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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산블라스 언덕 - 태양의 섬, 선량한 야만인

선량한 야만인의 환상

세상에서 가장 높은 수도 라파즈를 빠져나온 해리는 세상에서 가장 높은 호수인 티티카카 호수를 보기 위해 코파카바나로 향했다. 라파즈에서 티티카카 호수는 가까웠다. 


물론 가깝다는 것이 편도로 4시간 정도지만 야간 버스로 이동해야 하는 남미의 다른 도시간 이동에 비하면 가깝다는 것이다. 길이 그다지 좋지는 않고 또 중간에 호수를 건너는 배까지 갈아타야 해서 서울 - 부산 거리 보다는 서울 – 천안 거리를 4시간에 간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래도 굳이 불편하게 밤 버스를 탈 필요 없이 낮에 풍경을 보면서 이동할 수 있어 이동에 부담이 없다. 


세상에서 가장 큰 호수는 아니지만 가장 높은 곳에 있는 것으로 유명한 티티카카호는 미국과 캐나다 사이에 있는 나이아가라 폭포처럼 볼리비아와 페루 양국 국경에 걸쳐 있는 곳이다. 


이 구간을 지나치는 관광객들이 꼭 찾는 호반도시 코파카바나는 볼리비아 쪽의 티티카카 호숫가에 있다. 뭔지는 잘 몰라도 이름부터 꼭 가보고 싶게 만드는 태양의 섬은 코파카바나에서 배를 타고 들어간다.


지하인 듯 지하 아닌 지하 같은 Route 36을 벗어나 드넓은 티티카카 호수를 보자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이 호숫가에서 며칠 쉬면서 심신을 추스른 후에 다시 평범한 관광객 모드를 정착하고 남미 여행의 꽃, 마추픽추를 향해 떠날 것이다.


결과적으로 코파카바나에서 그리 오래 머무르지는 않았다. 호숫가의 한 게스트 하우스에 여장을 푼 해리는 근처 식당을 찾아 티티카카 호에서 잡은 생선 구이로 저녁식사를 하면서 우유니와 라파즈에서 몇 번 들었던 이야기를 구글에 검색해 보았다. 


그런데 기사를 몇 개 찾아 읽고 나니 밥맛이 뚝 떨어졌다. 구글링을 통해 검색한 현지 신문기사에서 확인한 소문의 진상은 이러했다.


태양의 섬에서 한국 관광객이 집단 성폭행을 당하고 잔인하게 살해당한 것이다.


일부 남미 국가에서 중앙정부는 명목상의 정부일 뿐 국토 상당부분에 중앙정부의 행정력이 미치지 못하고 해당 지역에 사는 부족들이 동네 왕 노릇을 하는 곳이 많다. 특히나 태양의 섬이 있는 티티카카 호수 일대는 아예 인근 부족의 자치령처럼 되어 있어 볼리비아 정부에서도 손을 놓은 곳이다. 심지어 경찰도 부족장의 허락없이는 이 지역에 출입을 할 수가 없다. 


이 곳에서 얼마전 큰 사달이 났다. 태양의 섬을 혼자 찾은 한국 여행객이 도착한 첫날 밤에 집단 성폭행을 당하고 살해된 것으로도 모자라 끔찍한 방법으로 사체 훼손까지 당했다. 사체 훼손은 아마 주술적인 이유일 것이라고 추정을 한다.


사실 이런 일이 벌어질 때마다 미온적 태도를 취하는 현지 한국대사관들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자국민 보호에 과연 최선을 다하냐는 비난이다. 하지만 이 사건에 대한 대처는 다른 사건들과 달랐다. 같은 국민 여부를 떠나서 그냥 인간적으로 봐도 이건 너무 했던 것이다. 


결국 한국 대사관이 일년 넘게 볼리비아 정부를 압박해서 범인을 잡았다. 그런데 범인을 모두 잡은 것은 아니고 해당 지역 부족과 타협해서 주범으로 부족장 한 명 만을 잡아갔다. 한국정부 입장에서도 볼리비아 정부가 이 정도까지 했는데 더 이상 몰아붙이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이없는 것이 그렇게 부족장이 잡혀가자 이 태양의 섬에 사는 부족들이 적반하장 격으로 한국인에게 보복을 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주볼리비아 한국 대사관은 이에 대해 태양의 섬에 대한 여행경고를 적색경고 (철수 권고)로 상향했다. 


이런 기사를 이래저래 찾아보다 보니 밥맛이 뚝 떨어졌다. 태양의 섬이 뭔지는 몰라도 일단 이름이 그럴 듯 해서 찾아온 티티카카 호수였다. 그런데 바로 그 태양의 섬에 대해 한국인 철수 권고 조치가 내려졌다. 


물론 다수의 여행객들은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고 여전히 코파카바나에서 배를 타고 태양의 섬을 찾는다. 하지만 그 배경까지 현지 신문 기사를 통해 상세히 알고 나니 도저히 그 곳에 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무섭다기 보다는 비위가 상했다. 


어차피 오늘은 늦었으니 하루 밤만 이 곳에서 묵고 다음 날 바로 떠나기로 마음먹은 해리는 일찌감치 게스트 하우스로 돌아가 잠을 청했다.


코파카바나의 이른 아침은 역시나 호숫가 마을 답게 청명했다. 게스트 하우스의 뻔한 아침식사는 스킵한 해리는 근처 카페를 찾아 오믈렛과 커피로 아침 식사를 했다. 어차피 볼리비아 물가에 밥 한끼 먹어봐야 몇 푼 안 한다. 


평온한 호숫가의 아침이지만 그날은 조금 바빴다. 쿠스코 행 야간 버스도 예약을 해야 하고, 쿠스코의 숙소도 예약을 바꾸어야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코파카바나 일정이 줄어든 만큼 쿠스코에 더 오래 있을 예정이니 함께 마추픽추나 주변 투어를 다닐 동행을 구해야 했다.


카페에 앉아 모바일로 버스 예약부터 마친 해리는 이틀 후부터 예약을 해 놓은 쿠스코 한인 민박에 전화를 했다. 다행히 방은 지금도 비어 있다고 했다.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쿠스코에 가서 보니 당연한 것이었다. 때가 2월 말인지라 방학이 끝난 대학생들과 선생님들이 귀국하면서 해리가 신청한 개인실은 모조리 비어 있었다. 


이제 동행을 구할 차례였다. 남미와 페루 오픈 채팅방에 들어가 찾아보니 이삼 일 후 마추픽추 동행을 구한다는 글이 있었다. 얼른 카톡을 보냈다.


‘마추픽추 동행 구하셨어요?’


‘지금 저까지 두 명 있는데 조인하실래요?’


‘네 좋아요. 같이 가시지요’


‘지금 쿠스코에 계세요?’


‘아니요 코파카바나에 있어요. 오늘 밤에 버스 타고 쿠스코로 갈 거에요’


‘중간에 푸노 안 들리고 바로 쿠스코로 오시나 봐요?’


‘네, 마추픽추까지 보고 이제 귀국해야 해서요’


‘그럼 쿠스코 도착해서 톡주세요. 내일 아침 도착이신가요??’


‘네 맞아요 내일 점심때쯤 보실까요?’


‘네~ 조심해서 오시고 와서 연락주세요~’


이제는 익숙해진 밤버스를 타고 쿠스코로 향했다. 그런데 아까 전화 통화할 때 들은 푸노 이야기가 계속 마음에 걸렸다.


‘태양의 섬을 건너 뛰는데 바로 쿠스코로 가지 말고 푸노나 들렀다 갈 걸 그랬나?’


칠흑 같은 어둠 속을 달리는 버스 안에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 아닌 게 아니라 그 편이 합리적이었다. 푸노 역시 티티카카 호숫가의 마을이지만 볼리비아가 아닌 페루 쪽에 있다. 


아직도 고산 지대의 부족들끼리 돌멩이를 던지며 집단 난투극을 벌이는 것이 연례 행사일 정도로 호전적이고 낙후된 볼리비아에 비하면 페루는 그나마 국가의 틀이 어느 정도는 갖춰진 나라이다. 


가끔 여행 프로그램에도 등장하는 갈대로 엮은 배가 있는 우르스 섬은 코파카바나가 아닌 페루의 푸노 쪽에 있다. 태양의 섬을 건너 뛰었다면 우르스 섬을 가는 것이 정답이었다.


괜히 그 부족인지 뭔지 때문에 기분 잡치는 바람에 앞뒤 안 가리고 쿠스코 행 버스부터 예약한 것이 후회되기도 했다. 하지만 늦었다. 이미 쿠스코로 가는 버스를 타고 있었고, 쿠스코의 숙소 뿐 아니라 투어를 함께 다닐 동행들까지 다 약속을 해 놓은 것이다. 괜히 부아가 났다.


‘별 드러분 야만족들 같으니라고. 지들이 한국사람을 그렇게 죽여 놓고는 범인이 잡히니까 한국 사람한테 보복을 하겠다고?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선량한 야만인의 환상


사실 선량한 야만인 The good savage이라는 프레임은 수 세기에 걸쳐 세상의 다른 부분을 잔인하게 약탈한 유럽인들이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식민지를 독립시켜 주는 과정에서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가공의 이미지였다. 1955년에 나온 레비스트로스의 슬픈 열대나 1963년에 발표된 칼데론의 동명의 책 – 선량한 야만인은 모두 당시의 시대적 맥락을 함께 하고 있다. 


‘물질문명에 빠진 폭력적인 서구’에 대한 자성의 차원에서 ‘자연의 질서에 순응하여 평화롭고 지혜롭게 살아가는 원주민’이라는 대비되는 컨셉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런 시각은 아직도 한국의 많은 여행프로그램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오지의 원시부족을 찾아가 이들의 삶을 한바퀴 둘러본 후 던지는 마지막 멘트는 늘 ‘자연과 공존할 줄 아는 이들의 지혜를 배우고 갑니다’는 식이다. 

아쉽지만 이런 생각은 유럽인들이 자신들의 죄책감을 달래기 위해 만들어낸 환상에 불과하다. 호주의 배우이자 영화감독인 멜 깁슨은 자신이 감독과 제작을 맡은 영화 ‘아포칼립토’에서 이 선량한 야만인이라는 관점에 정면으로 도전했다. 


남미를 배경으로 한‘아포칼립토’는 우리가 잘 아는 잉카나 마야가 아니라 마야문명 치하에서 짐승처럼 사냥당하고 인신공양 제물로 바쳐지던 소규모 부족들에 초점을 맞추었다. 


남미의 고대 문명들은 그게 아즈텍이건, 마야건, 잉카건 간에 인근의 약소 부족들이 볼 때는 그 자체로 하나의 제국주의였다. 늘 억압받고 학살당하던 피지배층에게는 자신들을 신전에 제물로 바치고 심지어 잡아 먹기까지 한 같은 피부의 동족들이나 자신들을 잡아다 광산에 노예로 부린 유럽사람들이나 그저 똑같은 무자비한 정복자일 뿐이었다. 


실제 코르테스가 이끄는 불과 수천 명의 스페인군이 수십만 대군을 보유한 아즈텍 문명을 비교적 손쉽게 정복할 수 있었던 것도 아즈텍의 제국주의 압제에 시달리던 인근 부족들이 스페인에 협조한 덕분이었다.  


이들 중 대표적인 부족이 틀락스칼텍이었다. 틀락스칼텍은 스페인에 적극 협조한 것을 넘어 스페인군이 아즈텍의 수도 테노치티틀란을 함락시킬 때 아예 선봉을 자처했다. 


아즈텍이 멸망할 때 수만 명의 아즈텍 인을 학살한 것도 스페인군이 아니라 다름 아닌 틀락스칼텍이었다. 내심 노예의 수가 줄어드는 것이 아까웠을 스페인도 틀락스칼텍이 벌이는 광란의 학살을 지켜보는 수 밖에 별 도리가 없었다. 


이들이 이런 피의 복수를 단행한 것은 수백 년에 걸쳐 아즈텍 인들에게 억압당한 것을 넘어 문자 그대로 잡아 먹혀 왔기 때문이었다. 


군사적으로 월등히 우세한 아즈텍이 인근의 틀락스칼텍을 굳이 멸망시키지는 않고 목숨만 부지하게 해준 이유는 이들을 일종의 인간목장으로 방목했기 때문이다. 


아즈텍은 주기적으로 틀락스칼텍에 쳐들어가 이들을 산 채로 잡아 인신공양을 했다. 이들의 인신공양은 그 스케일이 남달라 한꺼번에 만 명이 넘는 틀락스칼텍인을 제물로 바쳤다는 기록도 있다. 


그런데 인신 공양은 종교적인 포장일 뿐, 실제로는 단백질이 부족한 중남미 고지대에서 인육을 먹기 위한 핑계였다.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절, 테노치티틀란의 인구만 30 만 명에 달하던 아즈텍 입장에서는 한 번에 만 명은 잡아야 골고루 한 입씩 돌아갈 수 있었다. 


수백 년간 인간 돼지 역할을 해온 틀락스칼텍을 비롯한 주변 부족들은 코르테스의 스페인군이 유카탄 반도를 거쳐 멕시코 고원지대에 들어오자 말 그대로 구세주를 만난 것처럼 눈물을 흘리며 반겼다. 


남미의 원주민들이 정복자 스페인군을 신으로 숭상했다는 일화는 단지 백인을 처음 보는 미개한 야만인들의 무지에 대한 이야기만은 아니다. 


실제 이들에게 스페인 군과 코르테스는 구세주였다. 멕시코에 돼지사육이 시작된 것도 이런 식인 문화가 단백질을 공급할 대형 포유류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을 간파한 코르테스 덕분이었다. 코르테스는 아즈텍에 잡아먹히던 약소부족들에게 스페인에서 가져온 돼지를 제공하여 환심을 사면서 동맹군을 늘려갔다. 


중남미의 식인 문화는 아즈텍 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대형 포유류가 현저히 부족한 안데스 산속의 잉카도, 마야도, 모두 같은 방식으로 인육을 먹어 왔다. 


안데스의 라마나 알파카는 크기는 커보여도 실제로는 털찐 것에 불과해 기껏 잡아봐야 정작 고기는 몇 점 나오지도 않는다. 그러다보니 설치류의 일종인 기니피그까지 잡아먹었지만 만성적인 단백질 부족에 시달리는 이들은 결국 자신보다 약한 부족들을 잡아먹는 방법을 택했다.


선량한 야만인이라는 관점에 익숙한 사람들은 유럽의 제국주의가 신비로운 아즈텍 문명을 파괴했다고 비판한다. 하지만 틀락스칼텍 입장에서는 하늘에서 내려온 유럽의 십자군이 자신들을 아즈텍의 제국주의 압제에서 구원해준 것이었다. 


실제로 스페인의 가장 강력한 동맹자였던 틀락스칼텍은 식민시대에도 거의 완전한 자치를 누리며 아즈텍에게 말살당할 뻔했던 자신들의 문화를 보존해 나갔다. 귀족 작위를 비롯한 기존의 신분체계와 고유 풍습을 그대로 유지한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 스페인이 지금의 미국 남부 지역으로 진출할 때 동행하여 자치 영토를 늘리기까지 했다. 즉, 스스로 작은 식민제국 노릇을 시작했다. 


오히려 이들의 자치는 멕시코가 독립하면서 끝나버렸다. 아즈텍의 후예를 자처하는 지금의 멕시코 정부는 다시 한번 틀락스칼텍을 힘으로 복속시켰다. 멕시코라는 나라 이름 자체가 아즈텍 제국에서 가장 강성한 부족이었던 메시카 Mëxihcah에서 나온 것이다. 


현재 틀락스칼라 주에 살고 있는 틀락스칼텍의 후예들은 더 이상 잡아먹히지만 않을 뿐이지 멕시코 내에서도 2등 시민 취급을 받으며 열악한 인프라 속에서 힘들게 살아가고 있다. 아즈텍의 후예들이 장악한 멕시코의 학교에서는 지금도 틀락스칼텍을 스페인에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라고 가르친다.


제국주의와 폭력적인 물질문명은 유럽이 세계 정복에 나서기 훨씬 이전부터 세계 곳곳에서 자생하고 있었고, 지금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식민지라는 단어는 구시대의 유물같지만 아직도 세상의 많은 지역들이 인근 패권국가의 식민지로 살아가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인도네시아이다. 동티모르를 비롯한 인도네시아의 수많은 섬지역들은 유럽인들이 식민지로 삼기 전까지 각자 독립된 왕국으로 각기 다른 언어와 문화, 종교를 가지고 살았다. 


그런데 가장 세력이 큰 자바섬이 독립전쟁을 위해 연합해 유럽 제국들과 함께 싸운 인근 섬들을 유럽인들이 떠난 후 모두 병합해 인도네시아라는 새로운 제국을 만든 것이다. 인근 섬들의 입장에서 볼 때는 단지 식민제국이 네덜란드에서 인도네시아로 바뀐 것 뿐이다. 


실제 인도네시아 중앙정부는 언젠가는 독립시켜주거나 다른 패권 국가에게 빼앗길 것이 뻔한 종족도 다르고, 언어, 종교, 문화가 모두 다른 이들 섬들에 별다른 산업기반이나 인프라를 건설하지는 않고 천연 자원만 쏙쏙 뽑아먹고 있다. 따라서 이들 섬에서는 수시로 무장봉기가 일어나고 각자의 독립군도 존재한다. 이들의 독립운동은 아직까지 현재진행형이다. 


우리가 휴가 차 많이 찾는 발리에서도 발리 사람들은 스스로를 발리인 Balinese라고 하지 인도네시아인이라고 하지 않는다. 하지만 바깥 세상은 생김새가 비슷한 이들을 식민지와 제국이라고 인식하지 않는다. 


입장 바꿔 놓고 보면 서양인이 볼 때 비슷하게 생긴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로 지배하는 것을 온 세상이 당연하게 받아들이면 우리는 얼마나 복장이 터질까?  


야간 버스는 늘 잠보다 생각을 먼저 불러일으키고 꼬리에 꼬리를 문 생각은 잠을 멀찍이 쫓아버린다.


‘아니면 마추픽추 보고 다시 우르스 섬을 보러 푸노로 돌아가던가.’


애써 그렇게 위안을 삼으며 다시 잠을 청했지만 이게 대안이 될 수 없다는 것은 해리도 잘 알고 있었다. 길고 길었던 휴가도 점점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정 안되면 배째라고 다른 휴가를 더 붙이지 뭐.’


미리 고민할 필요가 뭐 있을까? 속 편하게 마추픽추부터 보고 와서 다시 생각하기로 하고는 티티카카 호수와 야만족을 다 같이 마음에서 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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