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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산블라스 언덕 -쿠스코 민박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다. 기껏 남미까지 여행 와서 숙소에 격리되었다는 충격도 잠시, 사람들은 곧 이 기묘한 집단 생활을 즐기기 시작했다. 


즐길 수 없는 고통이라면 피해야 하겠지만 이건 피할 여지도 없는 고통이다. 이 먼 쿠스코까지 와서 내 돈 내가며 격리된 마당에 하루종일 우거지상을 쓰고 쓸데없는 걱정만 하는 것은 누가 보아도 자기 손해였다. 아무도 그럴 생각은 없었다. 


사람들은 이 시간을 피할 수 없는 고통으로 여기고 즐기기 시작했다. 따지고 보면 비자발적으로 격리되었다 뿐이지 어디 펜션으로 동호회 MT온 것과 비슷한 분위기로 흘러갔다. 쿠스코 여행동호회의 MT가 시작되었다.


하루이틀 지나자 민박집 밖의 세상에도 곧 새로운 체계가 자리를 잡았다. 기본적으로 페루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자택이나 숙소에 격리되는 것은 맞다. 다만 개미새끼 한 마리 못 지나가게 하는 계엄령 식의 통행금지는 아니었다. 


필수 직종의 출근이나 환자 병원 방문 등 꼭 필요한 외출은 허용되었다. 식료품을 사러 가는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대부분의 식당과 가게는 문을 닫았지만 식료품점은 병원과 함께 다시 문을 열었다. 


곧 병원 뿐만 아니라 숙박시설이나 식료품 가게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에게 통행증이 제한적으로 발급되었다. 그러자 통행증을 가진 민박집 사장님이 투숙객을 대신해 식료품과 음료를 사다주었다. 원래1층 라운지에서 생수나 음료, 라면 등을 팔았는데 이게 가지수가 늘어난 셈이다. 


한국 식당을 운영하는 교민들이 통행증을 받게 되자 식사도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쿠스코의 한식당과 케이마트에서 격리된 사람들을 위해 배달 서비스를 시작했다. 한인 민박 뿐 아니라 게스트 하우스나 호텔에 격리된 사람들도 이 배달 서비스를 이용해서 별 무리없이 식사를 해결할 수 있었다고 한다.


통행증이 없다 해도 건물 밖으로 발 하나 못 내딛는 것은 아니었다. 당당히 대로를 활보하지 못한다 뿐이지 골목 안 가게를 가는 정도의 외출은 눈감아 주는 분위기였다. 다만 둘 이상 다니는 것은 엄격히 금지되었다. 그러자 모퉁이 돌면 바로 있는 구멍가게도 다시 문을 열었다. 간단한 생필품은 곧 이곳을 통해서 구매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각 층 거실마다 한국 식당에서 배달된 제육볶음과 두부김치를 안주 삼아 와인과 피스코 파티가 매일 같이 벌어졌다. 다음날 아침 일찍 투어를 가야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와인 파티는 종종 평상시라면 투어를 떠났을 시간까지 이어졌다.


처음 우려와 달리 의식주는 어느정도 해결되었고, 당시만 해도 쿠스코까지 코로나가 퍼지지는 않아 급박한 위험은 없었다. 다만 어쨌거나 밖에 나가는 것은 자제하는 것이 좋았다. 


일반 여행객들은 통행증도 없지만 근처 가게에만 가도 동양인을 대하는 사람들의 시선이 예전과는 확연히 달라졌다는 것을 쉽게 느낄 수 있었다. 사람을 보고 멀찍이 돌아가거나 옆에 있다가도 피하는 것은 일상이고 대놓고 욕을 하거나 코로나를 외치는 사람들의 수가 점점 늘어났다.


‘볼리비아에서는 지지난 주부터 저랬어요. 쿠스코가 그동안 양반이었던거지.’


라파즈에서 푸노를 거쳐 쿠스코에 도착한지 얼마 안되는 한 여행객이 푸념처럼 말을 던졌다. 


‘라파즈에서 푸노까지 오면서 얼마나 서러웠는데요. 무슨 전염병 환자가 아니라 아예 병균 취급을 하니.’


밤늦도록 술을 마시고 늦잠을 잤지만 다시 저녁까지 내쳐 잘 수는 없다. 훤한 대낮에 2층 거실에 모여 앉아 무료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오픈 채팅방을 보던 사람 하나가 황급히 뉴스를 전했다. 한국대사관에서 고대하던 조치를 취하기 시작했다.


‘한국대사관에서 전세기를 띄운데요.’


이 뉴스를 들은 사람들이 너도나도 대사관에 전화를 해대는지 대사관 전화는 계속 통화 중이었다. 기다리다 보니 한국 영사가 직접 오픈 채팅방에 공지를 올렸다. 전세기로 귀국을 희망하는 사람들 수요조사를 하니 원하는 사람은 이메일로 인적사항과 현재 위치를 보내라는 공지였다.


‘쿠스코에만 백 명 정도 있데요. 리마에는 더 많겠지요.’


‘여행객들만 그렇다는 말일거에요. 리마에는 교민들도 많아요.’


‘쿠스코에만 백명이라면 여기에 스무 명 좀 넘게 있으니까, 다른 민박까지 한 절반은 한국 민박에 있고 나머지는 현지 숙소에서 지내나 보네요.’


‘리마까지는 어떻게 간데요? 버스로 가나요?’


‘아직은 몰라요. 쿠스코나 리마 말고도 코파카바나나 나스카 같은 곳에서 격리된 사람들도 있데요. 코파카바나부터 리마 사이에 쿠스코랑 나스카, 이카까지 쭈욱 버스가 지나가면서 사람들을 태우려나 보죠.


모두들 탑승 희망 이메일을 보내고는 다시 저녁마다 술판이 벌어졌다. TV는 1층 라운지에만 있다. 매일 밤을 스마트폰만 쳐다보고 지낼 수 없는 사람들은 무료함을 술과 식탐, 잡담으로 달랬다. 


해리가 쓰던 1인실에 들어온 남자와 3인실에 있던 여자 중 한 명이 유난히 친해진 티가 확연히 났지만 아무도 아는 척은 하지 않았다. 해리도 그 여자분이 1인실에서 나오는 뒷모습을 잠깐 본 것도 같았다. 격리되었다고 우울해하는 사람은 없었다. 적어도 겉으로는 그렇게 보였다.


주변이 떠들썩해지는 만큼 해리와 혜미의 관계는 점점 식어가다가 곧 플라토닉한 단계로 접어들었다. 둘만이 한 방을 쓴다지만 얇은 벽과 문으로만 나뉘어진 방이었다. 그 문을 열고 나가면 이 작고 불편한 공간에 겉으로만 아는 척을 하는 8명의 낯선 성인들이 한데 모여 복닥거리고 있었다. 게다가 화장실은 문 밖에 하나만 있다. 가뜩이나 신경쓰이는데 뒤처리까지 불편한 것이다. 한두 번 기분 찝찝한 경험을 치른 후에는 자연스레 손만 잡고 자는 관계로 발전했다. 


매일 같이 와인과 피스코 파티를 벌였지만 해리와 혜미는 불편한 공간에서 의미없이 그저 붙어만 있는 시간이 너무 길어지고 있음을 순간순간 느끼고 있었다. 즐거운 시간을 보내면 그 시간을 함께 한 사람에 대한 친밀감이 올라가지만 그 반대의 경우도 성립한다. 


마음 설레는 이벤트가 사라진 채 헤어짐도 그리움도 없이 보내는 긴 시간은 이제 막 시작한 두 사람에게는 가혹한 시간이었다.


격리조치 며칠 후에 대사관에서 수요조사를 한 이후로 전세기 이야기는 다시 쑥 들어갔다. 해리와 혜미는 습관처럼 수시로 스카이스캐너에 들어가 항공권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지루한 시간이 길어졌다. 너무 오래 지속되는 MT 분위기에 신물이 난 사람들은 가끔씩 조용한 휴식을 찾아 현관 밖으로 나갔다. MT도 하루이틀이지 열흘이 넘게 같은 공간에서 같은 사람들과 같은 안주에 같은 술을 마시며 지내다 보니 사람들은 점차 활기를 잃어갔다. 


한인 민박이 있는 곳이 대로변이 아니라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사람들은 현관 앞의 골목을 한바퀴 돌거나 벽에 기대어 가만히 해바라기를 하다가 다시 들어오곤 했다. 동물원에 갇혀 사는 동물들이 한자리를 뱅뱅 도는 정형행동을 보이는 것처럼, 좁은 건물에 격리된 사람들도 이내 똑 같은 패턴을 보이기 시작했다. 


혜미가 이 골목에서 전화통화를 하는 시간이 점점 길어지고 횟수도 잦아졌다. 혜미는 아침식사를 하고 나면 꼭 골목으로 나가 한동안 통화를 하고 들어오곤 했다. 그러는 혜미를 지켜보며 해리는 식사를 마치고 혼자 방으로 올라왔다.


‘엄마랑 통화했어요. 걱정 너무 많이 하세요.’


2층으로 돌아온 혜미가 당연하다는 듯이 덧붙였다. 더 이상 이 상태로 시간만 보내기는 힘들다는 생각이 들 무렵, 페루 각지에 격리된 사람들에게 수요조사를 마친 한국 대사관에서 귀국행 전세기 신청을 받기 시작했다. 


교민들은 당연히 남았고, 여행객 중에도 이대로 그냥 돌아가기는 아깝다며 고민하는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전세기 소식에 반색을 했다. 


이대로는 아니었다. 이건 아니었다. 둘다 모두 잘 알고 있고, 확실히 느끼고 있었다. 쿠스코는 첫날 메리어트까지만이어야 했다. 딱 거기서 작별의 포옹을 하고는 한국에서 다시 만났어야 했다. 아니면 다음 행선지에 대한 설레임을 안고 함께 쿠스코를 떠났어야 했다. 그리고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지구 반대편에서의 순간을, 한순간 한순간을 모두 기억하고 추억하고 싶은 시간으로 함께 만들어야 했다. 


그 기억을 온전히 함께 공유할 수 있다면 이후의 삶이 이들을 어디로 데려가던, 그 시간에 대한 기억은 평생 남을 것이다. 혼자 만의 추억으로 남던, 함께 어루만지며 사는 추억이 되건 그 시간에 대한 기억은 온전히 간직될 것이다.


하지만 북적거리는 민박집 2층에 갇혀서 보낸 보름의 시간은 산블라스 언덕의 기억마저 그 후의 무의미한 시간으로 덮어버렸다. 해리의 잘못도 아니었고, 혜미의 변덕도 아니었다. 두 사람은 그저 아직 단단하게 다져진 사이가 아니었을 뿐이다. 서로에 대한 신뢰와 익숙한 편안함이 자리잡기에는 물리적인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산블라스 언덕에서 생일을 맞은 혜미는 그저 적당한 타이밍에 적당한 장소에서 적당한 사람과 함께 있었을 뿐이었다. 잘못된 장소에서 보내는 잘못된 시간을 버티어 낼 만한 좋은 기억이 아직은 부족했다. 


해리가 혜미를 보면서 알 듯 말 듯 미소를 짓는 일이 잦아졌다. 혜미도 그런 해리를 보면서 나도 다 안다는 눈빛으로 대답했다. 


‘370만원이요? 말도 안돼. 내가 남미 왕복을 120만원에 끊었는데.’


‘그게 리마에서 인천까지가 그렇다는 것이고 쿠스코에서 리마까지는 400달러를 더 내래요.’


‘뭐라구요? 그러면 편도가 400만원이 훨씬 넘는다구요?’


‘이거 뭐 나라에서 이럴 때 우리 상대로 장사하는 것도 아니고 너무하네요.’


전세기 수요조사를 마친 대사관에서 세부 공지를 올렸다. 리마에서 인천까지는 아에로 멕시코를 타고 멕시코시티를 경유해서 간다. 쿠스코에서 리마까지는 라탐 항공으로 이동을 하고 그 외 페루 내 다른 도시들에 흩어져서 고립된 사람들은 대사관에서 각 지역으로 버스를 보내서 리마까지 이동한다는 것이다.


멕시코나 미국, 유럽을 경유해서 남미에 온 한국 여행객들은 대부분 많아야 백만원 조금 넘는 왕복 티켓 가격을 내고 여행을 떠났다. 그러니 귀국행 전세기를 타려면 취소 당하고 환불 받은 편도 가격의 열 배 가까운 돈을 내야 한다는 공지에 황당하다는 반응을 보일 수 밖에 없었다. 


수요조사 이후에도 고민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대사관에서 공지한 전세기 가격을 보고 차라리 그냥 쿠스코에 남겠다고 결정하는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들에게는 어찌 보면 당연하고 합리적인 판단일 수도 있다. 집에 좀 일찍 가자고 수백 만원을 쓰느니 차라리 그 돈을 쿠스코 숙박비에 쓰며 코로나가 풀리기를 기다리겠다는 것이다. 


당시 쿠스코에는 코로나 환자가 아무도 없었고, 페루 내 코로나 확진자도 공식적으로는 백여 명에 불과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꼭 틀린 생각이라고 할 수 만은 없다. 적어도 그 당시에는 말이다.


고민하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해리와 혜미는 두 번 생각할 필요도 없이 바로 전세기 신청서를 보냈다. 그 곳이 어디이건 간에 얼마가 들던지 간데 이제 이 공간에서 만큼은 벗어나고 싶었다. 


하지만 너무 늦었다.


그렇게 마추픽추의 관문인 쿠스코에서 페루의 수도 리마까지 한국인 여행객들을 태우고 가는 라탐 항공의 전세기는 볼펜으로 찍찍 쓴 항공권을 손에 쥔 한국인 백 명을 태우고 출발했다. 한 시간 조금 넘는 짧은 비행 후에 이 비행기는 폐쇄된 리마 국제공항 대신 인근의 군 공항에 착륙할 것이다.


비행기가 이륙하자 해리는 혜미의 손을 꼭 잡았다. 혜미는 해리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는 조금 뒤 잠이 들어버렸다. 긴장이 풀리면서 피로가 한꺼번에 찾아온 것이리라. 피로는 급작스레 끝나버린 긴 여행에서 온 피로 만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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