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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산블라스 언덕 - 쿠스코의 예수상

‘아저씨, 이거 해봐요.’


‘응? 이거 하라고? 갑자기?’


해리는 예상치 못한 혜미의 요구에 순순히 시키는 대로 따랐다. 딱히 힘들지도, 어렵지도 않은 부탁이었다.


‘거 봐요, 아직 혼자서 못 매네.’


해리가 배운 대로 머플러를 매어 보려고 쩔쩔매자 혜미가 혀를 쯧쯧 차며 목에 머플러를 둘러주었다. 


‘자 아저씨, 이리 와봐요.’


자신도 머플러를 꺼내 목에 두른 혜미는 거울 앞에 섰다. 해리가 조금 떨어져 서자 혜미는 해리의 머플러를 잡고 자기 쪽으로 잡아 끌었다. 왼손에 아이폰을 든 해미는 오른손으로 해리의 머플러를 잡아 당기며 걸크러쉬 포즈로 사진을 찍었다. 


처음 찍는 커플 셀카였다.


해리도 사진을 찍으려고 폰을 꺼내자 혜미는 허공에 집게 손가락을 세워 좌우로 저었다.


‘갤럭시 노노해요. 사진은 아이폰이지, 그건 아저씨 셀카나 찍으세요.’


‘아, 그게 달라?’


‘다르죠. 아저씨도 아이폰으로 바꿔요. 회사에서 안 바꿔 줘요?’


‘우린 사실 매년 새 폰으로 바꾸긴 하는데 그냥 쓰던 게 편해서.’


‘딱 봐도 아저씨인데 손에 아이폰 들고 있으면 한 번 더 쳐다보게 되는 그런 게 있어요. 그니까 한국가면 이제 아이폰 쓰세요. 쿠저씨.’


‘쿠저씨?’


‘응, 쿠스코 아저씨, 빨리 밥 먹으러 가요. 배고파요.’


이제 해리는 자연스럽게 혜미에게 말을 놓았다. 쇼핑 할 때만 해도 분위기 따라 반말과 존댓말을 오갔지만 식당에 와서 부터는 굳이 ‘요’자를 안 붙이는 편이 더 나았다. 말이 점점 짧아지긴 혜미도 마찬가지였다.


‘하얀 거? 빨간 거?’


‘응? 뭐가요?’


‘와인 말이야. 무슨 색?’


‘난 하얀 색.’


오랜만에 와인을 곁들인 저녁식사였다. 하우스 와인으로 페루산 소비뇽 블랑을 주문했다. 애피타이저 삼아 세비체를 시키고, 트루차라는 송어요리와 뽀요라는 닭튀김을 곁들였다. 


이 곳에도 알파카와 소고기 스테이크가 있었지만 혜미는 고개를 저었다. 고기는 이제 질렸다. 메뉴를 넘기던 혜미가 황급히 앞장으로 돌아왔다. 뒷장에는 역시나 잉카 모자를 쓴 꾸이가 노릇노릇 구워진 채로 접시에 누워 있었던 것이다.


페루 와인은 평범했지만 하우스 와인으로 무리는 없었다. 남미에서 칠레 와인이 유명하지만 페루의 수도 리마와 쿠스코 사이에 있는 나스카와 이카의 건조한 언덕에서도 제법 괜챦은 와인이 나온다. 사실 병으로 시킬까도 했지만 혜미가 단호하게 말했다. 


‘저 알쓰에요.’ 


실제 와인 한모금이 들어가자 혜미의 얼굴이 발그랗게 달아올랐다. 


그러고 보니 지난 사흘 동안 혜미가 술을 마신 기억이 별로 없었다. 꾸이 집에서 치차술은 쥐고기의 역겨운 뒷맛을 지우기 위해 한 모금 꿀꺽 삼켰을 뿐이다. 해리가 묵는 민박집에서도 피스코는 분위기 맞추어 마시는 시늉만 하고는 거의 그대로 남겼다. 


쇼핑의 텐션이 아직 가시지 않아서일까? 알쓰라던 혜미는 식사를 마칠 무렵, 평범한 하우스 와인잔을 남김없이 비웠다.


‘아조씨,’


아저씨가 아니고 아조씨였다. 혜미는 얼굴이 달아오른 와중에도 입술을 모아 ‘조’자를 또박또박 발음했다.


‘응?’


‘나 가보고 싶은 데가 있어요.’


‘어디? 아직 초저녁이니까 시간 많아.’


‘산블라스 언덕 위에 예수상이 있데요. 거기 가봐요.’


‘산블라스 언덕이면 엊그제 갔던 데네, 바로 이 뒤니까 또 가자.’


‘근데 예수상은 그 언덕으로 올라가는게 아니고 멀리 차타고 돌아가야 된데요.’


‘그래? 그럼 차 타고 가면 되지.’


다른 많은 남미 도시들처럼 쿠스코에도 언덕 위의 예수상이 있다. 산블라스 언덕 자체가 야경으로 유명한 포인트이니 산블라스 언덕 꼭대기에 위치한 예수상은 쿠스코에서 가장 야경뷰가 좋은 곳으로 손꼽힌다.

 

다만 안데스 산 중의 고산도시인 쿠스코에서 언덕 꼭대기라는 것은 우리 식으로 하면 관악산 정상이라는 말이나 진배없다. 걸어서 올라갈 거리는 아니다.


식사를 마친 두 사람은 식당을 나서기 전에 우버를 불렀다. 관광객을 대상으로 한 택시 바가지는 만국 공통인지라 장거리를 갈 때는 우버를 부르는 편이 안전했다. 택시가 도착하자 두 사람은 아르마스 광장으로 내려가 차에 올라타고 예수상으로 향했다. 


‘You need a round trip? 돌아오는 차편도 필요해요?’


해리가 흥정을 시작할 타이밍을 찾던 중에 택시 기사가 선수를 쳤다. 산블라스 언덕의 예수상은 구글맵으로 보아도 주변 인가와 아주 멀리 떨어진 외딴 곳에 있다. 돌아올 때 우버를 부른다고 해도 차가 다시 쿠스코 시내에서부터 올라와야 할 것이다. 그러니 타고 간 차를 그대로 다시 타고 돌아오는 것이 정답이다.


’40 sol? Ok? 40솔이면 되지요?’


우버에서 알려준 편도 요금은 20 솔이었다. 한국 돈 7천원 가량으로 페루 물가를 생각하면 비싼 편이다. 꼬불꼬불 산길을 따라 언덕을 빙 둘러 가야 나오는 산블라스의 예수상은 그 만큼 먼 거리였다.


’60, 60, I will take your pictures too, 60솔 주세요. 찍사도 해드릴게요.’


허긴 나름 먼 길을 가서 예수상만 찍고 바로 내려올 것은 아니니 어차피 택시는 위에서 한참 대기를 해야 한다. 왕복 요금만 내고 기다리라고 하느니 차라리 대기 요금 넉넉히 주고 사진사까지 부탁하는 것이 속이 편할 것 같았다. 60 솔에 사진기사까지 하는 것으로 딜을 마쳤다. 


돌아오는 교통편까지 확보한 해리가 뒷좌석에 편하게 등을 기대고는 혜미를 돌아보았다. 혜미는 아까부터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아조씨,’


‘응?’


‘사실 나 오늘, 생일이에요.’


깜짝 놀란 해리가 농담으로 놀란 표정을 숨기려고 했다.


‘스무 번째 생일을 쿠스코에서 보낸단 말이야?’


혜미는 팔꿈치로 해리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아 됐구요, 뭐 그렇게 차이 많이 나는 것도 아니네요.’


‘아 생일이었구나. 생일 축하해.’


‘사실 한국 날짜로는 어제였어요. 한국은 오늘이 내일이니까.’


‘그래도 생일은 현지 날짜로 하는거지’


‘맞아요. 그래서 오늘이 제 생일이에요. 생일날 같이 있어줘서 고마워요.’


해리는 순간 알 것 같았다. 왜 혜미가 먼저 선톡을 했는지.


혜미는 그냥 지구 반대편에서 보내는 생일날 혼자 쇼핑을 하고 혼자 저녁을 먹기는 싫었던 것이다. 굳이 ‘나 오늘 생일이에요. 축하해주세요’라고 말을 할 생각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혼자서 보내기는 싫은 오늘이었다. 그래서 해리에게 쇼핑을 핑계로 먼저 연락을 한 것이다. 


오후 늦게 쇼핑을 하면 자연스럽게 저녁까지 같이 먹고 헤어질 수 있다. 그게 혜미의 원래 생각이었다.


그런데 지금, 나 오늘 생일이라고 말해버렸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해리는 혜미를 바라보았다. 혜미도 해리에게 고개를 돌렸다.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눈을 마주치는 것은 이번이 두번째였다. 오늘만 두번째다. 아까는 이렇게 눈이 마주치자 서로 큭 하고 웃었지만, 이번에는 해리만 살짝 미소를 지었다.


‘생일이라고 말해줘서 고마워.’


‘고맙긴요, 내가 축하받자고 말한 건데요.’


더 말을 하기에는 분위기만 어색해질 것 같았다. 잠시 헛기침을 하고는 잠자코 앞을 바라보기 시작한 두 사람을 태우고 택시가 때마침 예수상 앞에 도착했다. 예수상 아래쪽 주차장에 차를 세운 기사는 두 사람을 따라오며 필요하면 언제든지 부르라는 말을 남기고 담배를 꺼내 물었다. 


혜미는 해리의 쇼핑백에서 아까 식당에서 맨 것과는 또 다른 머플러 두 개를 들고 내렸다. 혜미는 두 개만 산 머플러를 해리는 머플러만 세 개에 스카프까지 두 개를 더 샀다. 


남반구에서 여름은 1월과 2월이다. 여름을 살짝 지난 3월 초의 쿠스코는 해가 지면 선선했다. 워낙에 고지대인지라 특히나 밤에는 약간의 쌀쌀함마저 느껴졌다. 물론 추워서 머플러를 들고 내린 것은 아니었다. 


해리는 혜미에게 받아든 머플러를 목에 걸치고 가만히 서 있었다. 혜미도 이번에는 아무 말없이 조용히 머플러를 매어 주었다. 


예수상은 듣던 대로 거대했다. 너무 거대해서 정작 예수상 앞에 서면 발치의 기단만 보일 뿐 예수님의 모습은 보이지도 않았다. 예수상을 찾는 것은 예수상이 아닌 야경을 보기 위한 것이었다. 산블라스 언덕 중턱에만 가도 쿠스코의 야경이 훌륭하게 보였는데 언덕 꼭대기에서 보는 쿠스코의 전경은 탄성이 나올 정도였다.


‘여기서 아르마스 광장을 보니 저렇게 생겼군요.’


언덕 중턱의 림버스 바에서는 띄엄띄엄 보이던 쿠스코 시내가 꼭대기의 예수상 앞에서는 완전체로 한눈에 내려다 보였다. 그 중 단연 눈에 띄는 것은 아르마스 광장이었다. 


분수대와 광장을 둘러싼 환한 조명으로 한밤의 쿠스코 시내 한가운데에서 광장 혼자 불타고 있었다. 일주일도 안되는 사이에 수도 없이 오갔던 아르마스 광장이건만, 새삼 낯선 느낌이 들었다.


해리도 전망대 난간에 기대어 쿠스코를 내려다 보는 혜미를 보며 비슷한 생각을 했다. 조금은 낯설었다. 아르마스 광장이 아닌 혜미가 낯설었다. 어제까지 알던 혜미와는 조금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예수상 주변은 특별할 것은 없었다. 야경을 보고 나니 그걸로  끝이었다. 이제 사진을 찍을 차례다. 그래서 혜미가 커플룩으로 머플러를, 그것도 식당에서 찍은 것과는 다른 머플러로 굳이 신경써서 들고 온 것이다. 해리가 멀찍이서 담배를 피우는 기사에게 손짓했다.


해리는 자신의 갤럭시는 주머니에서 꺼내지도 않고 혜미의 아이폰을 받아 기사에게 건네주었다. 둘은 이제 열심히 쿠스코의 야경을 배경으로 커플 사진에 열중했다. 다만 여느 커플들과는 조금 다른 것이, 두 사람 사이에는 아무런 스킨십이 없었다.


혜미는 살짝 의아했다. 생일을 핑계로 큰 맘먹고 처음 만난 아저씨에게 마음을 조금 열어주었다. 그런데 이 사람은 그 자리에서 미동도 없다. 


비록 반나절이지만 썸은 썸이니 혜미가 반발자국 다가가면 이 사람도 반발자국 다가와야 하는 것이 매너 아닌가? 그런데 해리는 혜미가 다가올 때 뒤로 물러서지만 않았을 뿐, 그냥 제 자리만 지키고 있는 것 같았다.

 

쿠스코 야경을 배경으로 찍는 사진은 오후에 잉카 코스프레 사진을 찍던 것의 연장선이었다. 속 마음과는 별개로 두 사람은 연신 키득거리며 즐겁게 사진을 찍었다. 혜미는 해리의 포즈를 끊임없이 수정해주었다. 


아직 인스타에 입문조차 하지 않은 해리는 어떻게 포즈를 취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눈치였다. 그냥 쿠스코 야경 앞에 차렷 자세로 사진을 찍고는 이제 다 찍었으니 내려가자고 할 기세였다. 


해리는 혜미가 시키는 대로 군소리 없이 포즈를 취했다. 한 손을 올리라면 올리고, 반대편 손을 들라면 들고, 다시 두 손을 다 들라면 그대로 따라했다. 하지만 혜미가 내심 기대했던 스킨십은 없었다. 거창한 스킨십을 기대한 것은 물론 아니다. 


그냥 낮에 보다는 조금만 더 친근하게, 사진을 핑계로 어깨도 서로 맞대고, 멀찍이 손을 뻗어 잡아보기도 하고, 난간에 앉아 서로 등을 기대고 고개만 돌아보는, 혜미도 딱 그 정도까지만 기대했다. 


낮에 잉카 코스프레를 했다면 이번에는 커플 코스프레만 하면 되는 거였다. 잉카 옷을 입고 사진을 찍었다고 잉카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닌 것처럼, 이럴 때 커플 흉내를 낸다고 꼭 커플이 될 필요는 없단 말이다. 


혜미도 자기가 먼저 한쪽 코도 막고 혀도 짧게 줄이고, 사실 나 오늘 생일이라는 말까지 했는데 더 이상 혼자서만 나아갈 생각은 없었다. 반대라면 이상할 것도 없지만 철벽을 치는 것은 오히려 해리였다.


혜미는 생일날 혼자 있고는 싶지 않아 해리를 불렀다. 해리도 거기까지는 이해했다. 그러다가 예상치 않게 즐거운 쇼핑이 끝나고 잉카 코스프레까지 하고 났을 때, 혜미는 오늘 해리와 커플놀이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나 오늘 생일이라고, 이역만리에서 혼자 생일을 맞았다고, 그래서 혼자 있는 것보다는 며칠 같이 다니면서 친숙해진 아저씨랑 그냥 밥이라도 같이 먹으려고 연락을 했던 거라고, 그런데 생각보다 티티카카가 잘 통해서, 같이 쇼핑하면서 옷 골라주는게 재미나서, 잉카 옷 풀장착하고 서로 사진 찍어주고 같이 찍는 것도 너무 재미있어서, 우연히도, 정말 우연히도 우연한 곳에서 우연한 시간을 같이 보내서, 그래서 그냥 오늘만은 이 사람이 내 남자친구다, 나 남미까지 와서 생일을 혼자 보내지 않고 남자친구랑 같이 있다, 언제 또 쿠스코에서 남자친구와 생일을 함께 보내 보겠냐고, 이렇게 자기 최면이라도 걸어보고 싶었다고, 내일이면 다시 어색해질지 모르지만, 오늘은 아까 그 분위기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고, 이 기분 깨지지 않게 그냥 오늘 하루만 모른 척 아저씨가 내 남자친구 해주면 안되냐고, 아니 남자친구인 척만 해주면 안되겠냐고, 그냥 그런 척이라도 해주는게 뭐가 어렵냐고, 지금 내 말 안들리냐고.’ 


해리도 혜미가 하는 말이 들리는 것도 같았지만 세이렌의 노래 같은 환청인지도 몰랐다. 분위기에 들떠 쓸데없는 짓을 하다가 그게 환청이었다고 확인사살 당하고 싶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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