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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산블라스 언덕 - 에필로그: 다시, 인천공항

쿠스코를 출발해 리마에서 비행기를 갈아 타고 다시 멕시코시티를 거쳐서 인천까지 오는 장장 서른 시간이 넘는 비행이 드디어 끝이 났다. 아니, 해리에게는 발리에서 시작된 이 모든 여정이, 혜미에게는 쿠알라룸푸르를 떠나며 시작된 기나긴 여정이 끝이 난 것이다. 


이제 더 이상의 모험도, 낯섬도, 고생도, 설레임도 없는 서울에서의 평온한 삶이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동승자들과 함께 공항 한편에서 별도의 입국수속을 마친 해리와 혜미는 다시 한번 코로나 검사를 받고는 수화물 컨베이어 앞에서 짐을 기다렸다. 마침내 짐을 찾아 입국장을 나서기 직전, 혜미가 해리를 불렀다.


‘나 화장실 좀 가야 돼요.’


‘어, 다녀와.’


‘아니에요. 오래 걸릴 것 같아요. 그리고 지금 밖에 부모님 기다리세요. 같이 나가면 조금 놀라실 거에요.’


‘아 그래, 그럼 나 먼저 갈까?’


‘네, 피곤할텐데 빨리 가서 쉬세요.’


‘그래, 조심해서 들어가. 집에 가서 연락할께’


혜미는 대답 대신 다가가 해리를 끌어안았다. 이렇게 둘은 작별의 포옹을 했다. 조금 길었다. 팔을 풀면 이미 날아간 다른 기억을 따라 사람마저 날아가버릴 것만 같았다. 긴 포옹 끝에 혜미가 해리의 등을 쓰다듬으며 작게 속삭였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고마웠어요. 모두, 다.’


해리는 팔을 풀고 혜미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봉긋한 이마 한복판을 지긋히 입술로 눌렀다. 미간을 지나 콧등을 따라 내려올 때 혜미가 고개를 돌렸다. 해리는 허공에서 멋적어진 입술을 오므리며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키스를 했던 것이 언제였더라.’ 


해리가 다시 혜미의 어깨를 잡고 품안으로 끌어당겼다.


‘시간은 모든 기억을 아름답게 만든다고 하잖아.’


잠시 뜸을 들이다가 다시 짧게 덧붙였다.


‘잘 가, 덕분에 쿠스코가 앞으로도 아름다울거야’


혜미는 순간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하지만 빠르게 돌아서며 눈물을 감췄다. 여기서 흔들리면 모든 것이 망쳐진다. 혜미는 캐리어를 그냥 그 자리에 둔 채 화장실로 뛰어갔다. 해리는 그런 혜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캐리어를 끌고 화장실 입구에 세워 두었다. 그리고는 입국장을 빠져 나와 공항버스를 타러 갔다.


화장실에 들어온 혜미는 먼저 눈물부터 꼼꼼하게 닦았다. 긴 비행 끝에 부스스해진 머리를 매만지고는 화장을 고쳤다. 그리고 잠시 기다렸다.


화장실에서 나온 혜미는 입구에 놓인 캐리어를 보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해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캐리어를 끌고 바로 앞의 출구로 나가는 대신 옆으로 걷기 시작했다. 한참을 걸어가서 드디어 입국장 밖으로 나왔다. 


출구 앞에는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 안에서 아는 얼굴을 찾지 않았다. 벤치에 백팩을 내려놓고 옆에 앉아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바로 상대방이 받았다.


‘응, 도착했어. 나 A 출구 앞. 어, 나오다 보니 여기로 나왔네. 그래. 벤치에 앉아 있을게.’


벤치에 앉은 혜미는 해리가 나갔을 B 출구 쪽을 바라보았다. 멀리서 빠르게 걸어오는 우진의 모습이 보였다.


혜미는 지갑을 꺼냈다. 지갑 안에는 반지가 들어 있었다. 두 달 전 출국장에서 받아 한 번도 끼지 않고 지갑 속에 넣어만 두고 있던 반지였다. 오른손에 반지를 꼭 쥔 채 우진이 오기를 기다렸다. 


가까이 다가온 우진의 왼손에 반지가 보였다. 일어나면서 오른손에 쥐었던 반지를 왼손 약지 손가락에 밀어 넣었다. 뛰다시피 다가온 우진이 혜미를 와락 껴안으며 무언가 말을 했지만 혜미의 귀에는 더 이상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우진의 품에 안겨 멍하니 공항 천정을 바라보던 혜미는 자신도 모르게 짧은 영어 문장을 중얼거렸다. 


‘What happens in Cusco stays in Cusco’

쿠스코에서 생긴 일은 쿠스코의 추억으로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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