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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산블라스 언덕 - 해가 진 쿠스코

해가 진 쿠스코는 완전히 다른 도시로 변했다. 라파즈 만큼 극적인 변화는 아니지만 안데스의 높은 산봉우리들로 둘러싸인 고산도시 쿠스코의 야경 역시 이 곳을 찾는 이들에게 낮과는 전혀 다른 도시의 모습을 보여준다.


쿠스코의 야경 맛집은 산블라스 광장이 있는 언덕이었다. 아르마스 광장 우측으로 12각돌이 있고 이 곳에서부터 언덕이 이어진다. 라파즈의 평균 고도보다 불과 200 미터 낮은 해발 3,400 미터에 자리잡은 쿠스코는 높은 안데스 산 속의 분지에 형성된 작은 도시였다. 옹달샘처럼 우묵한 도시 한복판에 아르마스 광장과 시내 중심가가 있고, 광장 옆 비탈길을 따라 사람들이 촘촘히 집과 가게를 짓고 살았다. 


분수대에서 다시 만난 세 사람은 12각돌 주변의 상점들을 돌아다니며 구경을 했다. 


쿠스코는 안데스 지역의 토산품들로 유명했다. 이런 기념품을 사기에 가장 좋은 장소는 해안가에 있는 수도 리마가 아니라 고산 지역의 거점 도시인 쿠스코였다. 


쿠스코에서 이런 토산품들의 가격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착했다. 처음에는 알파카 털로 뜬 옷을 보았지만 곧 라마와 알파카 인형의 얼굴이 모두 다르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하나하나 손으로 만든 수공예품이라 라마의 얼굴 생김도, 표정도 모두 조금씩 달랐다. 심지어 인형을 세워놓는 균형감마저 조금씩 달랐다. 


곧 좀 더 잘생기고 예쁜 라마와 알파카를 찾는 쏠쏠한 재미가 더해졌다. 하지만 아직 쿠스코에 머물 날들이 많이 남은 터라 그날은 아이쇼핑으로 마무리하고 이제 어둑어둑 해가 지기 시작한 산블라스 언덕을 오르기 시작했다.


산블라스 언덕은 맛집과 멋집들이 구석구석 숨어 있는 쿠스코의 힙플레이스였다. 구비구비 언덕길 사이에 뜻하지 않은 멋집들이 숨어있는 것이 흡사 서울의 삼청동이나 북촌 같은 느낌을 주는 곳이기도 했다. 이런 분위기에 반해 쿠스코에 눌러 앉은 외국인들이 자신과 비슷한 취향과 눈높이를 가진 외국 관광객들을 위해 오픈한 가게들도 많았다.


이곳이 산블라스 언덕이 아닌 산블라스 거리였다면 허름한 뒷골목에서 갑자기 튀어나오는 힙한 가게를 찾는 재미에 마냥 걸어 다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해발 3,400미터의 쿠스코는 그리 만만한 곳이 아니다. 좁은 분지의 광장 주변을 벗어나자 비탈의 경사가 급속도로 심해지기 시작했다. 조금씩 적응을 해왔다지만 세 사람 모두 행여 고산병이 올새라 조심조심 아기 걸음으로 걸었다. 해리는 산블라스 언덕의 까마득한 계단을 보는 것만으로도 벌써 눈 앞이 어지러운 느낌이 들어 먼저 선수를 쳤다.


‘저녁 어디서 먹을지 한번 찾아볼까요?’


이럴 때에는 구글맵이 요긴하게 쓰인다. 언덕 중간 쯤에 있는 작은 공원을 발견한 세 사람은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쿠스코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벤치에 앉아 주변 음식점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점심으로 가볍게 세비체를 먹은 데다가 갑자기 등산 아닌 등산을 해버리니 뭔가 기름지고 배부른 것이 땡겼다. 


‘버거에 맥주 어때요?’


‘나는 콜.’


‘좋아요. 맥주 갑자기 확 땅긴다.’


구글맵 평점 4.7에 빛나는 버거 집이 바로 인근에 있었다. 허기와 목마름에 발걸음을 재촉한 이들은 곧 언덕 옆 계단 사이에 숨어있는 작은 버거 집을 발견했다.


‘Beers & Burgers라니 이름부터 맘에 들어요’


‘그러게요 기대되네요.’


‘와 여기 알파카 패티도 있어요.’


메뉴판을 얼른 스캔한 혜미가 신기한 것을 발견했다는 듯이 소리를 질렀다.


‘여기 처음 와서 알파카 스테이크를 먹어 보긴 했는데 맛있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근데.’


‘그래요? 그래도 난 무조건 알파카.’


신기한 것을 좋아하는 해리와 혜미는 함께 알파카를 외쳤고, 알파카는 이미 스테이크로 먹어봤다는 수하는 무난하게 비프버거를 시켰다.


비어스 앤 버거스에서 나온 알파카 버거는 크고 아름다웠다. 수하는 역시나 유투버 답게 고프로를 꺼내 레스토랑 안을 한 바퀴 찍은 후에 테이블 한복판에 고프로를 고정시켜 놓고 먹방을 시작했다.


‘잠시면 돼요. 두 분은 안 나오게 해드릴 게요.’


‘나와도 돼요. 아 구독자가 떨어질래나.’


‘잠깐만요 얼른 찍을 게요.’


‘라이브에요?


‘아니에요. 먼저 찍어 놨다가 한국가면 편집해서 올려야지요.’


‘다 찍고 유투브 주소 알려주세요. 구독할께요.’


‘진짜요? 와 감사해요. 구독자가 아직 많지 않아서 한 명 한 명이 소중하답니다.’


해가 지고 몸속으로 알코올이 들어가자 낮 시간에는 밝음과 낯설음으로 봉인되었던 말문이 하나 둘씩 터지기 시작했다. 


연극영화학과를 나온 수하는 원래 배우 지망생이라고 했다. 학교 다닐 때 단편 영화 몇 편에 출연한 적도 있고, 기획사 생활을 잠시 하기도 했다. 


‘이제는 이 길이 내 길이 아니다 싶더라구요.’


짧은 기획사 생활을 뒤로 한 수하는 그렇다고 방송에 대한 꿈을 완전히 접을 수는 없었다. 졸업 후 몇 달 간 고민한 끝에 유투브 채널을 개설한 수하는 주로 패션과 뷰티 상품에 대한 리뷰를 올린다고 했다.


‘제가 제일 잘 아는 분야가 이거잖아요. 옷이랑 화장품.’


연예인을 하고 싶었다는 말에 수하를 찬찬히 다시 보니 확실히 남다른 구석이 조금 있어 보였다. 아주 예쁜 얼굴은 아니지만 누가 보아도 다른 사람과 헷갈리지 않을 묘한 분위기를 풍겼다. 그 분위기가 분수대 앞에서부터 확 띄었던 눈매에서 나오는 것일 수도, 남들과는 조금 다른 턱선에서 오는 것일 수도 있었다. 


‘한번 보면 기억나는 얼굴이라 배우 하면 딱 어울릴 것 같은데요’


해리가 립 서비스에 진심을 담아 멘트를 날렸다. 잠시 망설이던 혜미는 곧 자신이 말레이시아에서 살다 왔음을 털어놓았다.


‘저는 에어 아시아 승무원이에요. 쿠알라룸푸르 베이스로 있는. 지금은 코로나 때문에 한국에 돌아왔다가 여행 나온거에요’


사흘 전 혜미를 만나 이미 알고 있는 수하가 한마디 거들었다.


‘언니, 진짜 멋있어요. 해외취업을 다하고.’


‘언제 돌아갈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일년 휴직이라지만 가봐야 알 것 같아요.’


둘의 대화를 듣던 해리가 갑자기 아는 척을 했다.


‘에어 아시아에요, 아니면 에어 아시아 엑스에요?’


깜짝 놀란 혜미가 되물었다.


‘어머, 어떻게 아세요? 맞아요. 저는 그냥 에어 아시아에요.’


‘회사일로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보니 그렇게 되었네요. 기왕이면 엑스로 가지 그랬어요?’


갑자기 말이 통하는 사람을 만난 혜미는 남들에게는 잘 말하지 않던 지난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통칭해서 에어 아시아라고 부르지만 사실 에어 아시아 그룹에는 여러 개의 자회사가 있다. 에어 아시아 그룹 안에서 에어 아시아는 말레이시아 국내선 만을 담당하는 항공사이고 에어 아시아 엑스라는 회사가 국제선을 담당한다. 물론 한국에서는 그냥 다 에어 아시아라고 부른다. 


‘그러니까요. 저도 처음 리크루팅 공고를 봤을 때는 두 개가 다른 지도 몰랐어요. 가서 보니까 완전 다른 회사더라구요.’


‘그럼 말레이시아 국내선만 타요?’


‘맞아요. 옆에 있는 태국을 한번 못 가봤네요.’


‘먼 데까지 가서 아쉽다. 그럼 엑스로 옮겨 달라고 하지 그랬어요?’


‘저도 시도해 봤는데 안된데요. 퇴사하고 다시 지원하래요.’


‘아 그건 또 좀 그렇네요.’


해리는 예전에 회사일로 동말레이시아에 속한 보르네오 섬에서 위성통신 사업을 한 적이 있었다.


‘한동안 회사일 때문에 KK 자주 갔어요. KL이랑 KK 오갈 때는 주로 말레이항공 타는데 시간대 안 맞으면 에어 아시아도 탔지요.’


‘그럼 KL에서 KK 가다 보면 보이는 작은 섬 아세요?’


‘아, 그 하트 모양 섬이요? 알아요. 매번 보는 건 아니고 좌석 방향이 맞아야 보이는데, 그 섬 가보셨어요?’


‘아니요, 가보지는 못했어요. 무인도라는 데, 아닌가? 저희는 방향은 아는데 일해야 하니까 자주는 못 봐요. 가끔 갤리에서 쉴 타이밍에 지나가면 한 번씩 보곤 해요.’


‘저는 진짜 그런 섬이 있는지도 몰랐는데 그냥 멍하니 창 밖을 보다가 우연히 보고는 깜짝 놀랐어요.’


혜미는 갑자기 혼란스러워졌다. 말레이시아에서나 주로 쓰는 약어들을 자연스럽게 구사하는 해리의 정체가 궁금해진 것이다. 막 물어보려는 찰나에 옆에서 흥미롭게 듣고 있던 수하가 먼저 선수를 쳤다.


‘아니, K-- 뭐라구요? 알아듣게 이야기해요.’


‘아, 미안해요. 잠시 옛날 이야기하다 보니 내가 깜빡했네요.


KK는 코타키나발루고 KL은 쿠알라룸푸르에요. 


그런데 말레이시아 사람들은 아무도 코타키나발루니 쿠알라룸푸르니 이렇게 안 불러요. 

다 KK, KL 이렇게 말하죠.’


‘맞아요. 저도 말레이시아 처음 가서 그것 때문에 엄청 헷갈렸어요. 왜들 그렇게 다 약자로 쓰는지.’


‘혹시 D.O가 뭔지 아세요?


혜미의 말을 받은 해리가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뚱딴지 같은 질문을 던졌다.


‘아니요. 처음 듣는데요. 그건 무슨 말이에요?’


나름 말레이시아에 오래 살았다고 자부하는 혜미도 그런 말은 처음 듣는지 궁금한 표정을 지었다.


‘District Officer, 군수에요. 말레이시아 시골가면 다들 디오 디오 이래요. 

영국식 표현인데 말레이시아가 영국 식민지였쟎아요. 

제가 출장 가서도 정부 사람들 상대를 많이 하다 보니 참 별별 말을 다 배웠네요.’


‘아 몰랐어요 진짜. KL 살면서도 그런 말은 들어볼 일이 없었네요.’


‘그럼 아저씨는 외교관이에요?’


처음 만난 두사람이 척척 호흡이 맞게 나누는 말레이시아 이야기를 나름 흥미롭게 듣고 있던 수하가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잠시 망설이던 해리는 그냥 짧게 끝내기로 했다.


‘그냥 여러분이 다 아는 회사에서 해외투자사업을 해요. 

그러다 보니 말레이시아나 동남아도 다녔고, 미국도 다녔고, 중국도 자주 갔고, 또 남미에 북아프리카까지 돌아다녔네요.’


순간 혜미와 수하의 눈이 둥그렇게 커졌다.


‘진짜요? 승무원보다 더 많이 다니셨겠네요, 그럼.’


‘에이, 그 정도는 아니구요. 멀리 출장을 갈 때면 한 번 가서 한두 달씩 있는 경우도 있어요. 

보르네오 섬에서도 그랬지요.’


혜미는 이제 해리가 어떤 사람인지 조금씩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름이 해리에요? 교포이신가 봐요? 


‘아니요, 한자이름이에요. 海璃라고 바다 해자에 유리구슬 리자를 쓰지요. 

그런데 이 리璃 자 좌우를 바꾸면 떠날 리離가 되요. 바다로 떠나다. 

그래서 한국에 오래 못 있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봐요.’


‘한국 사람 이름이 해리면 되게 특이한 이름인데요.’


‘어머니가 태몽으로 바다에서 큰 구슬을 줍는 꿈을 꾸셨데요.’ 


‘바다에서 나는 구슬이면 진주 아니에요?’


‘맞아요. 딸이면 진주라고 지으려고 하셨데요. 

낳고 보니 아들인데 아들 이름을 진주라고 하기는 좀 그러니까요. 

그래서 영어이름도 Harry라고 써요. 

그런데 이 海璃를 중국 남쪽 어딘가에서는 Helis라고 한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어요. 

진작 알았으면 영어이름도 Helis라고 했을 텐데요. 

해리보다 헬리스가 더 있어 보이지 않아요? 마치 그리스 신처럼.’


자기 이야기만 길어졌다는 것을 퍼뜩 느낀 해리는 얼른 화제를 돌렸다.


‘저는 KL이랑 KK만 가보았는데 말레이시아에서 어디가 제일 좋았어요?


사실 KK는 공항 때문에 들르는 거고 보르네오 섬 내륙이 최종 목적지이긴 했는데 거긴 관광할 만한 곳은 아니었지요.’


‘페낭이요. 페낭 진짜 좋아요.’


신이 나서 남들은 잘 모르는 자신 만의 최애지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으려는 순간, 혜미의 머리 속에 우진의 얼굴이 떠올랐다. 


쿠칭과 페낭, 인천 공항에서 작별한 우진과 얼떨결에 받아들었지만 끼어 본 적도 없고 한국 가면 돌려줘야 할 반지, 혹시나 잃어버릴까 지갑 속에 꼭 넣고 다니느라 귀챦기만 한 그 반지, 그리고 지금 이곳 쿠스코와 낯선 사람들. 갑자기 심각한 표정으로 말이 없어진 혜미를 보고 두 사람은 약간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아, 페낭, 원래 이번 휴가 때 한국에서 친구가 오면 같이 가기로 했는데 휴직 때문에 못 가게 되었어요.’


‘페낭 좋다고 말은 많이 들었어요. 나중에 꼭 가봐야겠네요’


‘언니, 우리 다음에 같이 가요. 언니 말레이시아 복귀하면 놀러갈게요.’


해리와 수하가 살짝 미묘해진 분위기를 수습하면서 자연스레 밖으로 나왔다. 산블라스 언덕에는 이미 어둠이 짙게 깔렸다. 해가 지고 기온이 내려가니 미세먼지 하고는 거리가 먼 안데스 산 속의 청정공기가 폐 속을 깊숙이 찔렀다. 


‘이 동네 공기는 정말 좋은 것 같아요.’


‘쿠스코까지 미세먼지가 침투하면 그 때는 화성가서 살아야지’


‘맞아요. 진짜 미세먼지 너무 싫어.’


세 사람은 가벼운 농담거리를 주고받으며 언덕길을 천천히 걸었다. 산책하기에 더없이 좋은 밤이었다.


‘우리 야경 보러 갈래요?’


‘여기서도 보이는데 더 좋은 데가 있어요?’


‘오기 전에 찾아봤는데 림버스라고 거기가 야경보는 곳이래요.’


유투버 답게 수하는 이미 쿠스코에서 먹방과 멋방을 할 리스트를 머리 속에 넣고 있었다. 버거와 IPA를 배에 넣고 기분이 좋아진 세 사람은 수하가 추천한 림버스를 찾아 구글 맵을 따라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알파카 버거는 그냥 비프 버거와 비슷했다. 따로 말을 안 해줬으면 몰랐을 정도로.


림버스 바는 수하가 미리 검색해서 올 정도로 유명한 곳이었다. 입구에는 길다란 꽃길이 펼쳐져 있었고, 꽃길 위에 조명이 어우러지며 로맨틱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마치 결혼식 장의 꽃길 같았다. 하지만 정작 포인트는 안에 있었다.


‘우와, 이거 정말 제대로 찾아온 것 같은데요.’


바에 들어간 세 사람은 파노라마처럼 길게 펼쳐진 창문 너머로 보이는 쿠스코의 야경을 보고 탄성을 내질렀다. 직원이 자리를 정해주자마자 모두들 메뉴판을 볼 생각도 안하고 바로 테라스로 뛰어나갔다. 명불허전이라고 림버스 바는 말 그대로 야경 맛집이었다. 


산블라스 언덕 높다란 곳에 위치한 이 곳은 주변의 다른 바나 레스토랑에 비해 유독 규모가 컸다. 그리고 그 큰 규모에 걸맞게 쿠스코 시내를 향해 길게 창이 나 있었다. 그러니까 림버스 바는 뷰를 최대한 즐길 수 있게 언덕배기 위에 가로로 길쭉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테라스로 나오자 분지에 만들어진 쿠스코의 모습이 한 눈에 들어왔다. 분지의 우묵한 부분에 해당하는 위치에 아르마스 광장과 주변의 건물들이 보였다. 광장 저 너머로는 또 다른 언덕의 연속이었다. 그러니까 쿠스코 도심을 안데스의 언덕들이 빙 둘러싸고 있는 풍경이다


그렇게 각자 인스타에 올릴 사진들을 잔뜩 찍고는 안으로 들어왔다. 자리를 안내하자마자 손님들이 모두 사라졌지만 직원은 흔히 보는 일인지 표정변화 없이 다시 메뉴판을 들고 왔다.


칵테일을 주문하자 안데스 산처럼 높고 큰 잔과 기묘한 잉카 조각 모양의 잔들이 줄지어 나왔다. 수하는 신이 나서 이 모든 것을 고프로에 담으며 짧게 짧게 멘트를 더했다. 초보 유투버에게는 화면발 뽑을 장소를 제대로 골라 온 것이다. 길다란 테라스에서 보이는 야경 못지 않게 인테리어와 테이블 세팅이 모두 인스타에 최적화된 집이었다. 


수하가 유투브에 올릴 영상에 몰두하는 동안 해리와 혜미는 간간이 끊어지는 짧은 대화를 나누었다. 하루 만에 조금 친해지긴 했지만 아직 단둘이 있을 때까지 편한 사이는 아니었다. 


데킬라라도 한 병 시켜 밤새 놀고 싶은 분위기였지만 다음날 성스러운 계곡 투어가 잡혀 있었다. 그리고 술을 마시고 버스에 쳐 박혀 잘 수도 없었다. 내일은 ATV를 타고 안데스의 비포장도로를 달려야 했다. 그렇게 쿠스코 야경에 대한 약간의 아쉬움을 남긴 채 세 사람은 밖으로 나왔다. 


완전히 어둠으로 뒤덮인 산블라스의 언덕길은 이제 낮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막상 골목길로 나오자 먼 발치에서 야경으로 볼 때는 어둠이 가려주었던 가난과 누추함이 눈에 들어왔다. 라파즈의 케이블카나 림버스의 테라스에서는 볼 수 없던 도시의 민낯이 골목의 계단을 따라 그 속으로 걸어 들어가자 하나 둘씩 적나라한 알몸을 드러낸 것이다. 


멀리 언덕 너머에서 볼 때는 이 모든 것을 따스하게 덮어주었던 가로등은 정작 자신의 발치에 있는 남루함은 더욱 환하게 드러내 보였다. 해리의 눈에는 이 모든 것이 어우러진 산블라스의 골목길이 한 장의 레트로 사진처럼 보였다. 


해가 진 후의 감천마을이나 창신동 골목 같은 느낌을 주는 산블라스 언덕을 눈에 담고 세 사람은 각자의 숙소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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