섰지만 한편으로는 사진 속에서만 보던 백록담을 직접 볼 생각으로 설레는 마음이 들었다.
한라산 성판악 코스 초입은 생각보다 경사가 완만했다. 등산 초보자도 큰 부담 없이 오를 수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한라산 초입부터 4km를 파죽지세로 걸어가며 거의 휴식도 취하지 않은 채 여유를 부리며 무난하게 올라왔다.
그러나 역시나 방심은 금물이었다. 한라산 중턱을 넘어가면서 경사가 급격히 가팔라지기 시작했다. 정리되지 않은 울퉁불퉁한 돌길 탓에 내딛는 한걸음 한걸음이 힘에 겨웠다. 숨소리는 점점 거칠어졌고 우리는 말이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진달래 대피소는 휴식을 취하는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우리는 챙겨 온 젤리와 얼음물을 순식간에 흡입하고 배낭을 베개 삼아 철퍼덕 주저앉아 짧은 휴식을 취했다. 다리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았다. 거침없이 산을 오르는 사람들을 보고 있으니 오기가 생겼지만 몸은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찰나의 휴식으로 기력을 회복하고 막판 스퍼트를 올렸다. 울퉁불퉁한 바위길과 말도 안 되는 경사에 압도될 법도 했지만 우리는 차근차근 느리게 그러나 확실하게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갔다.
울창한 숲길을 지나자 푸르른 제주의 하늘과 눈부신 태양이 우리를 반겨주었다. 어느새 우리는 구름보다 높이 올라와 있었다. 마치 토성을 둘러싸고 있는 띠처럼 발밑의 구름들이 거대한 한라산을 둘러싸고 있었다. 도시에서는 절대로 볼 수 없는 웅장한 대자연의 모습에 나는 묵묵히 고개를 숙였다.
드디어 백록담을 품고 있는 산 정상의 거대한 분화구가 보인다. 재빠른 속도로 우리를 추월해 한참을 앞서가던 사람들은 벌써 기력이 다했는지 정상을 코앞에 두고 지쳐서 쓰러져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토끼와 거북이 이야기의 거북이처럼 우리는 느리지만 확실하게 쉬지 않고 한 걸음씩 올랐다.
산 정상에 도착한 감격의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왔다. 우리는 한라산 등정을 자축하며 그 자리에 드러누웠다. 변덕스러운 날씨 탓에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백록담은 마치 우리를 축하해 주듯이 너무나도 선명하고 또렷하게 그 모습을 드러냈다.
이번 등산의 이유는 정상의 아름다운 풍경도 수려한 경치와 좋은 공기도 아니었다. 그것은 인생이라는 기나긴 여정을 통틀어 계속해 나가는 나 자신과의 싸움의 축소판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 함께해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크나큰 축복이었다.
스포츠맨십이 아름다운 이유는 그 과정이 오롯이 자신과의 싸움이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동료와 적은 산을 함께 올라가는 동료일 뿐일지도 모른다. 오르다 보니 어느 순간 오기가 생겼다. 사람들이 산을 오르는 이유는 가지각색이겠지만 그들은 오로지 자신과의 싸움에서 지지 않기 위해 산을 오르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