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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산블라스 언덕 - 12각돌

분수대에서 다시 만난 두 사람은 약간은 어색한 듯이 인사를 했다. 만난지 나흘이 지났지만 둘이서만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둘 다 그 동안과는 조금 다른 차림이다. 성스러운 계곡이나 마추픽추를 갈 때는 투어를 위해 간편하게 입어야 했지만 이날은 쿠스코 시내에서 쇼핑을 하고 저녁을 먹을 테니 두 사람 다 한국에서와 별 차이 없는 복장이었다.


‘얼, 아저씨 그렇게 입으니까 조금 달라보이는데요.’


‘음, 칭찬이라고 받아들이겠어요. 혜미도 바이크 밑에 깔려 있던 사람으로는 안 보이는데요?’


‘아, 그 얘기는 이제 그만요. 멍도 안 들고 아픈 데도 한 개도 없네요.’


두 사람만 남았지만 생각만큼 어색하지는 않았다. 


‘쇼핑할거면 지난 번에 갔던 시장으로 갈까요?’


‘검색해 봤는데 12각돌 근처가 더 물건이 많고 좋데요. 시장은 그 때 가봤는데 그냥 그랬어요.’


‘허긴 시장은 어디나 그냥 시장이지요.’


두 사람은 아르마스 광장 옆으로 난 언덕길을 따라 12각돌로 향했다. 쿠스코에서 해리는 나흘 째, 혜미는 일주일 째였다. 다른 곳이라면 몰라도 아르마스 광장 주변은 이제 훤했다. 


역시나 12각돌 주변의 가게들이 개중 세련되고, 물건도 많았다. 지나치는 가게마다 들어가서 둘러봤지만 정작 혜미는 별로 살 생각이 없어 보였다. 혜미가 찾는 가게는 따로 있었다.


‘꽃보다 청춘에 나온 가게라는데 거기가 제일 물건이 많데요. 평도 좋고.’


‘그럼 가는 동안에 구경만 좀 하고 사는 것은 거기서 사요.’


두 사람의 속을 모르는 가게 사람들은 해리와 혜미가 안으로 들어와 구경을 하는 동안 연신 물건을 들이대며 호객행위를 했다. 이미 가게마다 물건이 조금씩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는 혜미는 꼭 사가야겠다고 마음먹은 알록달록한 전통 문양의 페루바지를 꼼꼼히 살피면서 지나갔다. 


그런 혜미 옆에서 건성으로 한마디씩 거들던 해리의 눈에 머플러와 스카프가 들어왔다.


한 눈에 봐도 쿠스코의 머플러는 때깔부터가 달랐다. 손을 갖다 대니 말할 수 없이 부드러운 감촉이 손끝을 타고 흘렀다. 포근함이 눈으로 느껴지는 머플러를 손에 들고 직원을 쳐다보자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꺼냈다.


‘Baby alpaca, 100%, 애기 알파카 털이야. 백퍼


60 SOL, 60솔이에요’


한창 바지를 고르고 있는 혜미에게 머플러를 내밀었다. 혜미가 돌아보자 해리는 아무 말 없이 손에 머플러를 쥐어줬다. 혜미는 순간 깜짝 놀랐다.


‘어머, 이거 뭐에요. 너무 부드러워요.’


‘베이비 알파카래요. 무늬가 너무 예쁘죠.’


‘우와 진짜 좋아요. 그런데 비싸겠지요?’


‘그러게요. 이게 만원도 넘네요.’


‘뭐라구요? 만솔이 아니고 만원이라구요?’


‘에이 만솔이면 35만원이에요. 설마.’


믿기지 않는 표정을 지으며 혜미는 옆에서 쳐다보는 점원에게 ‘How much’를 외쳤다.


’60 SOL, 60솔이야’


‘60솔이면 이만원이요?’


‘이만원 조금 넘는데 여러 개 사면 이만원에 해주지 않을까요?’


‘와 이것도 사가야겠네요. 난 바지랑 인형만 봤는데.’


‘시간 많으니까 천천히 둘러봐요. 아까 말한 그 가게도 가보고, 가보고 아니면 이집에 다시 오면 되요.’


새로운 타겟이 생긴 두 사람은 혜미가 미리 점찍어 놓은 가게로 직행했다. 꽃보다 청춘에서 윤상과 유희열이 찾았다는 이 곳은 12각돌 주변의 다른 가게와는 규모부터 달랐다. 사람들이 오가는 중심도로에서 약간 안쪽으로 들어간 골목에 위치한 이 곳은 위치에서의 불리함을 압도적인 크기와 다양한 종류로 커버했다.


‘그래, 물건이 이 정도는 있어야 살 맛이 나죠.’


지금까지 고만고만한 가게들을 전전하며 노란 바지는 이 가게가, 초록 바지는 저 가게가 예쁘다며 아쉬움을 토로했던 혜미도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럼 오늘은 이 곳에 축복을 내릴까요?’


‘그래야겠어요. 그런데 이 사람들 좀 봐요. 이미 복은 넘치게 받고 있는 걸요.’


꽃청춘의 효과인지 가게 안에는 두 사람 말고도 많은 한국사람들이 있었다. 이 곳의 주인은 남미 특유의 넉살과 약간의 똘끼로 무장한 유쾌한 페루 아주머니였다. 


이렇게 장사가 잘되는데 기분이 안 좋을 리가 있을까? TV 출연 이후 갑자기 늘어난 한국 여행객들을 보면서 아주머니는 쏟아지는 웃음을 참을 줄 몰랐다. 


‘Hey, my love, come on, buy more buy more, 많이 사세요, 많이 사’


중년의 아주머니는 한국 남자만 보면 마이럽과 달링을 외쳐댔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가게 안에서 한국 남학생들 엉덩이를 손으로 쳐 대다가 영사관을 통해 항의를 받고 신체접촉은 자제하는 중이라고 했다.


혜미는 우선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바지부터 찾았다. 아무리 편하게 입는 몸빼바지 스타일이라도 적어도 S, M, L의 사이즈 구분은 있었다. 사람들 눈은 비슷비슷한 모양인지 작은 가게에 가면 특별히 눈에 띄는 패턴은 M이나 L이 없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사람 키 높이 두배 만큼 한쪽 벽면에 빼곡히 쌓여 있는 이곳의 바지들을 보니 그럴 걱정은 없어 보였다. 견물생심이라고 페루 바지에 별로 관심이 없던 해리도 막상 이런 광경을 보니 마음이 동했다.


‘나도 바지 하나 살래요.’


‘그래요. 이거 진짜 편하데요. 한국 가서 입어도 되고요.’


다년 간의 여행경험으로 무장한 두 사람은 현지에서 예뻐 보인다고 무조건 다 사가면 안된다는 교훈 쯤은 이미 예전에 터득했다. 


이렇게 현지 색채가 강한 물건은 한국에 가져가면 그저 예쁜 쓰레기에 불과한 경우가 많았다. 특히나 입고 다니는 옷이라면 무겁게 들고 가서 한 번도 입지 않고 자리만 차지하다 의류수거함으로 직행하던가 자선단체에 기부하게 될 가능성이 높았다.


이미 예쁜 쓰레기를 수없이 사고 버려보았던 두 사람은 판초나 모자, 숄 같이 한국에 가져가서 몸에 둘렀다가는 지하철에서 공연하는 남미 오카리나 공연단으로 오해 받을 물건에는 아예 눈길도 주지 않고 철저히 패션포인트가 될 아이템만을 공략했다. 


혜미네 가족들 수에 맞게 페루바지를 고르는 데에만 삼십분이 걸렸다. 바지를 고르는 내내 혜미는 해리에게 연락하기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아저씨가 생각보다 쇼핑을 좋아하는 걸.’


옷 가게에 들어온 후부터 은근히 티티카카가 되는 해리를 보며 혜미는 속으로 다행이다 싶었다.


‘입어봐요. 옷은 손으로 들고 봐서는 몰라. 입어봐야 알아요.’


가족들 패턴을 다 고른 혜미는 정작 자신이 입을 패턴은 고르지 못하고 양손 가득 바지를 든 채로 고민에 빠졌다. 이 모습을 본 해리가 두 번 생각할 필요 없다는 듯이 혜미의 손에서 바지를 받아 들고는 입어볼 순서까지 정해주었다.


‘여기서요? 입어볼 데가 있을까요?’


‘옷가게에서 옷을 못 입어보면 말이 안되지요.’


해리는 마침 지나가는 아주머니를 불러 세웠다 


‘She wanna try them on 이거 좀 입어본데요’


‘Of course, my love 당연히 입어봐야지’


아주머니는 가게 한쪽 구석으로 가서 차양을 치고 혜미에게 손짓했다. 혜미는 해리에게 가방을 맡기고 차양 뒤로 향했다.


‘어때요?’


‘음, 좋아요. 근데 이거 다 입어보고 나서 정해요.’


혜미의 가방과 자신의 가방을 양쪽 어깨에 둘러 맨 해리는 두 손에 차곡차곡 포개 놓은 바지를 순서 대로 하나씩 건네주었다.


‘이게 제일 나아보여요. 안 그래요?’


‘이것도 예쁜데, 저건 어때요? 아까 입었던 거.’


‘저것도 예뻤는데 지금 이게 패턴이 좀 특이해 보여서요.’


‘그럼 두 개 사면되지, 뭘 고민해요.’


‘그럴까요? 그럼 되겠네요. 이거 이거 두개’


‘잠깐만요. 나도 바지 살껀데.’


‘그럼 이거 어때요? 아까 오빠 걸로 살까 말까 고민했던 건데 한번 입어보세요.’


선반 위에 올려놓았던 바지를 다시 꺼내든 혜미는 해리 어깨에서 가방을 받아들며 바지를 건네주었다.


바지 쇼핑을 끝낸 두 사람은 옆 칸으로 이동해 머플러와 스카프를 보기 시작했다. 해리가 먼저 눈에 확 띄는 분홍 패턴의 머플러를 골랐다. 머플러는 포인트로 쓰는 소품이어서 어느 정도까지는 전통 패턴이 믹스가 되어도 용납이 되었다. 적어도 해리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이 곳의 머플러와 스카프는 과하지 않은 전통 문양이 은은하게 깔리는 정도여서 큰 부담이 없었다. 


‘하나만 사기에는 마음에 드는 게 너무 많은데요.’


‘마음에 들면 다 사요. 가격도 가격이지만 너무 예쁜데요.’


‘허긴 기념으로 한 두개만 사서 가면 한국 가서 후회할거에요. 더 사올 걸 하고.’


해리가 아무리 패션에 관심이 많다고 해도 승무원의 감각은 분명 달랐다. 해리가 눈에 확 띄는 것을 골라 과감하게 믹스앤매치하는 스타일이라면 혜미가 고르는 머플러는 랙에 걸렸을 때는 평범해 보여도 목에 두르면 확실히 더 눈에 띄었다.


‘이거 해봐요. 머플러도 손에 들고 봐서는 몰라요. 목에 둘러 봐야지.’


‘그러게요. 이거 걸려있을 때는 몰랐는데 매니까 확실히 틀리네요.’


‘잠시만요. 이렇게 매어 봐요.’


‘역시 아저씨들 매는 법은 정해져 있다니까.’


해리가 머플러 매는 모습을 본 혜미는 속으로 웃으며 고쳐 매어주었다.


‘이거 어떻게 매는 건지 나중에 가르쳐 줘요.’


‘뭘 나중에 가르쳐 줘요. 뭐가 어렵다고. 자 이렇게 해봐요.’


혜미의 시범을 보며 해리가 따라서 매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어렵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걸 기억할 수 있을지는 잘 몰랐다. 혜미를 따라 하면서 멋적게 한 마디 덧붙였다.


‘내가 넥타이는 잘 매는데, 요즘엔 별로 맬 일이 없네요.’


혜미가 가르쳐 준 대로 머플러를 두르고 해리는 거울을 보았다. 색감도 예쁘고, 소재도 고급스럽고, 무엇보다 한번도 안 매어본 스타일이 마음에 들었다. 지켜보던 혜미도 같은 방식으로 머플러를 두르고는 해리 옆에 섰다. 


‘이거 커플룩인데’


해리는 목구멍까지 나온 말을 간신히 안으로 밀어넣었다.


시간을 가지고 가게 구석구석을 둘러보자 혜미는 사고 싶은 것이 점점 늘어났다. 페루 전통문양에 둘러싸여 즐겁게 시간을 보내다 보니 어느덧 낯선 무늬와 색감에 적응이 된 탓이다. 머플러 다음으로는 역시나 가방을 보러 갔다. 현지인 패치가 완료된 혜미가 페루 전통문양으로 뒤덮인 백팩을 손에 들었다. 해리가 바로 고개를 저었다.


‘이거 서울에서 메고 다닐 자신있어요? ‘나 방금 남미 갔다왔어요’라고 써 있는데?’


‘그렇죠? 너무 과하죠?’


‘여기서 멜 가방이 필요하면 오케이, 한국에 가져갈 거면 글쎄요.’


‘맞아요. 한국 가서는 안 멜 것 같네요. 어디 여행 갈 때 짐가방으로나 쓰겠지요.’


백팩을 내려놓은 혜미는 그래도 가방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옆에 있는 작은 숄더백을 집어 들었다.


‘이건 어때요?’


‘괜챦은데요. 백팩처럼 크지도 않고, 포인트로 좋아보여요.’


이것도 한국 가서는 잘 안들 것 같았지만 매번 안티를 걸 수는 없다. 지금은 공감을 해주는 타이밍이라는 것 쯤은 해리도 알고 있었다. 크지도, 비싸지도 않으니 그냥 기념품이라고 생각하고 사가도 무방할 것 같았다.

혜미는 숄더백과 동전지갑까지 고르고 나서 인형을 보러 갔다. 어느덧 가게에 들어온 지 두 시간이 훌쩍 넘었지만 아직 갈 길이 멀었다. 


가게 안을 돌아다니다가 두 사람이 고른 물건이 점점 늘어나는 것을 본 아주머니는 입이 찢어지게 함박 웃음을 짓고는 커다란 쇼핑백을 가져다 주었다.


‘Buy more buy more, darling, 계속 사세요. 많이 사’


양팔 가득 들고 있던 바지와 머플러, 가방을 쇼핑백에 담은 두 사람은 인형을 고르기 시작했다. 알파카와 라마였다. 그런데 막상 이 곳에서도 인형은 딱히 마음에 드는 것이 별로 없었다. 


페루 장인들이 한땀 한땀 손으로 만드는 알파카와 라마 인형은 모두 표정이 조금씩 달랐다. 어떤 것은 네 다리 균형이 잘 맞지 않는 것도 있었다. 한두 개를 고르고 나니 더는 마음에 드는 인형이 보이지 않았다.


‘인형은 친구들 선물용이에요. 조그만 걸로 여러 개 사서 하나씩 나누어 주려구요.’


‘인형은 길거리마다 파는 곳이 널렸으니까 예쁜 것만 고르세요. 가면서 더 사면 되지.’


‘그럴까요?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만 해요.’


‘그래요. 지금 이것만 해도 들고 가는 게 아니라 지고 가야 될 판인데요.’


해리가 산더미 같은 짐을 보며 말했다. 바지와 머플러, 빈 가방과 인형이라 부피는 컸지만 그다지 무겁지는 않아서 다행이었다. 그나마 잘생긴 인형 두어 개를 골라 카운터로 가던 혜미가 갑자기 멈춰섰다.


‘잠깐만요. 이것 좀 보고 가요.’


해리가 볼 때는 도통 무엇에 쓰는 물건인지 모를 끈 같은 것을 혜미가 집어들었다.


‘이거 머리에 쓰는 헤어밴드에요. 이렇게.’


혜미는 누가 보아도 남미에서 사온 물건인지 알 수 있을 정도로 페루 전통 문양이 선명하게 그려진 헤어밴드를 이마에 가져다 댔다. 헤어밴드는 이마를 다 덮을 정도로 폭이 넓었다.


‘엄, 이건 완전히 밀림에서 사냥 나가는 포스인데요?’


‘맞아요. 쿠스코에서 사진 찍을 때 이거 쓰고 찍으면 이쁠 것 같지 않아요?’


이미 혜미는 이걸 쓰고 쿠스코 돌담 앞에서 사진을 찍어 인스타에 올리면 어떻게 보일지 상상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직도 SNS라면 페이스북에 주저리 주저리 본인의 생각을 쓰는 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해리로서는 딱히 감이 오지 않았다. 


혜미가 고른 헤어밴드를 보며 해리도 비슷한 패턴의 헤어밴드를 하나 골랐다. 어차피 혜미 말마따나 쿠스코에서 사진만 찍고 버려도 아깝지 않을 가격이었다. 같이 사진을 찍을 일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찍는다면 이런 헤어밴드를 같이 하고 찍는 것이 더 재미도 있고 기억에 남을 것이다.


‘잠시만요. 그거 나 주세요.’


헤어밴드를 쇼핑백에 담으려는 혜미를 보고 해리가 손을 내밀었다. 한 손에 헤어밴드를 받아 든 해리는 다른 손으로 쇼핑백을 들고 카운터로 향했다.


계산을 해보니 역시 다른 곳보다 조금 쌌다. 규모에 맞게 박리다매를 하는 곳이었다. 그래서 그렇게 ‘Buy more, Buy more 많이 사세요’를 외치고 다녔던 것이다.


‘와 이 머플러 아까 다른 가게에서는 60솔이라고 했는데 여기는 50솔이네요, 만 칠천원쯤?’


‘잠시만요, 이렇게 많이 사는데 더 깎아야지요.’


해리는 배가 빵빵해진 쇼핑백 두 개를 카운터에 올렸다. 하나는 혜미, 또 하나는 해리가 산 것이다. 아주머니는 신이 난 표정으로 쇼핑백에서 하나씩 꺼내며 카운트를 시작했다. 


기껏 와서 바지 한 벌, 머플러 하나씩 사가는 관광객들도 많은데 이들 두 사람은 마치 동대문에 처음 온 러시아 보따리상 마냥 마음에 드는 것은 모조리 쇼핑백에 담은 것이다.


‘혼자 왔으면 이거 반의 반도 안 샀을텐데.’


혜미는 속으로 생각했다. 생각보다 지출이 늘었지만 그 만큼 재미났다. 아주머니가 450이라고 찍힌 계산기를 보여주자 해리가 바로 딜을 시작했다.


‘400 sol. 400에 해주세요’


‘No, no, no, it’s already very cheap, honey, here, here. 안돼 안돼 원래 겁나 싼거야. 이렇게 하자.’


아주머니는 계산기를 다시 들고 450을 430으로 바꾸어서 보여주었다.


해리가 계산기를 받아들고 420으로 다시 숫자를 고쳤다. 이쯤 되면 일이천원 아끼자고 하는 일이 아니라 흥정 자체가 하나의 재미였다.


‘420, ok? Honey, we buy many, 420, OK? 우리 많이 샀쟎아요.’


‘Ok, darling, you bring many Korean friends, 오케이 콜, 대신 한국사람들 더 데리고 와야돼.’


혜미의 흥정이 먼저 끝나고 해리도 비슷한 과정을 거쳤다. 계산이 다 끝나고 혜미가 지갑을 꺼내려고 할 때 해리가 아주머니에게 손에 든 헤어밴드를 보여주었다.


‘Souvenir? OK? 이거 서비스, OK?’


아주머니도 씨익 웃으며 OK를 외쳤다. 두 사람이 합쳐서 삼십 만원 어치를 샀는데 헤어밴드는 그래봐야 3솔, 천원쯤 했다. 혜미도 고르는 재미 못지 않게 이런 흥정을 재미있어 했다. 말레이시아 시장에서 숱하게 봐온 흥정이지만 정작 혜미는 그렇게 넉살 좋게 흥정을 하지는 못했다. 


‘자, 이거 해봐요.’


혜미는 헤어밴드를 쇼핑백에 넣는 대신 자신의 이마에 두르고 해리에게도 내밀었다. 해리도 헤어밴드를 받아 이마에 둘렀다.


‘이건 진짜 커플룩인데.’


이번에도 해리는 속으로만 생각했다.


산더미 만한 쇼핑백을 들고 밖으로 나가려는데 아주머니가 두 사람을 불러세웠다.


‘Come on, come on, souvenir picture, here 기념사진 찍고 가야지.’


무슨 말인지 영문을 모른 채 두 사람은 아주머니를 따라 가게 한편으로 갔다. 다른 직원이 익숙한 듯 커다란 잉카 망토와 모자를 내밀었다. 이제 어떤 상황인지 바로 감이 왔다.


‘이거 입고 기념사진 찍어준다나봐요.’


‘와 이거 안 사도 그냥 입고 찍는다구요? 진짜?’


뜻하지 않은 상황 전개에 신이 난 두 사람이 쇼핑백과 가방을 내려놓았다. 직원이 옆에서 가게 안에 잔뜩 쌓여 있는 전통 의상을 손에 잡히는 대로 집어 풀세팅을 해주기 시작했다. 해리에게 휘황찬란한 전통 문양의 망토를 둘러준 직원은 곧 비슷한 무늬의 털모자를 골라 씌워주었다.


‘이거 지난번에 꾸이가 쓰고 있던 모자 아니에요?’


‘맞네, 이거 쓰면 어디 접시에 올라 가서 누워 있을 각인데요?’


두 시간 넘게 쇼핑을 즐기고 양손 무겁게 가게를 나오던 두 사람은 뜻하지 않은 이벤트까지 겹치자 텐션이 확 올라갔다. 자그마한 몸짓에도, 말 한마디에도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빵빵 터지기 시작했다.


세팅이 끝나자 직원은 해리에게 은색 무늬가 장식된 커다란 지팡이를 들려주었다.


‘잉카왕 같지 않아요?’


‘꾸이왕이요?’


‘아, 진짜’


혜미도 곧 풀세팅을 끝내고 해리 옆으로 왔다. 순간 커다란 잉카모자를 쓴 혜미의 얼굴이 귀엽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해리와 마찬가지로 망토를 두르고 모자를 쓴 혜미는 손에 지팡이 대신에 큼직한 라마 인형을 안고 나왔다.


가게 앞에는 커다란 바위를 쌓아 만든 잉카 시대의 돌벽이 있다. 12각돌은 아니지만 사진 배경으로 충분히 그럴듯한 장소였다. 그 앞에서 해리와 혜미는 사진을 찍었다. 


세팅을 도와준 직원이 각자의 폰을 받아 사진을 찍어주었지만 혜미가 원샷으로 찍을 때는 해리도 자신의 폰으로 다른 각도에서 열심히 사진을 찍었다. 해리가 단독샷을 받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단독샷을 충분히 찍은 두 사람은 이제 더블샷 모드로 들어갔다. 가게 안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던 아주머니가 나와 직원과 함께 해리와 혜미의 폰을 각자 받아 찍어주었다.


‘Together, together 밀착 밀착’


몇 장 사진을 찍던 아주머니가 예의 우렁찬 목소리와 손짓으로 둘에게 붙으라고 요구했다. 우리 커플 아니라고 할까 망설이던 찰나에 혜미가 팔짱을 꼈다. 아주 자연스러웠다. 해리만 가만히 있으면 되는 것이다. 


잠시 후 혜미가 팔짱을 풀자 해리는 혜미를 돌아보았다. 갑자기 가까운 거리에서 처음으로 눈이 마주친 두 사람은 순간 머리를 맞대고 웃었다. 이 모습도 모두 사진으로 담겼다. 


가게 앞에서 손님에게 전통 의상을 입히고 사진을 찍어주는 것은 서비스인 동시에 프로모션 이벤트이기도 했다. 쿠스코의 골목에서 동양인 남녀가 잉카 복장을 풀로 장착하고 사진을 찍어대자 지나가던 사람들도 구경을 하기 시작했다. 재미있어 보였는지 그런 해리와 혜미의 사진을 찍는 사람들도 있었다. 


아주머니가 밖으로 나온 것도 사실은 구경하는 사람들에게 우렁찬 목소리로 호객행위를 하기 위해서였다. 


‘Come inside, you buy many, we take photo, 들어오세요, 많이 사시면 사진찍어드려요’


생각지도 않던 잉카 복장을 하고 원없이 사진을 찍은 두 사람은 잉카 코스프레를 끝내고 아주머니와 직원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해리와 혜미의 프로모션 행사 덕분에 손님을 여럿 낚는 데에 성공한 아주머니는 양손을 흔들며 작별인사를 했다. 아예 두 손을 입에 댔다 떼며 허공에 키스를 날렸다.


‘See you, my love, bye bye, 잘 가세요, 또 오세요’


흥이 넘치는 아주머니를 뒤로 하고 메인 도로로 나오면서도 두 사람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날 줄 몰랐다. 기념품 쇼핑을 하러 온 것이 생각지도 않은 이벤트의 연속으로 이어진 것이다. 입꼬리가 반쯤 올라간 상태로 혜미가 해리를 돌아보았다. 


‘아저씨, 배 안고프세요?’


‘그렇잖아도 아까부터 허기가 지네요.’


‘그렇죠? 나도 점심에 볶음밥 한 그릇 먹었는데 아까 사진 찍다가 다 꺼져버렸어요.’


‘시간도 이제 저녁먹을 시간이에요. 그런데 이거 그냥 들고 다녀도 되요?’


‘괜챦아요. 크기만 크지 다 천이라서 가벼워요.’


‘어디로 갈까요?’


‘제가 여기 처음 온 날 수하랑 같이 갔던 페루 식당이 있는데 괜찮았어요. 거기로 가요.’


‘난 어디든 좋아요. 가요. 그런데 인형 다 못 사서 어떻게 해요?’


‘에이 괜챦아요. 돌아다니다 눈에 띄는 대로 몇 개 더 사지요 뭐. 친구들은 정 안되면 공항에서 키링 같은 거 사다 줘도 되구요.’


아르마스 광장으로 돌아온 해리와 혜미는 광장 한편에 있는 식당으로 향했다. 그냥 허름한 식당은 아니었다. 꾸이를 먹었던 식당과 비슷하게 쿠스코에서는 꽤 좋은 식당에 속하는 분위기였다. 1층에 있는 식당의 입구는 2층까지 계단으로 이어져 있었다. 


2층으로 가는 계단 중간에 길다란 거울이 있었다. 페루 양식이라기 보다는 아르누보 스타일의 황금장식으로 테두리를 두른 거울이었다. 혜미가 거울 앞에 갑자기 멈추어 서더니 손에 든 쇼핑백에서 머플러를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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