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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산블라스 언덕 - 시작된 코로나

그날 밤은 모두들 늦은 시간까지 뜬 눈으로 한데 모여 있었다. 한인 민박의 1층 라운지는 쿠스코 여기저기에서 모여든 한국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몇 안되는 식탁의자가 모자라 대부분은 벽에 기대고 서있거나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있었다.


‘코파카바나는 더 심했어요. 아예 동양 사람 보이면 막 소리지르고 그래요.’


‘라파즈도 마찬가지에요. 식당 들어가면 소리지르는건 양반이고 나가라고 손가락질 해대고.’


엊그제까지 볼리비아에 있다가 쿠스코로 넘어와서는 마추픽추고 뭐고 바로 격리되어 버린 여행객들은 얼마 전에 겪은 자신들의 경험담을 이야기해주었다. 


중국에서 시작된 코로나가 불과 몇 개월 사이에 지구 반대편 남미에까지 서서히 확산되기 시작했다. 그러자 남미 오지의 산간지역 사람들부터 공포에 질리기 시작했다. 


이들은 전염병에 걸리면 어디 가서 치료받을 길도 없이 그냥 죽을 날만 기다려야 한다는 자신들의 상황을 그간의 삶을 통해 잘 알고 있었다. 모두들 동양인이 눈에 띄기만 하면 저리 꺼지라고 소리를 질러댔다. 


우유니를 출발해 라파즈를 거쳐 볼리비아와 페루 국경에 있는 티티카카 호수 일대를 들렀다가 마추픽추를 보러 쿠스코에 오는 것이 시계방향으로 남미를 도는 정석 코스의 일부였다. 특히나 치안과 의료사정이 모두 열악한 볼리비아에서 동양인 혐오가 심해지자 이 루트를 돌던 사람들은 서둘러 쿠스코로 향했다.


쿠스코에도 동양인을 꺼리는 사람들이 늘어나긴 했지만 그나마 외국 여행객들이 많은 관광도시라서 조금은 덜했을 뿐이다. 아직까지는 말이다.


‘여기도 곧 그렇게 되겠네요.’


‘대도시는 그나마 상황이 그 정도까지는 아니라서 몰랐어요.’


‘오죽하면 대통령이 나와서 비상사태라고 그러겠어요.’


‘비행기편 바꿔서 빨리 귀국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요? 여기서 이러고 있는 것보다.’


‘내일 자정부터는 국경도 폐쇄한데요. 아무도 페루에 들어오지도, 나가지도 못한데요.’


‘헐, 말도 안돼, 그럼 우리 진짜 여기 갇힌 거에요?’


‘그럼 내일 저녁까지는 비행기가 뜬다는 건가요? 빨리 리마로 가면 되겠네요’


‘국내는 오늘부터 이동 제한이라는데요? 그래도 한 번 알아는 봐야겠어요. 내일 아침에 리마로 가서 저녁 비행기를 탈 수만 있으면...’


‘그런데 이대로 한국 가시게요? 우리는 아직 마추픽추도 못 가봤는데.’


‘그러게요, 그거 보러 남미까지 힘들게 온 건데 이렇게 그냥 도망치듯 돌아갈 수는 없어요.’


‘좀 기다리다 보면 풀리지 않을까요? 어쨌든 그냥 가기는 싫어요.’ 


한동안 여행객들의 두서없는 말을 조용히 듣고만 있던 민박집 사장님이 입을 열었다.


‘한 사나흘 전부터 여기 사람들도 다 마트에 몰려가서 사재기하기 시작했어요.’


‘지금 마트 가면 물건도 없고 줄도 길어요. 저도 어제 케이마트가서 일단 이거저거 잔뜩 사오긴 했어요.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사실 쿠스코에도 조짐은 있었다. 이미 며칠 전부터 휴교 이야기가 퍼지고 있었던 것이다. 한국 여행객들이 지나온 인근 산간마을 사정은 페루 사람들은 이미 다 익숙히 잘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 


여행객들이 불안해 할까봐 말은 안 했지만 쿠스코에 살고 있는 교민들은 며칠 전부터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음을 조금씩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사장님의 말에 본인들이 영화 같은 현실에 갇혀 버렸음을 비로소 자각한 여행객들은 한동안 아무 말없이 허공만 바라보았다. 한숨을 길게 내쉬는 사람도 있었다. 이미 몇몇 사람들은 휴대폰을 꺼내 항공편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쿠스코에서 리마로 가는 라탐 항공은 하루에도 여러 편이 있다. 다행히 아직 내일 출발편이 모두 취소되지는 않았고 빈자리도 더러 남아있었다. 하지만 리마로 간다고 달라질 것이 있을까? 


리마를 떠나는 국제선은 내일 저녁이 마지막이다. 이미 페루를 떠나려는 수많은 외국인들이 내일 출발하는 비행기 티켓을 구하려고 항공사와 여행사 전화기에 불이 날 정도로 전화를 해대고 있을 것이다. 


문제는 또 있었다. 격리와 이동제한 조치는 쿠스코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페루 전역에 동일한 조치가 내려졌다. 리마의 한인 민박들도 지금 이곳이나 상황이 매한가지 일 것이다. 


힘들게 리마로 가보아야 다음날 바로 비행기를 타고 귀국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할 것이고, 기껏해야 쿠스코의 한인 민박에서 리마의 호텔이나 게스트하우스로 격리장소를 바꾸는 것 뿐이다. 굳이 무리해가며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자정이 훌쩍 넘어가자 사람들은 저마다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은 채로 하나 둘씩 방으로 돌아갔다. 


다음날 이른 아침, 3층 도미토리에 묵던 두 명의 남자여행객들이 떠났다. 쿠스코에 너무 오래 머물면서 해볼 것은 다 해보고 마추픽추에는 이제 미련도 없는지라 격리되더라도 리마에서 격리되는 편이 낫겠다는 것이다.


전날 밤에 리마행 라탐항공편을 예약한 두 사람은 오후 비행기였지만 혹시 있을지 모를 경찰 검문을 피해 새벽 같이 우버를 불러 타고 떠났다. 


이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침식사를 하고 있을 무렵에 풀이 죽은 표정으로 돌아왔다. 국내선 항공편이 모두 운항을 중지했다는 것이다. 밤새 일어난 상황을 항공사의 예약시스템이 미리 다 반영을 못해서 벌어진 해프닝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이 공항에 도착해서 상황을 파악한 이들이 서둘러 돌아오는 바람에 민박에서 아직 새로운 투숙객을 받지는 않았다. 이들은 미처 새로 정돈도 하지 않는 3층 도미토리 자신들이 쓰던 침대에 짐을 다시 가져다 놓고는 늦은 아침식사를 하기 위해 1층으로 내려왔다.


새벽이 다 되어 잠이 들었지만 얇은 문 밖에서 웅성이는 소리에 아침 일찍 잠에서 깬 해리와 혜미는 침대에 누운 채로 오픈 채팅방에 올라오는 정보를 읽고 인터넷 검색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이제 대략 상황 파악이 되었다. 격리는 되었지만 그렇게까지 위험하거나 당장 안전을 위협받는 상황까지는 아니었다. 


뉴스는 떠들썩했지만 정작 쿠스코에는 아직 코로나 환자가 발생하지 않았다.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그랬다. 외출이 통제되었지만 식료품을 사러가거나 병원을 가기 위한 외출은 가능하다고 했다. 


며칠이 지난 후에 통행허가증이 발급되었지만 비상조치 첫날부터 그런 것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다 보니 간간히 거리에서 왕래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아침식사를 하러 가자는 혜미를 보고 해리가 뜻밖의 말을 했다.


‘아침은 메리어트 가서 먹자.’


‘네? 메리어트요? 거기 체크 아웃한거 아니었어요?’


‘아니, 짐은 가지고 나왔지만 방은 그대로 두고 나왔어. 어찌될지 몰라서.’


‘그래도, 지금 나가도 될까요?’


걱정스러운 혜미의 말에 해리는 반납하지 않고 가지고 있던 호텔 카드키를 꺼내보였다.


‘혹시 경찰이 잡으면 호텔로 돌아가는 길이라고 하면 돼.’


아르마스 광장 남동쪽에 있는 한인 민박에서 광장 남쪽에 붙어있는 메리어트 호텔까지는 채 5분도 안 걸리는 거리였다. 쿠스코에서 지낸 지 일주일 만에 해리는 이제 모든 방위를 아르마스 광장 기준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그럴까요, 그럼?’


‘밥도 밥인데, 아마 오늘이 마음 편하게 샤워할 수 있는 마지막 날이 될거야.’


‘아, 맞네요.’


혜미는 불현듯 지금 있는 곳이 어디인지를 떠올렸다. 


방은 개인실을 쓴다지만 화장실은 공용이었다. 4개의 방이 있는 2층에는 화장실 겸 욕실이 하나 뿐이었다. 2층의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면 자그마한 거실이 있고, 거실과 연결되는 부엌이 있다. 거실과 부엌이 하나로 연결되는 구조라 좁아보이지는 않았다. 부엌 맞은편으로 화장실 겸 욕실이 있고 부엌을 둘러싸고 4개의 방들이 모여 있다. 


이 좁은 공간에 8명의 성인남녀가 머무르는 것이다. 3인실에 여자 세 명, 2인실에 해리와 혜미, 또 다른 2인실에 한 커플, 그리고 해리가 쓰던 1인실에 들어온 남자 한 명이었다. 이 사람들이 샤워기 하나, 세면대 하나, 양변기 하나씩만 있는 좁은 화장실을 공유해야 한다. 앞으로 샤워 뿐만 아니라 화장실 사용이 불편할 것은 자명했다. 


화장실에 생각이 미치자 혜미는 얼른 세면도구와 화장품을 챙기기 시작했다. 지금 무엇이 중헌디 느낌이 확 온 것이다.


‘빨리 가요, 나 배고파.’


‘잠깐만, 수영복은 챙겼어?’


‘수영복이요? 수영할 시간도 있을까요?’


‘무거운 것도 아닌데 일단 가져가봐. 가서 보고.’


해리와 혜미는 조용히 민박집 건물을 빠져나왔다. 직원들이 있는 1층 라운지와 2층부터 있는 객실은 출입구가 달랐다. 공연히 어디를 가노라고 부산을 떨 필요는 없다. 


어차피 3층과 4층 도미토리까지 사람들이 가득 차 있어 누가 들고 나는지 서로 신경쓸 겨를도 없다. 격리 첫날, 다들 좁은 1층 라운지에 모여 돌아가면서 아침식사를 하느라 정신이 없을 것이다.


가볍게 백팩 하나씩을 둘러 맨 두 사람은 거리로 나왔다. 역시나 거리는 한산했지만 간혹 어딘가로 바삐 걸음을 재촉하는 행인들이 보였다. 택시를 탈까도 했지만 손님을 태운 택시만 이따금 지나갈 뿐 빈 택시는 보이지 않았다. 거리에는 차도, 사람도 확연하게 줄었다.


호텔까지 가는 5분 동안 제지를 받은 것은 딱 한번 뿐이었다. 부지런한 걸음으로 골목을 지나 아르마스 광장 근처의 대로로 접어들자 경찰이 아닌 군인들이 보였다. 전투복을 입고 화이바를 착용한 군인들은 실탄이 장전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총까지 들고 있었다. 


긴장한 해리와 혜미가 조용히 지나가려고 하자 모퉁이에 서 있던 군인이 고개를 돌려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해리가 먼저 호텔 카드키를 꺼내 들고 선수를 쳤다.


‘Marriott, right over there, 저기 있는 메리어트 호텔로 가는 길이에요’


‘Hurry, you have to stay inside, 빨리 가세요. 밖에 나오면 안되요.’


난데없이 중무장한 군인을 보고 필요 이상으로 긴장했던 두 사람은 서로 한번 쳐다보고는 종종걸음을 재촉했다. 아무 문제될 것은 없다. 이들은 오늘까지 메리어트 투숙객이고, 지금 격리조치에 따라 호텔로 돌아가는 길이다.


굳이 말은 안 해도 서로 생각이 일치한 두 사람은 어제 먹었던 것과 같은 메뉴의 아침식사를 최후의 만찬이라도 되는 듯이 입 안에 쓸어 넣었다. 


평상시 같으면 과일 한 쪽으로 마무리하고 눈길도 주지 않았을 디저트 코너에서도 케이크를 종류 별로 서너 조각씩 담아왔다. 지나가는 직원을 불러 커피를 리필한 두 사람은 디저트 배는 따로 있다는 말을 실천하듯이 케이크를 입 안에 담고 열심히 우물거렸다.


방으로 돌아온 해리가 욕조에 따뜻한 물을 받기 시작했다. 혜미는 화장대 옆에 놓여있는 입욕제를 꺼내 아낌없이 풀었다. 어차피 이번 한번으로 끝이다. 혜미가 입욕제를 푼 욕조에 해리가 샤워실에 있는 1회용 바디워시 두 개를 들고 와 역시나 아낌없이 털어 넣었다. 입욕제의 향을 즐기고 싶었던 혜미가 타박을 놓았다.


‘입욕제 풀었는데 왜 또 이걸 넣어요.’


‘거품이 많이 나야지. 난 버블배쓰가 좋아.’


거품 목욕은 해리의 취미 중 하나였다. 장거리 비행 끝에 출장지에 도착하면 만사 제쳐놓고 욕조에 따뜻한 물을 틀어 놓고는 물이 떨어지는 곳을 겨냥해서 바디워시를 풀어넣는다. 비행기 안에서 지루해서 몸이 비비꼬일 때면 따뜻한 거품 속에 들어가 맥주 캔을 기울이는 상상을 하면서 버티곤 했다.


물이 차기를 기다리며 두 사람은 욕실에서 나왔다. 해리가 며칠 전처럼 머그잔을 찾아 들고 자신의 폰을 집어넣으려고 하자 혜미는 그런 해리를 마음껏 비웃으며 탁자 위에 있는 스피커의 아이독에 자신의 아이폰을 꽂았다.


‘문명의 이기가 있으면 좀 쓰세요.’


‘아니, 왜 그거, 내거는 안 들어가던데.’


‘한국 가면 바꾸세요, 네?’


해리는 아침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올라가기 전에 프론트 데스크에 들렀다. 2시까지로 되어 있는 레잇 체크 아웃을 조금 더 연장할 수 있는지 물어보기 위해서였다. 


일년에 25박을 투숙하면 주어지는 골드멤버십 혜택으로 이미 2시까지로 체크아웃이 연장되었지만 경우에 따라 한 두시간 정도는 추가로 연장이 가능한 경우도 있다. 그리고 이럴 때는 전화보다 직접 얼굴보고 이야기하는 편이 효과적이다.


물론 저녁까지 체크아웃을 연장하려면 보통 1박 숙박비의 50%를 추가로 내라고 한다. 터무니없이 들릴지 모르지만 귀국 비행기가 야간 편인 경우에는 하루 숙박을 하느니 이게 더 나은 경우가 많았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그대로 식당이나 공항 라운지에서 버티다 밤비행기를 타는 것과 호텔방으로 돌아와 샤워라도 하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공항으로 가는 것은 천지 차이였다.


물론 그건 회사 돈으로 출장갈 때 이야기고 굳이 여기서 두어 시간 더 편하게 있자고 수십 만원을 낼 것 까지는 없다. 네 시 정도에서 딜을 해보려는 해리에게 프론트 직원은 예의 바른 웃음을 지으며 크게 인심 쓴다는 듯이 세 시까지로 연장해 주었다. 


해리가 프론트 데스크에 간 동안 혜미는 1층 로비에 있는 화장실로 갔다. 어제 곱창을 과식한 데다가 오늘 아침 식사까지 배가 터지게 먹은 것이다. 프론트로 가는 해리에게 먼저 방에 올라간다고 하고는 로비 화장실로 향했다. 


해리와 같은 공간에서 마음 편하게 화장실을 트기에는 물리적인 시간도, 감정의 시간도 아직은 너무 부족했다. 샤워도 샤워지만 좁은 민박집 2층 구조를 보면 오늘이 마음 편하게 화장실을 쓰는 마지막이 될 것이다. 


방에서 음악을 들으며 잠시 대화를 나누던 해리가 물이 찼는지 확인하러 먼저 욕실로 갔다. 따뜻한 물이 적당히 받아지자 먼저 욕조에 들어가 누웠다. 곧 혜미가 따라 들어왔다. 혜미는 욕조에 들어와 해리 위에 그대로 누웠다. 


한 명이 눕기에 딱 적당한 크기의 욕조에 두 사람이 들어가자 물이 넘치며 거품이 바닥으로 흘렀다. 호텔방에서 울려 퍼지는 아이유의 꿀떨어지는 목소리를 들으며 혜미는 지긋이 눈을 감았다. 


냉장고에서 쿠스케냐 한 병을 꺼내들고 들어온 해리는 뜨거운 욕조 안에서 얼음처럼 차가운 맥주 한모금을 깊이 들이마시고 혜미의 입에 병을 갖다 대었다. 혜미는 눈을 감은 채로 차가운 맥주 한모금을 마셨다.

 

그냥 이대로 있고 싶었다. 


원래 묵던 게스트 하우스에 비해 한인 민박의 개인실이 편한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메리어트 호텔의 테라스룸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물론 그건 오버라는 것 쯤은 사회생활 몇 년 해본 혜미도 잘 알고 있었다. 


어제 저녁 곱창집에 가기 전, 혜미는 호텔 예약사이트에 들어가서 가격을 확인해 보았다. 이곳에서 보름이나 격리 생활을 즐기는 것은 조금 과한 것이다. 해리가 먼저 말을 꺼내지 않는다면 말이다. 


차가운 맥주 한모금이 뱃속에 들어가자 혜미의 숨소리가 가빠졌다. 아니 술 때문이 아닐지도 몰랐다. 조금씩 가쁘게 오르내리기 시작한 혜미의 가슴을 진정이라도 시키려는 듯 따뜻한 물에 젖은 해리의 양손이 부드럽게 다가왔다. 잠시 후 혜미는 뒤로 돌아 키스하기 시작했다. 


방으로 돌아온 두 사람은 목욕 가운만을 두른 채로 가볍게 표피를 뚫고 진피까지 돌진하는 자외선이 그대로 느껴지는 안데스의 햇살은 아랑곳하지 않고 테라스로 나갔다. 격리 전에 즐기는 마지막 햇볕이었다.


‘점심 먹고 가야지?’


‘배가 별로 고프지는 않은데요.’


‘지금 안 먹으면 저녁 먹기 전에 배가 고플텐데?’


허긴, 어제도 그랬다. 늦은 브런치를 먹고 오후 늦게까지 방에서 딩굴거리다 허기진 배를 안고 곱창집으로 간 것이다. 오늘은 그나마 어제에 비하면 아침도 일찍 먹었다.


‘갈 때는 민박으로 바로 가야지 어디 식당을 들리지는 못할거야. 문을 연 곳도 없을 거고’


‘앞으로 보름 동안 계속 거기서만 밥을 먹겠지요?’


‘그러니까, 삼시 세끼 같은 곳에서 먹다보면 금방 질리겠지. 오늘 점심이라도 다른 거 먹고 가자.’


‘체크아웃이 세시라구요?’


‘응. 세시니까 세시 조금 넘어서 나가지 뭐.’


‘그래요, 먹고 가요. 뭐 먹을래요?’


‘글쎄, 거기 메뉴판 봐바. 먹고 싶은 걸로 두 개 골라.’


기껏 수영복을 챙겨는 왔지만 욕조에서 한참 몸을 불리고 나오니 또 다시 물에 들어갈 생각은 들지 않았다. 어차피 두어 시간 있다 나갈텐데 수영장에 가서 옷을 갈아입고 다시 들어오고 이러는게 더 귀찮았다. 체크아웃까지 방에 있기로 한 두 사람은 두시 좀 넘어 룸서비스를 시켰다.


‘피자 어때요?’


‘좋지, 파스타도 하나 시켜, 한식만 계속 먹다 보면 느끼한게 먹고 싶어질거야’


식사를 마친 두 사람은 잠시 후 체크아웃을 하고 호텔을 나와 걷기 시작했다. 


‘룸서비스까지 시키고 호텔비 많이 나왔죠? 어제 차도 호텔에서 빌린 거죠?’


‘별로 안 비싸, 여긴 페루쟎아.’


‘민박은 제가 계산할게요.’


‘아니 괜챦아. 민박은 같이 내자 그럼.’


‘아니에요, 이건 제가 할게요. 얘기 끝. 알았죠?’


어제는 반쯤 뛰다시피 한 길이었지만 오늘은 최대한 천천히 걸었다. 지난 일주일 동안 숱하게 걸어 다닌 쿠스코의 돌길을 한걸음 한걸음 음미하듯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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