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시로 돌아온 두 사람은 산블라스 골목으로 가기로 했다. 이대로 숙소에 들어가기에는 아직 이른 시간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오늘이 생일이라는 혜미의 말을 듣고 그냥 모르는 척 들여보낼 수는 없었다. 생파라고 하기에는 조촐하겠지만 둘이서라도 생일을 축하해주기로 했다.
택시를 다시 탔지만 산블라스 언덕은 차가 들어가기 힘든 곳이다. 대부분의 레스토랑이나 바는 차는 아예 들어갈 수도 없는 좁은 골목길에 있다. 그래서 일단 산블라스 광장까지 가기로 했다. 언덕 중간 쯤에 있는 산블라스 광장까지만 차를 타고 가면 주변은 산책삼아 걸어서 둘러볼 수 있다.
그런데 택시기사로부터 다시 영업이 들어왔다. 산블라스 광장으로 가자는 말에 광장 못미쳐 중간 쯤에 있는 산블라스 뷰포인트를 들렀다 가자는 것이다. 물론 조금 돌아가고 또 사진기사 노릇을 해주면 요금이 올라가겠지만 그래보아야 한국 기준으로 푼돈에 불과했다.
그렇게 막상 뷰포인트에 도착하니 해리는 택시기사에게 고마운 마음까지 들었다. 쿠스코의 야경을 총 세 군데에서, 그것도 각자 특색이 다른 세 군데의 조망 포인트에서 각각 보게 된 셈이다.
산블라스 뷰포인트는 위치로 보면 림버스 바 근처에 있지만 분위기는 달랐다. 조금은 을씨년스럽고 휑하기만 한 예수상 주변에 비해 이곳은 잘 정돈된 작은 공원이었다.
쿠스코의 낡은 뒷골목의 풍경이 은은한 가로등과 어우러지며 굳이 멀리 야경을 볼 필요도 없이 뷰포인트 공원 자체만으로 필름 카메라로 찍은 듯한 아른한 장면을 연출했다. 지금 해리와 혜미에게 이 곳보다 더 어울리는 장소는 없을 것이다.
택시기사는 이번에는 택시 안에 잠자코 앉아서 기다리겠다고 했다. 두 사람은 쇼핑백과 가방을 차에 둔 채 지갑과 휴대폰만 챙겨 들고는 밖으로 나왔다. 우버로 부른 택시는 이런 면에서도 편리한 점이 있다.
언덕 중턱에서 오목한 분지 속에 위치한 쿠스코 시내를 보면 맞은 편 언덕의 집들이 같은 눈높이에서 보인다.
해리와 혜미는 뷰포인트 난간 옆에 있는 낡은 벤치에 앉아 조용히 맞은 편 언덕을 바라보았다. 건너편 어디에선가는 또 다른 누군가가 이쪽을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낮의 텐션이 사라진 두 사람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혹시 살면서 제일 후회되는 일이 있어? 혹시?’
‘아저씨는요? 그런 거 있어요?’
혜미는 이제 아조씨라고 코맹맹이 소리를 내지 않았다.
‘나?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안하고 남들이 하면 좋을 거라고 했던 일을 하는 거?’
‘그런 게 있었어요? 지금 하는 일이 하고 싶은 일 아니었어요? 재미있어 보이는데요, 돈도 많이 벌고.’
‘나쁘지는 않지만 또 딱히 하고 싶었던 일은 아니었지.’
‘그럼 하고 싶었던 일이 뭐였는데요?’
‘그냥 공부를 더 하고 싶었어, 좀 길고 복잡해, 여기 앉아서 할 이야기는 아닌 듯.’
‘그래요 그럼, 나중에 기회되면 얘기 해줘요.’
‘혜미는? 후회되는 일 있어?’
‘음, 믿거나 말거나지만 그런 일이 있어요.’
‘뭔데?’
‘수능 끝나고 학교 면접보고 나오는데 길거리 캐스팅 당한 적 있어요.’
‘오, 근데? 왜 안했어?’
‘걸그룹 오디션 보래요. 저 노래 못하는데, 춤은 말할 것도 없고’
‘그래도 한번 해보기라도 하지, 어디 대형기획사는 아니었나봐.’
‘큰 데였어요. 믿거나 말거나.’
‘어디였는데?’
‘SM. 진짜에요.’
‘헐, 대박.’
‘그러게요, 그 때 명함 준 언니가 꼭 오디션 보러 오라고 했는데, 안 갔어요. 자신도 없고.’
‘허긴 기획사들이 수능 끝나면 캐스팅하러 다닌다더니’
‘그 땐 몰랐는데 그렇다네요. 아마 과가 항공운항과라 면접장 앞에서 기다린 것 같아요. 솔직히 저 말고도 여럿 불려가더라구요.’
‘삶은 언제나 선택의 연속이지. 오늘 우리가 사는 모습은 예전에 했던 선택의 결과물이고. 그래서 늘 궁금하긴 해. 그 때 다른 선택을 했다면 그 결과물이 지금 어떤 모습이었을까 하고’
‘아저씨는 많이 다르지 않았을 것 같아요. 지금처럼 이 모습이었을 것 같아요. 그게 어떤 선택이었는지는 모르지만’
‘난 되게 달랐을 것 같은데.’
‘아저씨, 우리 좀 걸을래요?’
‘그럴까? 거진 다 내려온 것 같긴 하네.’
‘그런 것 같아요. 택시 돌려보내고 이제 걸어내려가요.’
두 사람은 택시로 돌아와 쇼핑백과 가방을 꺼냈다. 해리는 기사에게 그냥 백솔짜리 지폐를 주고 손을 살짝 내저었다. 어쨌든 기분 좋은 밤이었다. 뜻밖에 횡재한 기사는 땡큐를 연발하며 손을 흔들고 사라졌다.
멀지 않은 산블라스 광장을 목적지로 잡고 노란색 가로등이 비추는 언덕길을 내려갔다. 딱히 대화가 끊임없이 이어진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어색하거나 불편하지는 않았다.
오후의 들뜸은 이제 다 사라졌지만 대신 조용한 편안함이 남았다. 굳이 말을 이어가지 않아도 편안한 단계에 접어든 것이다.
‘어머, 잠깐만요. 저기 좀 가봐요.’
산블라스 광장까지 내려오자 해미가 갑자기 뭔가를 발견하고 걸음을 재촉했다. 광장 한쪽에 혜미가 찾던 라마와 알파카 인형을 산더미처럼 쌓아 놓고 파는 노점상이 있었다. 인형만 놓고 본다면 지금까지 본 것 중에 제일 많았다.
‘쇼핑은 여기까지만 하고 끝내야겠어요. 인형 좀 골라주세요.’
해리와 혜미는 산더미처럼 쌓인 라마와 알파카를 하나씩 손에 들고 각자 인물을 보기 시작했다.
라마와 알파카 인형은 서로 분위기가 달랐다. 라마 인형은 털실을 단단하게 칭칭 둘러 인형 모양을 만들고 그 위에 여러가지 잉카문양으로 장식을 입혔다.
반면 조금 더 큰 알파카 인형은 털이 북실북실한 알파카 모습 그대로 하얀 털이 온몸에 덮여 있다. 식당의 꾸이가 쓰던 것 같은 전통 모자를 제외하면 다른 장식이 없었다.
여행가방에 넣어서 가기에는 작고 단단한 라마 인형이 제격이었다. 혜미는 친구들 선물로 적당한 크기에 이목구비가 또렷한 라마 인형 여러 개를 골랐다.
라마 인형도 물론 기념품으로 적당했지만 그래도 예쁜 걸로만 따지면 단연 포근한 느낌을 주는 알파카 인형이 제일이었다. 혜미도 라마 인형을 고르는 중에도 간간히 털이 부슬부슬한 알파카 인형을 들고 잠시 품에 안아보기도 했다.
‘다 골랐어요. 이 정도 사면 될 것 같아요.’
혜미가 정성 들여 고른 라마 인형을 길 위에 늘어놓으며 말했다. 하나는 혜미 방에 놓을 것이고 나머지는 친구들 선물이었다.
‘그럼 나는 알파카로 살래, 제일 예쁜 걸로 골라줘.’
‘아, 인형 사시게요? 좋아요 그럼.’
‘남이 사는 거 보고만 있으니까 나도 사고 싶네, 알파카 인형은 거실 한쪽에 놓으면 좋을 것 같아.’
‘맞아요, 알파카는 인테리어 소품 느낌도 나요.’
‘예쁜 걸로 잘 골라줘’
‘걱정 마세요, 쿠스코 와서 일주일 째 인형만 보고 다녔는 걸요.’
혜미는 자기가 사는 것처럼 신이 나서 알파카 인형을 골라 들고는 하나 하나 꼼꼼히 보기 시작했다.
‘얘가 제일 예쁜 것 같아요. 한번 보세요.’
‘오 그러네, 눈도 제일 또렷하고.’
‘좀 크긴 한데 사이즈도 좀 있어야 보기 좋을 것 같아요.’
‘그러게, 전문가가 고르니 역시 다르네, Gracias, 그라시아스’
계산을 할 차례였다. 혜미는 해리에게 라마 인형 가격을 건넸다. 이제 네고는 해리의 몫이다. 여기서도 기분 상 10 솔을 깎았다. 해리는 10 솔을 혜미에게 돌려줬다.
‘많이 산 사람이 디스카운트를 받는 거지’
‘에이, 라마가 개수만 많지 가격은 알파카 하나랑 비슷한데요.’
‘우리는 그런 복잡한 거 모르고 그냥 많이 사면 비싸 보여’
‘어디 갈까요?’
‘짐도 많은 데 괜히 헤매지 말고 아는 데로 갈까? 림버스’
‘좋아요, 검색해봐도 거기가 제일 분위기도 좋고 야경도 제일 예쁘다고 했어요.’
림버스 바는 아까 두 사람이 내려왔던 산블라스 뷰포인트 방향이었다. 왔던 길을 그대로 돌아가기는 그러니 두 사람은 구글맵을 보며 조금 돌아가는 길을 택했다.
사흘 만에 찾은 림버스 바는 변함이 없었다. 길다란 입구의 꽃길은 여전히 조명으로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현관에 들어서니 맞은 편 통창으로 이제는 익숙해진 쿠스코의 야경이 보였다.
메뉴판을 받자 마자 해리는 케이크가 있는지부터 물었다. 오밤중에 술집에서 케이크를 찾는 손님을 보고 잠시 당황한 직원은 물어보겠다며 사라졌다. 잠시 후 돌아온 직원은 케이크는 없지만 파이가 있다고 대답했다.
‘괜찮아요. 케익 안 먹어도 되요. 진짜.’
‘생일인데 케익이 없으면 말이 안되지. 파이 준다니까 케익이다 생각하고 노래 불러줄께.’
‘진짜요? 크게 불러줘야 돼요.’
‘생일날 쫓겨나고 싶은가 보지?’
‘부른 사람만 나가면 되지 왜 나까지 쫓겨나요?’
뜻하지 않게 인형 쇼핑을 하고 바에 오니 차분했던 분위기가 조금씩 다시 올라왔다. 케익 대신 파이를 시켰고, 이제 음료를 고를 차례였다.
‘알쓰니까 와인 한 병은 그렇고 칵테일?
‘좋아요, 나 저거 한번 시켜보고 싶었어요.’
혜미는 눈으로 건너편 테이블을 가르켰다. 거대한 모아이 모양의 칵테일잔이 보였다.
‘저거? 오 사진빨 좀 받겠는데, 그럼 저걸로 하나.’
혜미와 같이 다닌 지 하루 만에 해리는 인스타 유저들의 행동패턴을 파악했다. 인간의 감각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시각이고, 미각과 후각은 그 다음이었다. 아니 시각 외에는 애초에 고려 대상이 아닐지도 몰랐다.
혜미가 시킨 모아이와 해리가 시킨 코카인이 나왔다. 코카인은 이름일 뿐 보드카 베이스에 소다를 섞은 것이다. 아주 잠깐이지만 해리는 Route 36을 떠올렸다.
케익 대신 파이까지 도착했다. 그냥 케이크 없다고 넘어가지 않고 파이라는 대안을 찾아준 직원은 친절하게도 초까지 함께 가져다 주었다. 파이에 꽂은 초에 불을 붙이고 사진 찍을 준비가 끝났을 때 갑자기 혜미가 뭔가 생각난 듯이 말했다.
‘잠깐만요. 얘들도 같이 찍어요.’
혜미는 쇼핑백에서 방금 사온 라마 인형을 꺼내서 테이블 위에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냥 올려놓은 것이 아니라 나름 크기와 색깔을 맞추어 정성껏 배열을 했다.
‘오, 그럴 듯 한데.’
‘이쁘죠? 이렇게 찍으면 진짜 이쁘게 나올 거에요.’
림버스 바의 알록달록한 페루풍 소파와 테이블과 어우러진 라마 인형의 배열은 꽤나 잘 어울렸다. 거기에 모아이 모양의 칵테일까지 테이블 한쪽에 세워두니 왠만한 곳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비주얼이 나왔다.
잠자코 혜미의 인형놀이를 지켜보던 해리는 혜미가 올려놓은 인형들의 방향을 바꾸어 모두 혜미를 바라보게 했다. 그리고 이건 뭔가 하는 표정으로 쳐다보는 혜미를 보며 조금 전에 산 알파카 인형을 꺼내어 라마 인형들 사이에 올려놓았다. 커다란 알파카 인형 주위를 작은 라마 인형들이 둘러싸게 되었다.
눈을 동그랗게 뜨는 혜미를 보며 해리가 조용히 말했다.
‘생일 축하해. 선물이야.’
‘어머, 진짜요? 정말 저 주시는 거에요? 이거 그럼 저 주시려고 산 거에요? 진짜로?’
혜미는 더 이상 아무 말 하지 않고 테이블 위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각자 다른 표정의 인형들과 갈색의 작은 호박 파이 위에서 일렁이는 촛불을 잠자코 바라보았다. 잠시 후,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고마워요, 진짜, 정말 오늘 같이 있어줘서 고마워요. 지금 너무 행복해요. 쿠스코 오기 정말 잘한 것 같아요. 다른 어떤 생일날보다 지금 행복해요.’
마지막 말을 할 때 혜미의 눈에 기어이 눈물이 두방울쯤 고였다.
코를 한번 훌쩍이고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는 혜미에게 해리는 조용히 냅킨을 집어 손에 쥐어주고는 나지막한 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생일 축하 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사랑하는...’
혜미는 참았던 눈물을 쏟았다. 흐느끼지는 않았지만 두 손에 얼굴을 파묻고 조용히 울기 시작했다. 맞은 편에 앉아있던 해리가 혜미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한 손으로 혜미의 어깨를 살짝 감싸 안고 조심스럽게 토닥거리며 마저 노래를 불렀다.
‘사랑하는 우리 혜미, 생일 축하합니다.’
들썩이던 혜미의 어깨가 조금씩 잔잔해졌다. 고개를 든 혜미의 눈 주변은 여전히 촉촉했지만 입은 이미 웃고 있었다.
‘크게 불러준다면서요. 왜 크게 안 불러요. 다시 불러요’
‘왜 그래, 지금 쫓겨나면 운다고 쫓겨난 줄 알아요, 사람들이.’
‘지금 다시 불러요. 바로.’
‘알았어. 못할 것 같지. 후회하지 마.’
두 손을 둥글게 말아 입에 대고 허공을 향해 노래를 하려는 찰나에 혜미가 그러는 해리의 손을 잡아 내렸다.
‘왜 그래요. 쪽팔리게, 진짜.’
‘언제는 부르라며, 시키는 대로 하는데도 뭐래.’
두 사람이 처음으로 손을 맞대었다. 갑자기 혜미가 멋적게 웃으며 해리의 손 위에 올려놓았던 자신의 손을 떼려고 했다. 이제 해리가 그런 혜미의 손을 잡았다. 해리가 자신의 손을 잡았던 혜미의 손을 위아래로 포개 잡고는 조심스레 어루만졌다.
‘이제 저리 가요’
조금 민망해진 혜미가 안 잡힌 다른 손으로 해리를 떠밀었다. 아직 눈물도 제대로 안 닦았다. 해리는 웃으며 순순히 자리를 옮겼다. 혜미는 파데를 꺼내 거울을 보며 냅킨으로 눈 주위를 닦았다.
‘화장 다 지워졌어요. 몰라.’
‘화장 한 거였어? 난 쌩얼인 줄.’
‘쌩얼 맞아요. 거의 쌩얼.’
잠시지만 울다가 웃기 시작한 혜미가 민망한 표정으로 계속 웃었다. 파이를 자르고 칵테일을 마신 두 사람은 잠시 더 앉아있다가 나가기로 했다. 굳이 이미 와본 곳에 오래 머무를 이유는 없었다.
림버스 바의 문을 열고 꽃길을 지나면 바로 쿠스코의 골목이 시작된다. 언제 보아도 레트로 영화의 한 장면 같은 잔잔한 풍경이다. 거친 돌계단 위를 은은하게 가로등이 비치고 있다. 고개를 들면 저 너머로 건너편 언덕의 같은 모습이 보인다.
계단을 내려가며 해리는 혜미의 손을 잡았다. 혜미도 빼지 않았다. 해리 손을 꼭 잡고 돌계단을 조심스레 내려가던 해미가 갑자기 손을 풀었다. 돌아보는 해리를 보며 혜미가 저만치 손짓했다.
‘아조씨, 저기 앞으로 가봐요. 빨리.’
‘사진찍게? 알았어.’
이제 익숙해진 해리는 잠자코 시키는 대로 했다. 혜미가 찍으려는 것은 뒷모습이었다. 혜미를 등지고 앞으로 걸어가는 동안 혜미는 흐릿한 영화 속의 한 장면 같이 쿠스코의 낡은 집들 사이로 조금씩 멀어지는 해리의 뒷모습을 계속해서 찍었다.
등 뒤에서 벌어지는 일을 모른 채 시키는 대로 계단을 따라 골목길을 어느 정도 내려간 해리는 이제 됐겠거니 하고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이 정도면 돼? 더 갈까?’
‘됐어요. 다 찍었어요. 거기 계세요. 내가 갈께요.’
아직 상황파악이 안된 해리는 멍한 표정을 지었지만 굳이 따지고 들지는 않았다. 사진을 찍어 인스타에 올리는 것은 해리가 참견할 영역이 아니다. 그냥 가라면 가고, 멈추라면 멈추고, 손을 들라면 들면 될 뿐이다.
해리는 쇼핑백을 계단 옆에 내려놓고 혜미가 오는 것을 기다렸다. 곧 혜미가 해리 옆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내려갈 생각을 안 하는 해리를 보며 혜미는 옆에 가까이 와서 멈췄다. 아까 잉카 코스프레 사진을 찍을 때 만큼이나 두 사람은 가깝게 붙어 섰다.
해리는 혜미의 쇼핑백을 받아 자신의 쇼핑백 옆에 내려놓았다. 아무 말없이 왼 팔을 들어 머리를 쓰다듬었다. 혜미는 가만히 있는 것 같았지만 조금씩 무게중심을 해리 쪽으로 기울였다. 잠시 후 혜미의 머리가 해리의 왼쪽 어깨와 가슴 사이에 놓였다. 왼손으로 혜미의 어깨를 감싸 안은 해리는 다시 오른팔을 들어 머리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혜미는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가 조금씩 품 안으로 파고 들었다. 산블라스의 희미한 가로등 아래에서 이제 혜미는 해리의 가슴에 완전히 얼굴을 파묻고 조용히 서있었다.
산블라스 언덕을 내려온 두 사람은 혜미의 게스트 하우스 앞까지 택시를 탔다. 아무리 가볍다고는 하지만 쇼핑백에 가방까지 짊어지고 오래 걸을 길은 아니었다.
마침 지나가는 택시를 불러세워 자정이 넘은 시간에 도착한 게스트 하우스 앞은 조용했다. 아마 룸메들은 자고 있을 것이다. 이미 체크아웃한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한방을 쓰지만 딱히 친하게 지내지는 않아서 서로 언제까지 있는지, 어디로 갈 것인지 묻지는 않았다.
게스트 하우스 정문에 선 혜미는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해리와 마주 섰다. 포옹은 언덕에서 이미 한번 했다.
해리가 마주보고 양팔을 벌리자 혜미가 한발자국 앞으로 더 다가왔다. 그대로 팔을 오므려 다시 한번 꼭 안았다. 혜미를 안고 잠시 기다리던 해리는 곧 어깨를 잡고는 품에서 살짝 떼어냈다. 이게 뭘 의미하는지 아는 혜미는 그냥 조용히 눈을 감고 서 있었다. 곧 볼을 쓰다듬는 손 끝이 느껴졌다. 여전히 눈을 감은 채로 고개만 살짝 들었다. 촉촉하지만 조금은 거친 남자의 입술이 처음 느껴진 곳은 이마였다. 혜미는 계속 눈을 감고 기다렸다. 곧 입술이 미간을 거쳐 코끝을 타고 내려오는 것이 느껴졌다.
혜미를 꼭 안은 채로 해리는 계속 망설였다.
이렇게 들여보내는 것이 맞는 것일까?
혜미가 묵는 방은 여자들만 묵는 도미토리였다. 따라 들어가는 것은 말도 안되지만 이곳에 굳이 따라 들어가고 싶지도 않았다. 해리가 묵는 한인민박은 혼자 쓰는 1인실이지만 그 곳도 굳이 가고 싶지 않기는 매한가지였다. 게다가 바로 오늘 아침에 스태프에게 한 소리 듣지 않았던가.
잠시 생각하던 해리는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왼손으로 혜미를 안은 채 오른손으로 휴대폰을 치켜들고 구글 맵을 켜서 주위를 검색했다. 이윽고 원하는 것을 찾은 해리는 한손으로 휴대폰을 든 채 엄지손가락만으로 열심히 타이핑을 시작했다.
해리가 휴대폰을 꺼내 뭔가를 하고는 있는데 볼 수는 없던 혜미는 잠시 어리둥절했지만 곧 뭔가를 깨달았다는 듯이 웃기 시작했다. 한번 웃음이 터지자 더 참을 수 없다는 듯이 키득키득 웃으며 주먹으로 해리의 가슴을 치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하려던 일이 들통나 버린 해리 역시 웃음을 참지 못했지만 시작했던 일만큼은 멈추지 않고 계속 해나갔다. 그러면서 왼손으로 혜미를 더 힘주어 끌어안았다. 혜미도 웃음을 멈추지는 않았지만 굳이 품에서 벗어나려고 하지는 않았다.
잠시 후 해리는 왼팔에 힘을 풀고 혜미에게 휴대폰 화면을 보여주었다. 익스피디아 사이트에 쿠스코 JW 메리어트 호텔 예약화면이 떠 있었다. 해리가 아무 말없이 혜미를 쳐다보며 눈으로 물었다. 혜미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만요, 나 방에 금방 갔다올게요.’
‘응, 얼른 다녀와.’
예약을 완료하려면 신용카드 정보를 입력해야 했다. 지갑도 꺼내야 하고 두 손이 필요한 순간에 마침 혜미가 방으로 들어갔다. 이 시간에 있던 방이 갑자기 나갈 리는 없겠지만 마음이 급한 해리는 두 손을 사용해 서둘러 예약을 마무리지었다.
JW Marriott El Convento Cusco,
Classic Room, King size bed, non-smoking, breakfast included
Check-in: Mar. 14th, Check-out: Mar. 15th
때마침 혜미가 이것저것 가득 집어넣어 빵빵해진 백팩을 메고 돌아왔다. 택시가 돌아다니기에는 늦은 시간이었고, 우버를 부르고 기다리기에는 마음이 급했다. 두 사람은 손을 꼭 잡고 아무도 없는 쿠스코의 밤거리를 걷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