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내가 계속 여행을 떠나는 이유
여행이 끝나고 시작되는 것
2019년 겨울의 일이다. 그리스 아테네 지하철에서 양손에 도넛 박스를 들고 잠시 한눈을 판 사이 큰맘 먹고 장만한 최신 모델 아이폰이 사라졌다. 외투 주머니에 잠깐 넣어둔 아이폰을 누군가 훔쳐간 것이다. 말로만 듣던 유럽 소매치기를 난생처음 경험한 순간이었다.
나는 허둥거리지도 소리를 지르지도 않았다. "진짜 괜찮은 거야?" 여자 친구는 그 상황에서 지나칠 정도로 이성적이고 침착한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소매치기로 유명한 프랑스에서도 이탈리아에서도 당한 적 없던 소매치기를 생각지도 못한 그리스라는 낯선 곳에서 당하다니 허탈함에 헛웃음이 나왔다. 그 길로 당장 경찰서로 향할 수도 있었지만 남은 일정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숙소로 돌아와 마음을 추스르고 계획대로 여행을 계속했다.
“열에 아홉은 못 찾아요, 그냥 포기하고 싼 걸로 하나 장만해요.” 아테네 시내 유일의 한국음식점 사장님은 몇 달 전 한밤중에 아크로폴리스 주변을 산책하다 괴한들에게 살해당한 영국인 노부부의 이야기를 해주셨다. 그리스 신화와 민주주의의 본고장이라는 아테네는 생각보다 살벌한 동네였다. 나는 사장님의 말씀을 듣고 새 아이폰에 대한 미련을 완전히 버렸다. 앞으로 나갈 할부요금 생각에 가슴이 쓰려왔다.
이처럼 여행을 하다 보면 멘털이 붕괴되는 경험을 참 많이 하게 된다. 대학시절 인도 배낭여행을 하다가 여권을 빼앗기고 사기를 당할 뻔하기도 했고, 베트남에서 캄보디아로 육로 여행을 하고 다시 베트남으로 돌아올 때는 비자 문제로 재입국을 못해 그대로 귀국할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하지만 여행 도중에 귀국하는 일은 없었다. 신기하게도 여행을 계속하겠다고 마음을 먹으면 어떻게든 여행을 계속할 방법을 찾을 수 있었고 나를 도와주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나는 여행이 깨달음의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돌이켜 보면 인생에 시작부터 끝까지 순탄했던 여행은 없었다. 고생도 이런 생고생이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나는 어김없이 때가 되면 여행을 떠난다. 낯선 곳에서 직접 보고 느끼며 때로는 가슴 철렁한 기분을 느끼고 때로는 가슴 벅찬 감동을 느끼기도 하면서 살아있음을 느낀다. 이러한 경험들을 통해 나는 고도의 몰입 상태에 들어간다. 그런 순간과 깨달음이 모여 내 삶이 된다.
여행은 인생을 닮아있다. 나는 사람이 각자 태어난 이유가 있듯이 모든 여행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여행지는 팍팍한 일상에 찌든 우리에게 삶의 여유를 가르쳐 주는가 하면 어떤 여행지는 인류문명의 본질을 넌지시 보여주기도 한다. 그래서 여행 경험이 하나씩 늘어갈수록 인생의 깊이도 깊어진다.
여행의 진정한 묘미는 여행이 끝나고 비로소 시작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행을 계획하고 현지에 가서 겪어보는 경험이 설렘이라면 여행을 재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과정은 깊은 깨달음을 내면화하는 과정이다. 여행은 사랑과도 닮은 구석이 있다. 기대에는 항상 실망이 따르고 그리고 가끔은 미래가 뻔하게 보여도 미련을 남길 바에는 시작해 버리는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내 사랑은 또 같은 꿈을 꾸고...'라는 어떤 노래 가사가 유달리 와 닿는 이유는 그 때문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