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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산블라스 언덕 - 성스러운 계곡

‘어머, 악’


혜미가 탄 바이크가 완전히 거꾸로 뒤집혀졌다. 바로 뒤에서 따라가던 해리에게 사고의 순간이 시작부터 그대로 보였다. 


바이크를 타고 비포장 흙길을 따라 일렬로 가던 중에 혜미의 바이크가 앞 바이크의 바퀴 자국을 아주 살짝 벗어나며 오른쪽의 낮은 둔덕으로 방향을 틀었다. 달려오던 속도 때문에 부딪힌 둔덕이 마치 점프대 같은 역할을 하며 혜미의 바이크가 위로 솟구쳤다가 그대로 뒤집혀버린 것이다.


깜짝 놀란 해리는 혜미에게 바이크를 몰았다. 혜미는 바이크에 완전히 깔려 지면과 바이크 사이에 끼어버렸다. 나중에 해리는 그 때 생각만 하면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바이크가 완전히 뒤집히는 바람에 햄버거 사이의 패티처럼 지면-혜미-바이크가 수직으로 포개져 버린 것이다.


역시나 당황한 현지 가이드가 합세해 바이크를 치우고 혜미를 일으켰다. 놀란 혜미는 일어나지 못하고 한참을 앉아서 숨만 고르고 있었다.


‘괜찮아요? 팔다리 한번씩 움직여보세요. 아니 일어나지 말고 앉아서 움직여만 보세요.’


‘괜찮아요. 어디 부러진 거 같지는 않아요.’


‘그래도 모르니까 일어나지 말고 계속 앉아 있어요. 지금은 놀라서 아픈지 모르는 것일 수도 있어요.’


다행히 한참을 앉아서 숨을 고른 혜미는 크게 다친 데 없이 툭툭 털며 일어났다. 아니 허벅지나 엉치가 쑤시긴 했지만 쪽팔림도 있고 무엇보다 여러 명이 투어를 하는데 방해되기 싫다는 생각에 애써 태연한 척 했다.


‘괜찮겠어요? 투어 안 해도 되니까 아프면 말해요. 늦기 전에 병원에 가야지요.’


‘그래요 언니, 우리 꼭 이거 안타도 돼요.’


‘아니에요. 조금 놀란 것 뿐이에요. 어디 다친 데는 없어요. 계속 가요.’


사실 그날 저녁 숙소에 돌아와서 살펴본 혜미의 허벅지와 엉덩이에는 커다랗게 검푸른 멍이 들어 있었다. 하지만 그 정도를 가지고 민폐를 끼칠 수는 없었다. 사고에 대처한 훈련을 수도 없이 받고 마음의 준비를 해온 승무원의 직업정신일지도 몰랐다.


조금 쑤시다고 중도에 포기하기에는 그날 날씨가 너무 좋았다. 사실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웅장해지는 성스러운 계곡은 막상 가보니 그냥 저냥 평범했다. 마추픽추와의 비교는 언감생심이고 파타고니아의 평범한 산길에도 미치지 못하는 곳이었다. 그러니까 이 곳은 쿠스코까지 와서 일정이 비면 잠시 시간을 때우다 가는 코스였다.


하지만 그런 모든 것을 감안하더라도 따사로운 햇살 버프를 받은 안데스 중턱의 초원 위를 바이크를 타고 질주하며 주변 풍경을 감상하는 것은 너무나도 기분 좋은 경험이었다. 


수하는 유투버 답게 바이크 손잡이 위에 고프로를 달고 계속 영상을 찍고 있었다. 카메라만 있으면 혼자서도 잘 노는 수하를 보며 해리는 조금씩 혜미에게 말을 붙였다. 


이제 막 학교를 졸업하고 아직은 학생 느낌을 벗지 못한 수하에 비해 같은 직장인으로 나이 차이가 조금은 덜 나는 혜미가 더 편하게 느껴지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혜미는 그런 해리가 조금 불편했다.


‘이 아저씨가 왜 자꾸 나한테 말을 걸까. 그냥 조용히 풍경이나 감상하면서 갈 것이지.’


평이한 관광 코스이니 이른 아침 시작한 성스러운 계곡 투어는 아직 오후 해가 중천에 남아있는 시간에 종료되었다. 다음 날 새벽같이 마추픽추로 출발해야 하는 세 사람은 이쯤에서 하루가 정리되는 것이 오히려 다행이라 생각하면서 쿠스코 시내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날 하루는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버스가 쿠스코 시내로 접어들자 아침 나절만 해도 평온했던 시내가 완전히 난장판이 되어버린 낯선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불과 며칠이었지만 붐비는 꼴을 본 적이 없던 아르마스 광장 일대가 비옷을 입고 물총을 든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물총 만이 아니었다. 어떤 사람들은 버블을 분사하는 스프레이를 양손에 들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무차별로 뿌려댔다.


‘이게 뭔 상황이래요?’


갑자기 만난 뜻밖의 광경에 얼른 고프로를 꺼내 들고 찍던 수하는 찍긴 찍지만 못내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누구에게랄 것 없이 허공에 대고 질문을 던졌다.


해리와 눈이 마주친 가이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씨익 웃었다.


‘Carnaval 카르나발’


‘카르나발?’


‘카르나발이 뭔데?’


‘몰라 카니발 같은 건가 보지. 이런 축제가 있었어?’


3월의 쿠스코에는 일요일마다 물총을 쏘아 대는 축제가 있다. 남반구의 여름이 지나가는 것을 아쉬워하며 추워지기 전에 마지막 물놀이를 하는 것일까? 리우의 삼바축제나 아르헨티나의 탱고축제처럼 전국구 축제는 아닌지라 이 날이 축제일인지도 모르고 있던 관광객들은 아무 생각없이 거리에 나섰다가 물폭탄을 맞곤 했다. 

이윽고 버스가 아르마스 광장에 한편에 사람들을 내려주었다. 동양인 세 명, 그것도 젊은 여자 두 명이 낀 동양인 무리는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바로 지나가던 청년들과 아이들의 타겟이 되었다.


‘아 짜증나, 머리에 맞았어.’


혜미와 수하는 아주 싫지만은 않은 말투로 소리를 질렀다. 비록 옷과 머리가 좀 젖을지 언정 우연히 마주친 축제를 마냥 싫다고 할 여행자가 있을까? 페루 청년들은 자꾸만 혜미와 수하를 겨냥해 물총을 쏘아 댔다. 


축제라고는 하지만 낯선 인상의 인디오 청년들이 무서운 혜미와 수하는 이들이 물총을 쏠 때는 가만히 있다가 아이들이 버블 스프레이를 뿌리면 꺄약 소리를 지르며 애들을 쫓는 시늉을 했다.


‘그냥 있지만 말고 우리도 반격을 해야지.’


해리가 얼른 근처 좌판에서 물총 세 개를 사와서 하나씩 나누어 주었다.


물총을 하나씩 손에 든 세 사람은 마냥 당할 수만은 없다는 듯 주변을 지나는 사람들에게 마주 쏘아 댔다. 


‘오늘은 옷도 다 젖었는데 그만 들어가서 샤워하고 저녁 때 볼까요?’


‘그래요. 여기 더 있으면 감기들 것 같아요.


‘그럼 숙소 가서 씻고 좀 쉬었다가 분수대에서 봐요, 일곱 시쯤?’


쫄딱 젖은 생쥐 꼴의 세 사람은 그렇게 저녁 때 다시 만나기로 하고 숙소로 돌아갔다. 해리는 한인 민박으로, 혜미와 수하는 각자 묵고 있는 게스트하우스로 향했다.


어둑어둑해질 무렵 다시 만난 세 사람은 저녁메뉴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세비체는 전날 먹었고, 딱히 한식을 먹고 싶다거나 쿠스코에서 꼭 먹어봐야 할 만큼 땡기는 것이 없기는 모두 매한가지였다. 기왕 여행을 왔으니 낯선 음식을 경험삼아 찾아 다니기는 하지만 남미 여행은 적어도 한국사람들에게는 식도락을 위한 여정은 아니었다. 


‘혹시 체험삼아 꾸이 어떠세요?’


분수대에 서서 각자 구글 플레이스와 네이버 블로그를 검색하던 와중에 해리가 색다른 제안을 했다.


‘꾸이? 그게 뭐에요?’


‘이거 한번 보세요. 쿠스코 전통음식이래요.’


해리가 보여준 블로그에는 커다란 쥐 사진이 있었다. 특이점이 있다면 그 큰 쥐가 노릇노릇 잘 익은 상태로 접시 위에 있다는 것이다.


‘어머나, 이게 뭐에요? 쥐 아니에요?’


혜미와 수하 모두 경악스런 표정을 지으며 휴대폰 화면을 들여다 보았다.


‘여기서는 이런 걸 먹는데요? 맛있데요?’


혜미가 영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물었다. 꼭 먹어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면 먹지 말자는 뉘앙스가 강하게 풍겼다.


‘기니피그 라는데 설치류면 쥐랑 같은 종류이긴 하겠네요. 그런데 쿠스코라고 이걸 매일 먹겠어요. 예전에 먹던 전통음식인데 이제는 하나의 별미로 먹나 봐요. 다른 거 찾아봐요, 그럼.’


혜미의 말투를 감지한 해리가 얼른 다른 제안을 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했던 수하가 갑자기 찬성을 외쳤다. 하긴 구독자수와 좋아요에 혈안이 된 유투버에게 꾸이라고 불리는 기니피그를 먹는 영상은 꽤나 구미가 당기는 옵션일 것이다.


‘왜요, 한번 가봐요. 언제 또 이런 걸 먹어보겠어요. 다 경험이죠.’


뜻하지 않게 서포터가 생긴 해리는 타이밍을 놓칠 새라 수하의 호응에 바로 화답을 했다.


‘꾸이만 팔지는 않을 거예요. 꾸이는 말 그대로 경험삼아 하나 시켜보고 다른 거 시켜서 먹으면 되죠.’


두 사람이 이렇게 나오니 혜미도 떫떠름한 표정으로 마지 못해 동의를 했다. 


‘그래요. 뭐 다른 것도 같이 시키면 되겠네요.’


목표물이 생긴 세 사람은 폭풍 검색 끝에 아르마스 광장에서 멀지 않은 페루 전통식당을 찾아냈다. 투누파라는 이름의 이 레스토랑은 상당히 격식을 갖춘 레스토랑으로 보였다. 


아무리 꾸이니 기니피그니 다른 이름으로 포장을 해도 결국은 쥐고기를 먹으러 가는데 식당 분위기까지 토속적이면 비위가 많이 상할 것 같아 고른 곳이다. 내심 기니피그가 내키지 않았던 혜미도 레스토랑의 깔끔한 사진과 다른 여러 메뉴들을 보고 안심하며 두 사람을 따라갔다.


‘와 모자까지 쓰고 나오네요.’


기니피그, 아니 꾸이가 나오자 모두들 난생 처음 보는 광경에 탄성을 질렀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선뜻 포크를 들지는 못했다. 실제로 접시 위에 모습을 드러낸 꾸이는 사진으로 보던 것과는 풍기는 포스부터가 달랐다. 


팔뚝 크기의 거대한 쥐가 통째로 노릇노릇 잘 구워져 접시 위에 누워있었다. 뭉특한 코끝부터 통통한 엉덩이까지 누가 보아도 쥐가 아니라고 할 수 없는 동물이 접시 위에서 세 사람을 맞이했다.  머리에는 알파카 털로 뜬 페루 전통모자를 쓴 채로 말이다. 두 눈을 감고 있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이 낯선 풍경에 세 사람은 모두 포크보다 휴대폰을 먼저 꺼내 들고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더 센세이셔널한 화면을 건지게 된 수하는 아예 고프로를 테이블 위에 설치하고 미래의 구독자들을 향해 신나게 멘트를 날리기 시작했다.  


사진을 다 찍고 난 세 사람은 잠자코 서로를 바라보기만 했다. 말은 안 해도 속으로는 모두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자, 원하던 꾸이가 나왔어. 이제 시식을 해 봐야지? 당신 먼저’


결자해지라고 선뜻 포크를 들지 못하는 두 사람을 보며 꾸이를 먹자고 바람을 잡은 해리가 총대를 매고 포크를 들었다. 마음을 단단히 먹고 포크와 나이프로 큼직한 꾸이를 해체하기 시작했다. 중국 출장 길에 비둘기 구이를 해체한 경험은 있지만 기니피그는 비둘기와는 풍기는 분위기 뿐 아니라 사이즈 부터가 달랐다. 


노릇노릇한 겉껍질을 벗기고 나니 거무튀튀한 속살이 나왔다. 구웠다고는 하지만 겉껍질만 바삭하게 익히고 속살은 촉촉함이 배어 있는 전형적인 겉바속촉 요리법이다. 


문제는 이 속촉이 기니피그의 거무튀튀하게 익은 살색과 어우러져 가뜩이나 없는 식욕을 더 떨어뜨린다는 것이다. 차라리 웰던으로 바싹 구웠으면 조금은 나으련만, 촉촉하게 수분을 머금은 채 쭉쭉 찢어지는 기니피그의 검은 속살을 보니 단백질이 부족해 어쩔 수 없이 식인을 해야 했던 사람들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나라도 이걸 매일 먹느니 그냥 사람을 먹고 말겠다.’


내키지 않는 포크질로 기니피그의 살점을 조금 떼어낸 해리는 체념한 듯 입으로 가져갔다. 그렇다고 입 안에서 우물우물 씹으면서 육즙을 음미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예의상 입에 넣고 조금 우물거리다가 입안에 든 씹다 만 고기덩이를 그대로 꿀꺽 삼켰다.


‘어때요? 먹을 만해요?’


해리의 내키지 않는 포크질과 마뜩찮은 표정을 불안한 눈길로 바라보던 혜미와 수하가 동시에 물었다.

 

‘음…고기에요. 그냥, 그냥 고기에요.’


표정에 걸맞은 뜨뜻미지근한 대답에 가뜩이나 안 돌던 식욕이 더 떨어졌다. 그렇다고 기껏 여기까지 와서는 눈앞에 있는 꾸이를 두고 한입도 안 먹을 수는 없다.


‘한번 먹어볼까요? 이걸 먹어볼 기회가 언제 또 있겠어요.’


‘맞아 언니, 눈앞에 두고 안 먹으면 한국가서 후회해요. 그 때 맛이나 볼 걸 하고.’


두 사람 모두 밀린 조별 과제하는 심정으로 포크를 들고 해리가 반쯤 해체해 놓은 기니피그의 사체 한 점 씩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그 거무튀튀한 살점을 차마 똑바로 보지는 못하고 고개를 옆으로 돌린 채 아주 살짝 벌린 입 안으로 포크를 가져갔다. 


수하는 남자친구와 처음으로 오랄을 하던 때가 생각났다. 그 때도 거무튀튀한 살점을 보며 이걸 꼭 입에 넣어야만 하는 것인지 망설였는데 지금도 비슷한 심정이다.


‘와, 이거는 진짜 경험이네요.’


‘맞아, 경험이네 진짜. 근데 어떤 경험이라고 설명은 못 하겠어’


결국 모두 한 입씩 기니피그를 먹는 의식이 끝나자 다들 허탈하게 웃기 시작했다. 누칼협이라는 말이 어떨 때 쓰라고 만든 말인지 오장육부 구석구석으로 감이 왔다. 머나먼 남미까지 가서 쥐를 먹으라고 누가 칼들고 협박했나.


‘여기서만 할 수 있는 경험이니까, 경험하는 데에 의의를 둬야겠네’


‘맞아요. 이제 평생 어디 가서 나 기니피그 먹어봤다고 말할 수 있어요.’


다행히도 테이블에는 서비스로 내어준 페루 전통주, 치차술이 있었다. 기니피그 살점을 삼킨 세 사람은 모두 소독약으로 입가심하듯이 옥수수로 만든 진한 보랏빛의 치차술을 들고 원샷을 했다.


기니피그 외에도 역시 호기심에 시킨 알파카 스테이크와 샐러드, 파스타가 나왔다. 반도 더 남은 기니피그를 한 쪽으로 밀어 놓은 세 사람은 남은 요리들로 배를 채우기 시작했다.


‘라면 먹고 갈래요?’


레스토랑을 나서며 해리가 두 사람에게 물었다. 식사를 하긴 했는데 다들 속이 좀 헛헛한 느낌이었다. 메인 요리 하나를 건너 뛰고 나니 저녁을 먹고 나오는 길이건만 포만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던 찰나에 라면이라는 반가운 단어가 나오자 두 사람은 솔깃했다.


‘진짜요? 라면 파는 데가 있어요 여기에?’


‘제가 묵는 한인 민박에 부엌이 있어요. 그 층에 묵는 사람이 나 밖에 없어서 괜찮을 거에요.’


‘우와 좋아요. 가요 우리.’


‘그런데 라면이 아마 두개 밖에 없을 거에요. 괜챦아요?’


‘그럼요. 지금 국물 땡겨요.’


‘맞아. 난 국물만 먹어도 돼. 언니 얼른 가요 빨리.’


식당을 나온 세 사람은 쿠스코의 돌길을 따라 5분 정도 떨어진 해리의 숙소로 향했다. 


해리가 묵는 한인 민박은 조금 특이한 구조였다. 1층에는 아침을 제공하는 식당 겸 라운지가 있었고 2층부터 4층까지 방이 있었다. 해리가 묵는 개인실은 2층에 모여 있었다. 2층에는 공용으로 쓰는 넓직한 거실과 부엌, 샤워실 겸 화장실이 있고, 1인실과 2인실로 구성된 개인 룸들이 서너 개 있었다. 3층과 4층은 여럿이 한방을 쓰는 도미토리 공간이었다.


2층에 올라온 혜미와 수하는 다시 탄성을 질렀다. 


‘와 여기를 아저씨 혼자 다 써요?’


‘그러게요. 아무도 안 들어오네요.’


‘좋다. 거실도 넓고.’


두 사람이 소파에 앉아 이것 저것 둘러보는 사이에 해리는 부엌으로 가서 라면물을 올리고 신라면 두 개를 꺼냈다. 마침 그날 아침에 1층 리셉션에서 라면 두개를 사다 놓은 것이 다행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민박에 왔을 때는 밤 10시가 넘어 스태프들은 모두 퇴근한 시간이었다. 


라면 끓일 준비를 마친 해리는 스마트폰으로 음악을 틀었다. 음악 소리를 들은 수하가 바로 신청곡을 요청했다.


‘아저씨, 한국노래 틀어줘요.’


멜론 차트에서 전체 재생을 누른 해리는 찬장에서 큼직한 머그잔을 가져와 스마트폰을 쏙 하고 집어넣었다. 순간 음이 풍성해지면서 거실에 악뮤 수현의 맑은 목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와 어떻게 한 거에요? 갑자기 소리가 좋아졌어요.’


‘이게 도자기 안에 폰을 넣고 음악을 틀면 소리가 흡수가 안되고 안에서 울려요. 그러면 소리가 커지고 울림도 풍성해지지요.’


거실 소파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세 사람은 음악을 들으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어, 저기 물 넘쳐요.’


‘잠깐만, 악….’


세 사람은 냄비의 물이 끓는지도 모르고 수다를 떨고 있었다. 냄비가 넘치는 것을 본 해리가 반사적으로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부엌으로 향하다가 가슴을 부여잡고 쓰러졌다. 


갑작스레 몸을 움직이다가 고산병 증세가 온 것이다. 고산병은 어느정도 적응한 후에도 방심은 금물이다. 뛰거나 순간적으로 몸을 움직이기만 해도 전기에 감전된 것처럼 가슴이 탁 막히면서 몸을 움직일 수가 없게 된다.


‘괜챦아요?’


‘움직이지 마세요, 그냥 누워계세요.’


순간적인 일이지만 죽을 상황은 아니란 것을 직감한 해리는 가슴을 움켜잡고 거실바닥에 누워서 웃기 시작했다. 


‘응, 괜챦아요. 그런데 이거 움직일 수가 없네. 잠시만 나 여기 누워 있을게요.’


‘그래요, 움직이면 가슴 통증이 심해지니까 잠시 쉬고 계세요.’


수하가 얼른 부엌으로 가서 냄비 뚜껑을 열고 라면을 넣었다.


‘나도 쿠스코 처음 온 날 고산병 왔어요. 걷는데 너무 숨이 차고 머리가 띵하더라.’


‘언니, 비니쿤카가 고산병 제대로였지. 말 타고 가면서도 숨이 헐떡거렸쟎아. 


‘맞아, 말 안타고 걸어갔으면 중간에 주저앉아서 산에서 오도가도 못했을 걸?’


잠시 후 구수한 라면냄새와 함께 세 사람은 식탁에 모여앉았다. 해리는 보행기마냥 의자를 잡고 힘겹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래 이거지 이거.’


라면 국물을 한 모금 후루루 들이킨 수하가 신나했다. 식도와 소장에 남아있던 꾸이의 꾸리꾸리한 맛이 얼큰한 라면 국물로 싹 씻겨가는 기분이었다. 


‘아, 소주 생각난다.’


‘소주는 몰라도 이거는 있어요.’


소주 이야기에 해리는 방으로 들어가서 한국에 가져가려고 칠레에서 사온 피스코 병을 들고 나왔다. 남미 여행을 하며 익숙해진 피스코 병을 보자 두 사람은 환호를 질렀다. 순간 해리의 머리 속에 레미의 얼굴이 스쳤다. 이런 것도 데자뷰의 일종일까.


‘그런데 레몬도 탄산수도 없네요.’


‘괜챦아요. 라면 국물에 소주 분위기만 내면 되니까.’


‘잠시만요 레몬 대신에 이거 한번 넣어보죠.’


물잔에 피스코와 생수를 적당히 따른 해리가 코카잎을 꺼내 잔 위에 띄웠다.


‘음, 피스코와 코카라, 우리 한국가서 잡혀가는 거 아니지요?


‘코카 잎을 들고 가는 것은 불법인데 배에 넣고 가는 것은 괜찮다나봐요.’


물론 코카 잎을 씹는다고 해서 코카인 효과를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코카 몇 잎 피스코에 띄우는 것으로 코카인을 대체할 수 있다면 나르코스의 주인공인 파블로프 에스코바가 그렇게 떼돈을 벌지는 못했을 것이다.

라면 냄비를 앞에 놓고 피스코 잔을 기울이다 보니 어느덧 자정이 가까웠다. 세 사람 모두 아쉬운 기색이 역력했지만 이쯤에서 일어나야 했다. 마추픽추에 가려면 내일 새벽 5시에는 각자 숙소에서 출발해야 했다. 두 사람은 들어가서 화장 지우고 새벽에 준비해서 나오려면 서너 시간도 못 잘 판이다.


‘너무 아쉽지만 이제 들어가야겠어요.’


‘맞아, 내일 마추픽추지. 가서 제대로 둘러보려면 빨리 가서 자야겠다.’


‘내일 갔다 제대로 못보면 모레 또 가면 되지. 마추픽추를 한번도 안 가본 사람은 있어도 한번만 가본 사람은 없데요.’


‘에이 말도 안돼. 거길 뭐 하러 두 번을 가요. 고고학자도 아니고.’


해리는 뒷정리를 하려는 두 사람을 뜯어 말리고 현관까지 배웅하고 돌아왔다. 세 명이서 두 개만 끓였던 라면은 반 이상 남아 있었고, 기껏 따른 피스코 잔은 거의 그대로였다. 


라면과 피스코는 그냥 각자 숙소로 돌아가지 않고 함께 더 오래 머물러 있을 핑계였을지 모른다. 세 사람 모두 이렇게 모여 앉아 떠들썩하게 수다 떨고 노는 것이 그리웠던 것이다. 아침보다 조금은 더 친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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