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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산블라스 언덕 - 마추픽추

“허무하지 않으세요? “ 


물끄러미 발 아래 유적지와 안개 너머로 보이는 산 밑을 내려다보고 있던 해리에게 혜미가 다가가며 던진 한마디였다. 산이 아니라 빌딩 옥상에 올라와 발 아래를 내려다보는 기분이었다. 높은 산봉우리 위에 돌을 쌓아 올린 바위 도시이니 어쩌면 이건 빌딩이 맞을 수도 있겠다. 


그런데 지금 해리가 느끼는 감정을 혜미가 꼭 집어 말해버렸다. 허무함, 너무 쉽게 와버렸다는 허탈감. 그렇다고 되돌릴 수도 없다. 이미 올라와 버렸으니까 말이다. 아마 어제 잠을 설치고 새벽에 비몽사몽 쿠스코를 출발해 함께 마추픽추 봉우리에 올라온 혜미도 이와 비슷한 생각을 했을 것이다. 


‘맞아요. 너무 쉽게 올라와버린 것 같아요.’


‘음, 뭐랄까요, 멋진 광경이긴 한데 조금 허탈하기도 해요.


이게 뭐라고, 왜 이게 그렇게 와보고 싶었고 또 이걸 보자고 진짜로 그렇게 먼 길을 왔던가 하구요.’


전날 밤늦게 잠자리에 든 세 사람은 새벽같이 찾아온 여행사 밴을 타고 쿠스코 인근의  오얀따이땀보 Ollantaytambo 기차역으로 갔다. 밴 안에서 비몽사몽간에 졸던 셋은 기차를 타자 정신이 확 들었다.

 

‘와, 이거 TV에서 보던 천정 뚫린 기차다.’


‘생각보다 좋은데요. 의자도 편하고.’


나중에야 안 사실이지만 쿠스코에도 마추픽추로 가는 기차역은 있었다. 쿠스코에서 바로 출발을 하면 굳이 밤잠을 설쳐 가면서 새벽에 나올 필요는 없다. 하지만 시내에서 30분 정도 떨어진 오얀따이땀보라는 마을에서 출발하는 열차가 훨씬 저렴하다. 그래서 이런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이 여행사를 찾으면 자연스레 오얀따이땀보 출발 편으로 유도를 한다.


어찌되었건 오얀따이땀보 역에서 출발하는 기차도 마추픽추 관광객들을 위해 특별히 만들어진 관광 열차였다. 객차의 창문이 머리 위 천장까지 이어져 있어 마추픽추 산 아래 마을까지 가는 여정 동안 지루하지 않게 안데스의 절경을 감상하며 갈 수 있다.


아침식사를 제공하는 한인 민박에서는 아침 일찍 투어를 나가는 사람들을 위해 간단한 도시락을 싸준다. 그래봐야 작은 빵 두 개와 과일, 오렌지 주스 정도지만 간단하게 요기를 할 정도는 됐다. 


기차에 마주보고 앉아 새모이 만한 아침을 나누어 먹다 보니 음식을 담은 카트가 지나갔다. 어차피 잠시 후면 제대로 아침 겸 점심을 먹을 터이니 커피만 한 잔씩 샀다. 썩 좋은 커피는 아니었지만 이따금 지나치는 강 위로 물안개가 피어 오르는 안데스의 풍경을 바라보며 기차 안에서 마시는 커피는 또 다른 맛이었다.  


커피를 마시며 풍경을 음미하는 동안 기차는 아구아스 칼리엔떼스 Aguas Calientes 마을에 도착한다. 마추픽추를 떠받치고 있는 가파른 산 바로 아래에 위치한 마을이다. 마추픽추의 전초기지 답게 아구아스 칼리엔떼스 역은 절벽처럼 높이 솟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마추픽추를 오가는 모든 관광객들이 필수적으로 거쳐가는 베이스캠프 같은 곳이니만큼 이 산중의 작은 마을은 아주 정리가 잘된 아기자기한 모습을 갖추고 있다. 깎아지르는 산 옆으로 폭포수 같은 시냇물이 흐르고, 냇가에는 깔끔한 호텔과 레스토랑이 늘어서 있다.


‘전날 미리 와서 여기서 하루 밤 자고 아침 일찍 마추픽추에 올라도 괜챦겠네요.’


‘그러게요. 남자친구랑 왔으면 그렇게 했을 텐데.’


‘다음에 또 오면 되지요. 마추픽추를 한번도 안 와본 사람은 있어도 한번만…’


‘아, 그만해요. 여길 왜 또 와요. 평생 한번 와봤으면 됐지.’


냇가의 작지만 깔끔한 레스토랑에서 조금 이른 점심 식사를 마친 세 사람은 여행사에서 알려준 대로 시냇가 옆의 버스정류장으로 갔다. 굳이 누구에게 확인할 필요도 없이 기차역을 나온 관광객들은 모두 같은 곳으로 향했다. 아침 일찍 기차를 타고 쿠스코를 떠난 관광객들이 한 버스 정류장에 길게 줄을 서 있었다. 


이 곳에서 버스를 타고 십여 분 정도만 산길을 올라 가면 마추픽추에 도착한다. 그리고 유적 사이 사이 남들 모두 찍는 인스타 명소에서 수백 장의 사진을 찍는다. 


어디서 찍을 지 고민할 필요도 없다. 좋은 스팟에는 동서양을 막론한 관광객들이 웅성웅성 모여있다. 딱히 사진명소일까 싶은 곳도 동행의 사진을 찍어주려 휴대폰의 앵글을 잡으면 바로 아~하고 이해가 간다. 인스타나 블로그 어느 곳에건 한 번은 본 풍경이 나타난다.  한 손을 들고 또 두 손을 들고, 뒤돌아 서서, 옆으로 누워서, 가능한 모든 포즈를 취하고 사진을 찍었다. 


이곳은 뉴욕의 브로드웨이나 파리의 샹젤리제 거리와는 또 다른 곳이다. 혜미의 말마따나 이 곳을 다시 찾을 일은 아마 이번 생에는 없을 것이다. 한번 왔을 때 가능한 많은 사진을 남겨야 한다.


그렇게 남이 한 숙제를 베끼듯이 사진을 찍고는 물끄러미 발 아래 유적들을 내려다 보고있는데 난데없는 허무감이 몰려든 것이다. 그런데 이 허무함이 어디서 온 것인지 곰 씹을 겨를도 없이 갑자기 비가 쏟아졌다. 

마추픽추의 기후는 변화무쌍하다. 언제 해가 짱했냐는 듯이 마추픽추 일대를 검게 덮은 먹구름이 심술궂게 비를 쏟아내기 시작하자 세 사람은 주변 돌기둥 옆으로 몸을 피했다.


‘아까 밝을 때 사진 찍길 잘했네요.’


‘맞아요. 잉카에 왔다고 태양의 신이 도와줬나 봐요. 사진 찍을 때는 해가 쨍했다가 다 찍고 나니 바로 비가 오네.’


‘이거 태양신한테 제물이라도 바치고 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


‘엄, 잉카제국은 인신공양을 했다던데.’


세 사람은 돌기둥 옆에서 미리 준비한 비옷을 꺼내 어깨에 둘러 걸쳤다. 백두산 천지가 그렇듯이 마추픽추 정상의 날씨 역시 늘 변덕스럽기로 유명하다. 비옷을 챙겨가야 한다는 것쯤은 마추픽추 등반객들에게 상식처럼 알려져 있다. 


늘 예외는 있는 법, 주변 여행자들도 대부분 가방에서 비옷을 꺼냈지만, 개중에는 전혀 대비를 하지 못하고 그 비를 그대로 쫄딱 맞으면서 내려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비도 오는 김에 다시 버스를 타고 예정보다 조금 일찍 산 아래 마을로 내려갔다. 쿠스코로 돌아가는 기차시간은 저녁이었다. 아직 시간이 한참 남았다. 


점심을 든든히 먹고 올라간 탓에 배가 고프지는 않은 세 사람은 시냇가의 카페를 찾았다. 사실 거창하게 마추픽추 등정이라고 말은 하지만 가파른 산길은 다 버스로 다니고 정작 걷는 것은 유적지 안에서 조금 오르내릴 뿐이다. 


촉촉하게 비에 젖은 아구아스 칼리엔떼스는 아침나절보다 훨씬 운치 있는 산간마을로 변해 있었다. 가뜩이나 거세던 시냇물은 잔뜩 내린 비에 더욱 불어나 폭포 같은 굉음을 내며 흘렀다.


‘그런데 마추픽추에 올랐을 때 왜 그렇게 허무했을까요?’


‘그러게요. 우리도 서양애들처럼 그냥 배낭 짊어메고 쿠스코에서부터 걸어올 걸 그랬나?’


수하는 마추픽추 올라가는 길에 마주친 배낭을 맨 등반객들을 떠올렸다. 굳이 버스를 마다하고 험한 산길을 따라 걸어서 올라가는 사람들이었다. 개 중에는 심지어 기차를 안 타고 쿠스코에서부터 배낭을 매고 며칠씩 걸려 마추픽추 정상까지 걸어가는 사람들도 있다. 


마추픽추가 관광지로 개발되기 훨씬 이전부터 이 곳을 찾은 서양 히피들이 오고 가며 만들어진 이 트레킹 코스를 잉카트레킹이라고 부른다.


잠시 망설이던 해리는 마추픽추 정상에서 혜미가 허무라는 단어를 꺼낸 순간부터 참아왔던 말을 꺼냈다. 전형적인 맨스플레인과 라떼가 결합된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마침 비 내리는 안데스 산 중의 카페에서 두어 시간을 보내는 이야기거리로는 적당할 것 같았다. 해리는 혜미와 수하에게 함께 물었다.


‘마추픽추는 왜 와보고 싶었어요?’


‘어, 그게, 그러니까, 남미 오면 다 가보는 거 아닌가요?’


‘그보다는 좀 신비한 느낌이에요. 잉카제국과 공중도시, 뭐 그런거지요. 한 번쯤은 와보구 싶었어요. 그런데 그러게요, 제가 남미 역사에 특별히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닌데 여기를 왜 그렇게 꼭 한 번 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까요? 마치 페루 관광청에 가스라이팅이라도 당한 것 처럼 말이에요.’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 두 사람의 대답에 해리는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남미를 여행하기로 마음 먹었다면 우선 어디부터 가고 싶을까? 우유니 사막의 야경은 정말 멋진 광경이다. 운이 좋으면 문자 그대로 쏟아질 듯한 별무리가 소금물에 반사되며 디즈니 만화의 한 장면 같은 풍경을 연출한다. 


아마존은 한번쯤 가볼만 하겠지만 취향을 많이 탈 것 같다. 그리고 작정하고 나선 오지탐험가가 아닌 이상 아마존은 접근성부터가 아주 떨어진다. 아마존에 대해 누구나 많이 들어보고 TV에서 숱하게 보았지만 정작 아마존을 제대로 보려면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아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리우데자네이루의 그 유명한 코파카바나 해변도 막상 가보면 그냥 지구 상에 존재하는 수 많은 해변 중의 하나일 뿐이다. 리우데자네이루 언덕 위의 예수상은 분명 장관이지만 예수상 하나를 보자고 지구 반대편까지 비행기를 타고 가서 감격의 눈물을 흘릴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 외에 아르헨티나의 팜파스나 칠레의 파타고니아 등등도 모두 가보면 좋은 곳지만 단지 그 곳을 보기 위해 지구 반대편까지 비행기를 갈아타면서까지 갈 필요는 없다. 


해변을 즐기려면 지중해나 가까운 동남아도 충분히 좋고 대자연을 보려면 해리의 경험으로는 캐나다나 뉴질랜드가 여행하기에 훨씬 쾌적하면서도 더욱 웅장한 풍경을 보여준다. 코파카바나 해변이 반드시 니스 해변이나 발리 해변보다 더 좋다는 보장도 없다. 


전세계에서 이 모든 것을 빠짐없이 경험했다고 하면 모를까 굳이 캐나다 로키산맥과 뉴질랜드 트래킹을 제쳐 놓고 지구 반대편의 파타고니아를 먼저 갈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마추픽추는 다르다. 남미에 오면 반드시 가야 하는 곳, 아니 마추픽추를 오르기 위해서 남미에 가야만 하는 곳이다. 비유하자면 미슐랭 3스타라고 해야 할까. 그 곳을 방문하기 위해 먼 거리를 여행할 가치가 있는 장소 말이다. 나머지는 잘 쳐줘야 1스타이고, 우유니 사막은 2스타 정도면 충분할 것 같다. 


그런데 이 마추픽추에 대한 느낌은 아마 세대마다 다 다를 것이다. 해리의 세대는 가본 적도 없고, 가봤다는 사람을 들어본 적도 없는 마추픽추에 대해 막연한 향수를 가지고 어린 시절을 보냈다. 


인터넷도 없이 간혹 가다 띄엄띄엄 서구문화를 접하던 시절에 68 혁명 (1968년에 프랑스에서 시작한 사회 운동으로 반전 운동과 히피 문화의 시발점이 되었다) 세대의 히피 문화 끝물 한 두 방울이 어쩌다 태평양을 건너 이 땅에 떨어졌던 것이다. 당시 히피 문화 중에서도 특히 서구 록밴드들의 노래에 유독 마추픽추라는 단어가 많이 들어갔다. 


말 그대로 1968년을 기점으로 하는 68혁명과 함께 서구에서 히피문화가 탄생한 1960년대는 양차 세계대전으로 지연되었던 2차 산업혁명이 정점에 달하며 사람 사는 모습을 완전히 바꾸어 놓은 시기였다. 자동차의 대중화, 냉장고와 에어컨의 보급, TV와 휴대용 라디오의 발명 등이 이어지며 인류의 삶은 근본적으로 변하게 되었다. 


1960년대는 2차 세계대전으로 전쟁 물자를 생산하느라 미루어졌던 이 모든 변화가 한꺼번에 사회로 퍼져나간 시기였다. 그러자 갑자기 쏟아진 이 낯선 기계들에 적응하는 것이 사회 문제로 부각되었고, 이를 물질문명이라 부르며 반감을 표출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거기에 더해 세대를 막론하고 사람들은 지겹도록 오래 지속되는 전쟁에 염증을 내고 평화를 갈구하기 시작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세계에 평화가 도래하는 것 같았지만 곧 한국전쟁이 시작되어 유럽에서 죽지 않고 살아 돌아온 많은 미국 젊은이들이 결국 한반도의 산야에서 질긴 생을 마감했다. 그리고 베트남 전쟁이 이어지며 다시금 수 많은 청년들이 전쟁터에 끌려갔다. 


2차 세계 대전 중인 1940년에 시작된 미국의 징병제는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징집대상과 복무기간이 모두 늘어났고, 북베트남과 미국이 강화조약을 체결한 1973년이 되어서야 폐지되었다. 


이 지난한 과정 속에서 전쟁에서 살아 돌아온 후에도 사회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피폐한 삶을 사는 이들이 늘어나자 사회 전반에 걸쳐 저항이 시작되었다. 20세기 후반 서구 역사에 한 획을 긋는 반전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히피로 상징되는 반전세력들은 끊임없이 전쟁을 일으키는 권력층과 이들이 도입시키는 물질문명을 동일시하며 이들을 함께 부정하려고 했다. 


핑크플로이드나 레드제플린 같은 당시의 록밴드들은 정부와 국가에 대한 복종을 강요하는 기존 교육시스템과 체제에 저항했다. The Wall, Stairway to Heaven이나 Hotel Califoria 같은 은유적인 노래를 통해 어딘가에는 있다고 믿고 싶은 몽환적인 세계로의 도피를 상상했다. 이들은 이렇게 서서히 탈서구, 탈문명을 지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들이 탈서구와 탈문명을 지향하면서 인류학계에서 막 유행하기 시작한 선량한 야만인이라는 컨셉이 뜻하지 않은 우군을 만나게 되었다. 


제3세계에 대한 서구의 지배력을 유지하기 위한 전쟁에 총알받이로 동원되기 싫었던 당시의 젊은 세대들은 이 선량한 야만인이라는 컨셉을 발전시켜 물질문명이 지배하는 폭력적인 서구와 평화로운 정신세계의 동양이라는 이원적인 프레임을 만들어 갔다. 서구의 사고에 뿌리깊게 자리잡은 형이상학적 이원론에서 히피들도 자유롭지는 않았던 것이다. 


이렇게 신비로운 동양의 정신세계라는 프레임이 만들어지자 자연스럽게 히피들은 요가와 불교, 명상과 선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들의 지지에 힘입어 한국에서도 한 때 선풍적으로 유행했던 오쇼 라즈니쉬 같은 명상재벌이 탄생하기도 했다. 


라즈니쉬는 서구의 천박한 물질문명을 피해 정신문명을 숭상하는 인도로 피난 온 서양 젊은이들에게 자신의 내면에 귀를 기울이는 인도의 요가와 명상을 가르쳐서 떼돈을 벌었다. 유명세를 탄 후에는 아예 미국 본토 시장으로 진출한 라즈니쉬는 말년에 롤스로이스 99대 컬렉션을 완성하며 무소유로 일구어 낸 풀소유의 극치를 보여주기도 하였다. 


인도와 더불어 남미의 마추픽추는 이들이 발굴한 무릉도원 중 하나였다. 당시 시점에서 불과 수십 년 전에 세상에 처음 알려진 마추픽추 (1911년에 발굴되었다)의 스토리는 이들이 꿈꾸던 완벽한 이상향에 가까웠다. 


폭력적인 서구 제국주의를 피해 안데스 산맥의 까마득한 고원으로 도피한 잉카제국의 마지막 피난처. 번잡한 산 아래 세계에서는 보이지도 않게 거대한 돌을 쌓아 만든 산꼭대기의 신비한 도피처. 티벳의 포카라와 더불어 페루의 마추픽추는 히피들의 이상적인 도피처로 손색이 없었다. 


곧 이들이 즐겨 듣는 노래에 마추픽추라는 단어가 난무하기 시작했다. 바다 건너 한국에 살던 사람들의 귀에도 중독성 있는 멜로디에 실려온 임팩트 강한 네 글자 단어가 맴돌았다. 마~추 픽추! 하고 말이다. 


마추픽추는 노래로만 불려진 것이 아니었다. 동양의 신비로운 정신세계를 숭상한 나머지 가진 돈을 모두 인도의 구루들에게 갖다 바치고는 인도의 길거리에서 거지꼴로 요가와 명상을 배울 정도로 실행력이 뛰어난 이들이었다. 곧 페루의 마추픽추는 이 신비의 잉카문명 최후의 안식처를 찾아 나선 서양 히피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기 시작했다. 


아무런 관광 인프라도 없던 당시에 마추픽추를 찾아 나선 이들은 처음에는 고생 깨나 했을 것이다. 도시의 건축목적 자체가 산 아래에서 공격은 고사하고 올라가기도, 아니 찾기도 힘들게 만드는 것이었으니까 말이다. 


이들은 난데없이 산 위의 돌무더기를 보겠다고 찾아온 낯선 서양인들에 놀란 현지인들을 가이드로 고용해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배낭을 메고, 침낭을 들고, 또 본국에서 몰래 들고 온 향기나는 풀떼기를 숨겨 가지고 말이다. 


페루의 수도 리마를 거쳐 기차와 버스를 갈아타고 쿠스코에 도착한 히피들은 며칠씩 산을 타고 마추픽추에 올랐다. 이들의 발자취를 따라 쿠스코에서부터 마추픽추까지 도보로 가는 길을 오늘날에는 잉카트레킹이라고 부른다. 


이들은 마추픽추 유적지 사이사이에 텐트를 치고는 기타를 치며 마리화나를 피우다가 먹을 것이 떨어지면 내려왔다. 매일같이 입장인원까지 통제하며 정상에서 숙박은 둘째 치고 화장실도 못 가게 하는 지금에는 상상도 못할 일이다. 


뉴욕 시립대 City University of New York 사학과의 마크 라이스 Mark Rice 교수는 아직 발굴도 다 안 끝난 마추픽추에서 벌어진 이 난장판을 보고 ‘히피들의 침략 Hippie Invasion’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히피들의 대다수가 마추픽추로 간 것은 아니었다. 히피들의 본진은 역시나 요가와 명상의 고장인 인도와 네팔로 향했다. 많은 이들은 심지어 인도까지 육로로 갔다. 


서유럽을 출발해 중앙아시아를 거쳐 인도와 네팔까지 이어지는 이 루트는 ‘히피 트레일 Hippe Trail’이라고 불린다. 불과 며칠이면 갈 수 있는 잉카트레킹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먼 거리이다. 


방콕의 카오산로드가 동남아시아 히피들의 성지가 된 것도 인도에 도착한 히피들이 내친 김에 몇 걸음 더 간 곳이 태국이었기 때문이다. 


태국까지 온 이들 중 일부는 당시 공산국가인 중국과 베트남에 가로막힌 동쪽 대신 남쪽으로 행진을 계속하여 발리에도 히피 문화를 남겼다. 이들이 발리까지 찾아간 이유는 이슬람 국가인 인도네시아에서 발리는 힌두교 문화권으로 요가와 명상이 발달했기 때문이다.


히피가 한 물 간 구시대의 유산으로 전락한 지금에도 방콕과 발리에는 여태 히피 문화가 남아 있다. 마추픽추를 둘러싼 이런 히피 문화 역시 아직까지 쿠스코 일대에 잔존하고 있다. 쿠스코에 남아있는 히피 문화 중 서양 젊은이들을 여전히 마추픽추로 유혹하는 주요한 요소는 바로 마약이다. 


처음 남미를 찾은 68세대들은 안데스 산 속의 흔한 돌무더기에 불과했던 마추픽추에 몰려가면서 그 시절 히피들에게 젖과 꿀이었던 향기나는 풀떼기, 마리화나를 들고 갔다. 


그런데 이 곳에 도착한 이들은 곧 자국에서 비싼 돈 주고 마리화나를 사서 굳이 국경을 여러 번 넘는 위험을 무릅쓰고 페루까지 들고 갈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현지에 가면 더 쎄고 좋은 것이 지천으로 널려 있었다. 


바로 남미 어느 동네를 가나 길거리에 산더미처럼 잎사귀를 쌓아놓고 파는 코카잎에서 추출한 코카인이다.


마약을 애정하는 히피들이 몰려들자 남미의 마약 카르텔들은 미국에 수출하고 남은 코카인을 제 발로 찾아온 고객들에게 직접 소매로 팔기 시작했다. 마크 라이스 교수는 히피들의 침공을 언급하면서 이 때문에 조용한 고대 도시였던 쿠스코가 마약과 범죄로 어지럽혀졌다고 지적한다.


사실 니코틴이나 알코올에 비해 중독성과 해독성이 더 높다고 할 수는 없는 마리화나가 마약목록에 올라간 것은 반전세력들이 즐겨 피우던 마리화나를 단속해서 잡아넣으려는 CIA의 창의성도 한 몫 했다. CIA 입장에서는 대학생들을 전쟁에 반대한다고 잡아넣는 것보다는 마약사범으로 잡아가는 것이 혐의 입증도 쉽고 형기도 더 세게 때릴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한번 마약 리스트에 올라간 마리화나가 최근 다시 합법화되기까지 미국에서만 반세기라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런데 지금이나 당시에나 주변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마리화나라는 손쉬운 경로를 통해 어쨌거나 마약의 세계에 입문한 히피들은 곧 더 쎈 약을 찾아 LSD나 코카인으로 넘어갔다. 기왕 약쟁이 딱지가 붙은 김에 못할 것이 뭐 있느냐는 심리도 거들었을 것이다. 


곧 이들의 음악에 마추픽추 못지않게 마약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비틀즈는 ‘하늘에서 다이아몬드를 들고 있는 루씨’ Lucy in the Sky with Diamond (LSD) 라는 말 같지도 않은 제목으로 대놓고 마약을 찬양하는 노래를 불렀다. 


동시대를 살던 스티브 잡스 역시 히피 시절 명상과 선불교 못지않게 LSD에 심취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LSD는 마약 중에서도 히로뽕보다 한단계 더 센 약물로 분류가 된다.


이렇게 마약을 애정하던 히피들이 남미에 가면 자국의 길거리에 비해 말도 안되게 싼 값에 마약을 즐길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마추픽추는 곧 이들에게 남미로 향하는 하나의 구실로 전락했다.


반세기 넘게 이어진 전쟁에 염증이 난 그 시절의 젊은이들은 마침 같은 시기에 자리잡은 현대문명의 이기들까지 도매금으로 함께 혐오하며 막연히 신비의 유토피아를 찾아나섰다. 


이유나 배경이 중요할까? 수십 년간 계속된 전쟁과 끝없이 등장하는 새로운 기계에 지친 서구의 젊은이들은 그저 현실을 벗어날 위안처가 필요했을 뿐이다. 지금이라면 마추픽추나 인도를 힐링 맛집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그렇게 시작된 마추픽추 열풍은 히피들의 성지였던 이 돌무더기를 전세계 여행객들이 마음에 품은 버킷리스트 최상단에 올려놓았다. 관광객이 몰려들자 페루 정부는 이들을 위해 철도를 깔고 버스 노선을 만들었다. 이제는 이 신비의 요새에 오르는 일이 아주 쉽고 간편해졌다. 어떤 의미에서는 대청봉을 오르기보다 더 쉽다고 해야 할까? 


그렇게 너도나도 오르는 마추픽추 정상에 아주 손쉽게 서고 나자 소년 시절 두근거리던 첫 사랑을 아주 잘못된 장소에서 잘못된 모습으로 만난 기분이 들었다. 그냥 언젠가 한번 꼭 가보고 싶다는 버킷리스트로만 간직한 채 살았으면 어땠을까? 


‘와 아저씨 그렇게 설명하는 거 들으니까 섹시한데요, 뇌가’


‘뇌만? 뇌가 담긴 통은 어떤데요?’


‘그거 꼭 대답해야 되요? 상처받으실 텐데.’


‘그럼 됐어요. 그냥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끝내요.’


‘그래요 마무리는 훈훈하게.’


‘어쩐지, 쿠스코 골목에 요가원이 여기저기 있는 거 보고 신기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거였군요.’


‘발리는 더해요. 힌두교를 믿는 지역이라 요가를 많이 하기도 하지만 알고나서 보면 구석구석에 히피 문화가 죄 남아있어요. 다 기원을 찾아가면 그 때로 거슬러 올라가지요.’


‘그래도 아직 쿠스코에서 마약하는 사람은 못 본 것 같은데.’


‘쿠스코 시내보다는 성스러운 계곡 마을에 짱박혀서도 하고, 요새는 볼리비아로 많이들 넘어갔데요. 워낙 물가가 싼 동네라.’


해리는 얼핏 지나쳐온 라파즈를 생각했다.


‘조지프 캠벨이라고 지금은 돌아가신 신화 학자가 있어요. 그 분이 신비주의와 명상에 대해 쓴 책에서 이런 말을 했지요. ‘요가나 LSD나 모두 내면의 깊은 바다로 뛰어드는 것이다’ 라구요.’


‘왠지 그 분, 둘 다 해보고 하신 말씀 같은데요.’


긴 이야기 끝에 쿠스코로 돌아가는 기차 시간이 가까워졌다. 세 사람은 어둠이 깔린 낯선 마을에서 또 다른 식당을 찾아 나서는 대신 카페에서 샌드위치를 시켜 저녁을 대신했다. 기차에 마주보고 앉은 셋은 말없이 조용히 눈을 감고 있다가 하나 둘 잠이 들었다. 해가 일찍 지는 산간 지방 답게 머리 위와 옆으로 난 창문으로 칠흑 같은 어둠만이 보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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