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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산블라스 언덕 - 계속, 쿠스코

아직은 늦은 더위가 이따금 심술을 부리는 3월의 나른한 오후가 시작되었다. 수영장에서 돌아온 두 사람은 테라스에 앉아 방에서 내린 네스프레소 캡슐커피를 마시며 하나 둘씩 사람들이 모여드는 중정을 내려다보았다. 아침 식사는 아까 끝났지만 이제 점심을 먹으러 온 사람들이 점점 뜨거워지는 안데스의 햇살 아래 두런두런 앉아있는 것이 보였다. 


그날 아침, 해리와 혜미는 늦게까지 방에서 딩굴거리다가 10시까지 제공되는 조식을 먹기 위해 9시 반이 넘어서야 1층 식당으로 뛰어내려갔다. 혜미는 가방에 넣어온 모자를 푹 눌러썼다.


어제 밤에는 너무 늦게 방에 들어온지라 중정이 있는지, 또 거기에 레스토랑이 있는지도 몰랐다. 아침에 눈을 뜨고 답답한 마음에 커튼을 젖히자 창 밖으로 호텔 중정의 야외 테이블에 앉아 아침식사를 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쿠스코 메리어트 호텔은 2층까지만 있는 특이한 구조의 건물이었다. 2층 건물이 우물 정자 모양으로 네모 반듯하게 둘러선 가운데 꽤 넓따란 중정이 있다. 날씨가 좋을 때면 중정을 둘러싸고 있는 1층 레스토랑에서 야외에 테이블을 펼쳐 놓았다. 


해가 중천에 뜬 후 에야 일어나 창밖을 내다 본 두 사람은 눈부신 태양 아래 아침식사를 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는 서둘러 눈꼽만 떼고 1층으로 내려갔다.


오랜만에 먹는 서양식 아침 부페에 과일까지 배가 터지도록 먹은 두 사람은 실내수영장으로 향했다. 수영복이 없어 수영은 못하지만 굳이 바로 방으로 돌아가기 보다는 호텔 분위기를 누리고 싶어 풀가의 태닝베드에 누워 여유 있는 분위기를 즐겼다.


‘수영장이 있는 줄 알았으면 수영복도 가져올 걸 그랬어요. 캐리어에 있는데.’


‘그럼 프론트에 물어볼까? 아니 밖에 나가면 파는 데가 있을거야.’


‘됐어요. 또 지금 배가 터질 것 같아서 수영복 절대 못 입어요. 말이 그렇다는 거지.’


원래 체크아웃은 아침 11시지만 해리는 메리어트 골드등급이라 오후 2시까지 자동으로 레잇 체크아웃이 가능했다. 방도 가장 저렴한 클래식 룸을 예약했지만 중정이 내려다 보이는 테라스룸으로 업그레이드되었다.


‘출장 자주 다닐 만한데요?’  


‘이게 다 몸으로 때우고 받는 혜택이야. 비행기 오래 타면 허리 아파. 넌 서있어서 모르겠지만’


‘마일리지도 많아요?’


‘장난 아니지’


늦여름인지 초가을인지 모를 3월의 햇살이 점점 따가워지자 두 사람은 테라스에서 방으로 들어와 침대에 누웠다. 해리는 혜미를 꼭 껴안고는 침대 위에서 한바퀴 구르고 기지개를 폈다. 해리 위에서 엎드린 채로 혜미가 물었다.


‘체크아웃 몇 시에요?’


‘두 시, 왜 또 물어봐, 나가기 싫어?’


‘싫은 건 아닌데요, 막 얼른 나가고 싶은 건 또 아니네요’


아닌 게 아니라 해리도 특별한 일정 없는 오후를 조금 더 누리고 싶었다. 굳이 서둘러서 민박집 2층으로 돌아갈 이유가 있을까? 한 팔로 혜미를 안은 채 다른 팔로 전화기를 집어들었다.


‘Front desk, how may I assist you? 프론트 데스크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Hello, I’d like to extend my stay one more night, please. 숙박 하루만 연장해주세요.’


‘Let me check the availability sir, yes, you can stay in the same room, anything else sir? 잠시만요, 확인해보겠습니다. 네 가능합니다. 더 필요하신 것이라도?’


‘Room price unchanged? 방값은 같아요?’


‘Certainly sir, I can give you the same price as you have paid to the agency.

물론입니다, 익스피디아에 지불하신 것과 같은 가격으로 해드리겠습니다 (수수료 차액은 호텔에서 먹을게요)


해리가 수화기를 내려놓자 혜미가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잠시만요. 나 수영복 가지고 올래.’


‘지금?’


‘응, 수영복 말고도 가지고 올 거 많아요.’


해리는 일어나려는 혜미를 다시 잡아 끌었다.


‘잠시만, 지금 수영하러 갈 거 아니니까, 좀 이따가’


‘아 뭐해요, 왜 그래요, 이 벌건 대낮에, 아 이 아저씨가, 저리 좀 가요, 아 쫌’


해리와 혜미는 해가 질 무렵이 되어서야 저녁을 먹으러 호텔을 나왔다. 느지막한 시간에 브런치를 배 터지게 먹었다지만 점심을 거른 두 사람은 기름지고 양 많은 것을 찾아 곱창집으로 향했다. 


소염통과 내장을 꼬치에 구워 먹는 전통요리가 있는 쿠스코에는 유명한 페루 현지식 곱창집이 있다. 한국에서 먹는 곱창과 별 다를 것 없는 비주얼을 자랑하는 이 집은 한국인 여행자들도 즐겨 찾는 곳이었다. 


두 사람은 곱창 볶음에 소고기와 염통 꼬치를 시켰다. 서울의 양꼬치 집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작은 숯불 화로에 구운 곱창은 자연스럽게 맥주를 불렀다. 페루 맥주 쿠스케냐를 곁들여가며 곱창을 먹다 보니 얼굴이 발그랗게 익어갔다.


‘게스트 하우스 들렀다 갈 거지?’


‘네 잠시만 들렀다 가요. 내일은 수영 꼭 할꺼야, 수영 먼저 하고 아침먹을 거에요.’


‘그래, 잠시만 있다가 나가자.’


해리도 수영복은 있지만 혜미가 묵는 게스트 하우스와 한인 민박은 메리어트 호텔 기준으로 정 반대 방향이었다. 이거 동선이 어떻게 나올라나, 아니면 남자 수영복은 하나짜리니까 그냥 가는 길에 살까, 이런 생각을 하며 맥주 잔을 비울 때였다. 갑자기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에요? 불났나?’


‘글쎄, 불이면 밖으로 나갈 텐데 다들 그냥 있는데? 무슨 일이지?


두리번거리는 두 사람을 향해 곱창집 주인인 듯 보이는 남자가 다가와 당시만 해도 익숙치 않은 낯선 단어를 내뱉었다.


‘Quarantine, quarantine, 격리래 격리, 이 사람들아,’


‘뭐래요? 쿼런틴? 그게 무슨 소리에요?’


‘글쎄, 쿼런틴? 그거 검역이라는 말인데. 공항도 아니고 식당에서 갑자기 왠 검역’


‘뭐에요, 그럼, 이거 혹시 곱창 상한 거에요? 유통기한 지난 거 쓰다가 걸렸다는 뭐 그런 말이에요?’


‘그러게, 아니면 뭐 페루에 가축 전염병이라도 돌았을 수도. 아무튼 구청에서 검역이라도 나왔다가 걸렸다는 말인가 보네.  아니 다 먹었는데 이제 와서 그런 말을 해주면 어떻게 하라고.’


‘그러니까요, 아, 나 좀 속이 이상한 것 같아.’


순간 혜미의 머리 속에 설사라도 하면 어쩌지라는 불길한 생각이 스쳤다. 설마, 오늘 밤에, 밤새 설사를?


‘이따 게스트 하우스 가보고 설사 나오면 나 그냥 거기 있을 거야. 호텔로 안가.’


왜 하필 오늘 곱창이 먹고 싶었던가 후회를 하며 혜미는 속으로 이런 저런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무의식적으로 휴대폰을 들여다보던 해리가 갑자기 카톡 메시지 표시가 급속도로 늘어나는 것을 발견했다. 처음에 6,7로 시작한 안 읽은 메시지수가 갑자기 수십 건으로 불어나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99에서 멈추었다. 무슨 일일까? 이건 뭐지? 갸우뚱하며 휴대폰을 열어본 해리는 이 모든 메시지가 남미 오픈 채팅방과 페루방에서 온 것을 알아차렸다. 


‘아니 이게 도대체 뭐야, 어디 쿠데타라도 났나?’


도대체 상황 파악이 안되는 해리는 페루방부터 열었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메시지를 확인하던 해리의 얼굴이 점점 심각한 표정으로 굳어졌다.


‘혜미야, 이거 큰일났다. 오늘부터 격리해야 한데’


‘네? 그게 무슨 말이에요? 격리라니?’


‘코로나, 오늘 밤부터 페루에 있는 모든 여행자들은 호텔에 격리해야 된데.’


‘네? 이렇게 갑자기요? 말도 안돼. 진짜요?’


‘어. 페루방이랑 남미방에 지금 막 글 올라오고 있어. 봐바 빨리.’


서둘러 휴대폰을 꺼내 오픈 채팅방에 올라온 메시지들을 확인하는 혜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갔다. 


마르틴 비스카라 페루 대통령이 2020년 3월 15일, 저녁 8시를 기해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비상선포의 핵심은 여행자 뿐 아니라 페루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앞으로 15일간 집에만 머물러야 한다는 것이다. 여행자들은 지금 묵는 호텔을 떠날 수 없다. 


해리도 머릿속이 하얗게 되었지만 순간적으로 메리어트 호텔비 곱하기 15부터 계산하기 시작했다. 어제 밤은 지나갔다고 쳐도 앞으로 내야 할 금액이 오백 만원을 훌쩍 넘었다. 게다가 밥까지 모두 호텔에서 먹어야 한다면 남미여행에서 쓴 돈 만큼을 호텔에서 또 써야 할 수도 있다. 


물론 격리가 시작되면 호텔의 세일즈 매니저를 찾아가서 딜을 할 것이다. 길게는 수 개월씩 체류하는 장기 출장을 다니며 호텔 측과 숱하게 가격 네고를 해 본 해리 생각으로는 충분히 협상이 가능할 것 같았다. 


하지만 그건 닥쳐봐야 아는 일이다. 쿠스코 메리어트의 GM이 지금 실적 압박이라도 받고 있다면 격리라는 약점을 쥐고 가격을 더 높여 받을 수도 있다. 적어도  정부 지침으로는 현재 묵고 있는 호텔을 떠날 수 없다니 말이다. 어쨌거나 부딪쳐 보기 전까지는 모르는 일이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최대한 이성적으로 생각하려고 노력했다. 못 낼 금액은 아니지만 굳이 보름씩이나 나가지도 못하고 호텔방에 격리되자고 쓸 만한 돈도 아니었다. 더구나 이 15일이라는 조치가 한번으로 끝날 것인지, 얼마나 연장될지는 아무도 몰랐다. 


잘 생각해보니 지금 가장 합리적인 방법은 한인 민박으로 가는 것이다. 돈도 돈이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같은 처지의 한국사람들과 소통하면서 정보를 얻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교민들은 둘째 치더라도 페루를 여행하는 한국인이 지금 한 둘이 아니다. 적지 않은 수의 자국민이 지구 반대편에서 격리조치를 당한다면 이제 곧 한국 정부나 대사관에서도 조치를 취할 것이다. 관건은 격리 비용을 아끼는 것이 아니라 격리조치가 연장되기 전에 최대한 빨리 페루를 벗어나 귀국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 


삼시 세끼를 같은 호텔에서 먹는 것도 고역일 것이다. 많을 때는 일년에 절반 가까이를 해외출장으로 보내던 해리나 승무원 생활에 이골이 난 혜미 모두 호텔밥이라면 질릴 대로 질린 상태였다. 오늘 아침 먹은 조식으로 충분했다. 아침 식사를 한식으로 제공하는 한인 민박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식사를 어떻게든 해결할 방법이 있을 것이다.


마음을 정한 해리가 혜미를 바라보았다. 혜미도 조용히 마주보며 해리가 말을 꺼내기 만을 기다렸다.


‘민박으로 가자. 일단 거기서 한국 사람들끼리 모여 있는 편이 나을 것 같아.’


‘그래요, 그게 좋을 것 같아요. 그런데 짐은 어쩌죠? 가방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데.’


해리는 다시 빠르게 생각했다. 8시를 기해 격리조치가 나왔지만 아직 많은 사람들이 호텔 밖에 있다. 아예 쿠스코나 리마를 떠나 다른 곳으로 이동 중인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아무래도 오늘 밤은 모두가 우왕좌왕할 수밖에 없다. 아무리 대통령이 비상사태를 선포했다지만 남미라는 특성 상 행정조치가 첫날 밤부터 손발 딱딱 맞게 돌아갈 것 같지도 않았다. 이럴 때는 빠르게 움직여야 한다. 


우선 한인 민박으로 가기로 했다. 지금 쓰는 1인실의 작은 침대는 혼자 자기에도 좁았다. 정 안되면 해리가 바닥에서 잘 수도 있겠지만 우선 두 사람이 머물 방부터 확보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이럴 때는 먼저 가서 자리 깔고 앉는 사람이 임자다.


해리가 계획을 설명했다. 우선 여기서 헤어지기로 했다. 해리는 걸어서 5분 정도 걸리는 민박으로 뛰어가서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텅 비어 있던 2인실로 방을 옮겨야 한다. 서둘러야 했다. 쿠스코 곳곳에 있던 한국 여행객들이 이제 곧 몇 곳 없는 한인 민박으로 몰려들 것이다. 앞으로 보름 간 머물 방을 확보하는 것이 급했다. 


혜미는 택시를 타고 게스트 하우스로 가서 짐을 챙겨 다시 메리어트로 간다. 해리도 민박에서 방을 확보한 후에 바로 메리어트로 가서 남은 짐을 챙겨서 혜미와 함께 민박으로 돌아온다.


설명을 들은 혜미가 긴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 상황에서 모든 동선을 둘이 같이 다닐 수는 없었다. 시간을 끌다가 언제 어디서 격리조치를 당할지 몰랐다. 지금은 최대한 동선을 최소화해서 빠르게 움직여야 한다.


우버를 부를 새도 없이 곱창집 1층으로 내려온 두 사람은 바로 지나가는 택시를 잡아 혜미부터 게스트하우스로 향했다. 혜미를 택시에 태워 보낸 해리는 곧장 반대 방향의 민박집으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해리의 우려는 곧 현실로 나타났다. 닷새 동안 해리의 방을 제외하면 개인실 3개가 모두 비어 있던 2층에 벌써 사람들이 가득 들어와 있었다. 다행히 2인실에 들어온 사람은 혼자였다. 민박집 사장님의 중재로 방을 바꾸기로 합의를 했다. 


사실 그 사람 입장에서도 이게 더 나은 선택이었다. 1인실에 사람이 있는 바람에 추가비용을 내고 어쩔 수 없이 남아 있던 2인실에 혼자 들어간 것이다. 서둘러 2인실로 짐을 옮긴 해리는 방문을 꼭 걸어 잠그고는 다시 민박집 밖으로 뛰어나갔다.


혜미의 경우는 상황이 조금 더 복잡했다. 게스트 하우스에서 서둘러 캐리어를 챙겨 나왔지만 카운터에서 못 나가게 막아섰다. 내세우는 이유는 오늘 저녁 8시부터 격리가 시작되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속셈은 달랐다. 혜미는 앞으로 삼 일간 더 예약을 해 놓았던 것이다. 어차피 6인실에 4명만 있는데 혜미가 지금 나가버리면 격리가 시작되는 마당에 방 절반을 계속 놀려야 한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사람들 생각은 다 비슷한지라 적쟎은 수의 한국 여행객들이 게스트 하우스를 떠나 모두 쿠스코의 한인 민박으로 몰려드는 상황이었다.  


삼일 예약도 예약이지만 업주 입장에서 오늘 투숙객을 못 구하면 최소한 15일 동안 그 자리를 비워두어야 한다. 그러니 격리 조치를 명분으로 혜미를 잡고 늘어진 것이다. 난감해진 혜미는 로비 의자에 앉아 해리에게 보이스톡을 보냈다.


‘아니 뭐라고? 이런 쓰레기들을 봤나.’


‘어떻게 해요, 못 나간데요. 나가면 경찰부르겠데.’


서둘러 메리어트로 돌아와 짐을 챙기던 해리는 치솟는 화를 참을 수 없었다. 이나라 저나라에서 별꼴 다 봐온 해리에게는 게스트 하우스 주인의 속내가 훤히 들여다 보이는 것 같았다. 아니 지금 이런 상황에서 푼돈 좀 더 벌어보겠다고 사람을 이렇게 힘들게 하다니. 눈 앞에 있었다면 앞 뒤 안가리고 주먹부터 나가고 볼 상황이다.


메리어트에는 혜미의 백팩 뿐 아니라 전날 지름신이 내린 해리의 쇼핑백도 있었다. 만만치 않은 부피의 짐을 다 챙겨서 로비로 내려온 해리는 짐을 일단 컨시어지에 맡길까 잠시 고민하다가 생각을 바꾸어 그대로 들고 나왔다. 


메리어트로 돌아오지 않을 생각이었지만 체크아웃은 하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오늘 밤은 계산을 다 해야 했다. 이런 아사리판에 상황이 앞으로 어떻게 돌아갈지도 모르는데 돈까지 다 지불한 옵션을 굳이 취소할 필요는 없다. 어차피 신용카드 정보는 체크인할 때 다 주었으니 체크아웃은 내일 전화로 하면 된다.


거리로 나왔지만 빈 택시는 찾아볼 수 없었다. 우버 역시 아무리 불러도 잡히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페루 정부는 격리조치를 취함과 동시에 대중교통을 모두 절반으로 감축했다. 가뜩이나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 택시를 찾아 우왕좌왕하는 판에 교통편까지 모자라니 빈 택시가 눈에 띌 리 없었다. 


할 수 없이 호텔로 돌아간 해리는 컨시어지에 차편을 요청했다. 아무리 저녁에 잠깐 쓴다지만 메리어트 호텔에서 기사 딸린 차를 빌리는 것은 비용이 만만치 않다.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셈이지만 어쩔 수 없다. 아마 혜미가 게스트 하우스에 잡혀 있는 상황이 아니라면 그냥 양손에 짐을 들고 걸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게스트 하우스의 뻔뻔한 처사에 머리 끝까지 화가 난 데다가 시시각각으로 상황마저 변하고 있었다. 돈보다도 빠른 대처가 중요했다. 이삼십 만원 아끼자고 머리 굴릴 타이밍이 아니다.


게스트 하우스에 도착한 해리는 프론트로 직행해서 최대한 굵은 목소리로 목청을 높였다. 어차피 나이 어린 동양 여자애가 만만해 보여서 벌이는 짓이다. 해리는 주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차 속에서 생각한 대사를 읊었다. 


혼자 여행 간 딸이 걱정된 부모님이 한국 교민 집을 수소문해서 이제 안전한 곳으로 보내려는데 이게 뭐하는 짓이냐고, 여기 온갖 뜨내기들 득실거리는 게스트 하우스에 있다가 코로나라도 걸리면 당신이 다 책임질거냐고, 경찰 부르라고, 나도 바로 한국 대사관에 연락할 테니 경찰 오면 대사관 직원 바꿔준다고, 대사관 통해서 당신이 한국사람 감금했다고 페루 정부에 항의할 테니 한번 해보자고 소리를 질렀다.


혜미를 붙잡아 두고 한화로 삼십 만원 쯤을 더 벌어보려던 게스트 하우스 주인은 한국 대사관과 경찰을 들먹거리는 낯선 동양 남자를 보고는 순순히 현관문을 가리켰다. 


페루에서 그만하면 큰 돈이긴 했지만 애초에 이렇게 시끄러운 마찰이 있을 줄 알았다면 이런 무리수를 두지도 않았을 것이다. 해리 생각대로 그냥 만만해 보여서 그래봤던 것 뿐이다.


눈 앞에서 날아가는 삼십 만원을 아쉬운 마음에 현관문을 통해 지켜보던 주인은 두 사람이 문 앞에 대기하던 렉서스 뒷자석에 올라 타고 기사가 혜미의 캐리어를 트렁크에 싣는 것을 보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기사 딸린 고급차를 타고 와서는 한국 대사관과 페루 정부를 들먹이는 해리가 외국에서 온 높은 사람으로 보였을 것이다. 주인은 돈 좀 더 벌어보자고 버티다가 진짜 경찰이라도 왔으면 큰일날 뻔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 이건 무슨 차에요?’


‘설명하자면 길어. 가서 이야기 해줄께.’


긴장이 조금 풀린 혜미는 렉서스 LS 뒷좌석에 머리를 기대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해리 말이 맞다. 지금 그런 것까지 일일이 설명을 듣기에는 오늘 저녁이 너무 스펙타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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