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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산블라스 언덕 - 푸콘에서 생긴 일은 푸콘에서만

What happens in Pucon stays in Pucon

다다음날 늦은 오후 해리는 레미와 함께 푸콘의 시외버스 터미널로 갔다. 


푸콘에서 저녁 무렵 버스를 타면 아침 일찍 칠레의 수도 산티아고에 도착한다. 칠레의 버스는 아주 쾌적했다. 한국의 우등버스쯤 되는 프리미엄 버스를 타면 180도 가까이 젖혀지는 널찍한 좌석에 복도 쪽으로 커튼까지 달려 있어 전혀 불편함이 없었다.


‘솔직히 이코노미 타고 한국에서 여기 오는 것보다 이게 더 편하지’


칠레가 버스여행하기에 좋은 점은 도로에도 있다. 남미의 많은 나라들은 고속도로라고 해보았자 길도 좁고 비포장에 구불구불한 구간도 많다. 장거리 버스에서 2층에 탔다가는 멀미하기 딱인지라 한두 번 남미의 도로를 경험해본 여행자들은 장거리 버스를 타면 으레 1층을 택한다. 


그 중에서도 도로 사정이 특히 열악한 볼리비아 같은 나라에서 외지인들이 2층에 탔다가는 죽음이다. 하지만 칠레의 도로는 비교적 포장상태도 좋고 직선화가 잘되어 있어 2층에 앉아 탁 트인 시야를 즐기며 갈 수 있다.


두 사람은 나란히 터미널 벤치에 앉아 버스 시간을 기다렸다. 모두 특별히 별 말은 없었다. 해리는 산티아고에 잠시 들렀다가 지구에서 가장 건조하다는 아타카마 사막으로 갈 예정이다. 아타카마 다음으로는 볼리비아로 넘어가 우유니를 보고 볼리비아의 수도 라파즈에 간다. 


라파즈에서 계획대로만 된다면 다음 목적지는 마추픽추가 있는 페루의 쿠스코였다. 실질적으로는 쿠스코가 여행의 종착지이지만 그 후 귀국 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페루의 수도 리마로 갈 것이다. 


이미 이 일정을 다 알고 있는 레미는 더 이상 언제 어디 가서 뭘 할 것인지 묻지 않았다. 해리도 레미가 푸콘에 얼마나 더 있을 것인지, 리옹에는 언제 돌아갈 것인지, 아니면 푸콘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갈 계획이 있는지 묻지 않았다. 


‘What happens in Pucon stays in Pucon

푸콘에서 생긴 일은 푸콘의 추억으로만’


푸콘 이후 서로의 삶에 끼어드는 일이 없도록 둘은 극도로 말을 아꼈다. 말을 잘못 흘렸다가는 아프리카 흑인 앞에서 이디 아민과 고릴라 이야기를 꺼내는 것만큼 갑분싸가 될 수도 있다. 해리도, 레미도, 헤어지는 마당에 굳이 싸한 분위기를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기다리고 있던 승강장으로 앞유리창에 산티아고라고 쓰인 2층 버스가 들어왔다. 주변 사람들이 우루루 버스로 몰려 들었다. 굳이 일찍 들어가 혼자 앉아 있을 필요는 없는지라 사람들이 먼저 타기를 기다렸다. 잠시 후 캐리어를 짐칸에 싣고 물과 간식, 여권과 귀중품이 든 백팩을 들고 버스 입구에 섰다. 


레미는 아무 말없이 해리를 빤히 쳐다보았다. 두 팔로 레미를 안기 위해 손에 든 백팩을 어깨에 둘러멨다. 둘은 곧 짧은 포옹을 풀고 키스를 시작했다. 지난 사흘간 수없이 나눈 키스였지만 이번이 마지막이 될 것이다. 지나가는 사람들 뿐 아니라 버스 기사와 차장도 서로 다른 두 인종의 커플을 쳐다보았다. 기사와 차장은 직업의식으로 곧 고개를 돌렸지만 재미있다는 듯 계속 바라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잠시 후 레미가 해리의 목을 감싼 팔을 풀었다. 기사와 차장이 다시금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해리가 버스에 탈 시간인 것이다. 정말 마지막으로 레미를 다시 한번 안아주고 작별의 제스처로 가볍게 등을 쓰다듬는 순간, 레미가 해리의 왼쪽 귀를 향해 작게 속삭였다.


‘Je t’aime

사랑해’


깜짝 놀란 해리가 레미를 쳐다보는 순간 레미는 몸을 홱 돌려 저만큼 멀어졌다. 몇 발자국 걸어간 레미는 벤치 뒤에 서서 해리를 돌아보았다. 갑작스러운 일에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당황한 해리는 고개를 들어 멀찍이 서 있는 레미를 쳐다보기만 했다. 순간 차장이 헛기침을 했다.


‘Um, Mr.

엔간히들 하고 그만 타라’


고개를 돌려보니 기사는 이미 운전석에 앉아 출발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입구에 선 차장이 재촉하는 표정으로 해리를 쳐다보았다.


아직 어찌해야 할지 명확히 감이 안 잡힌 해리는 기계적으로 레미를 다시 한번 더 돌아보고는 주춤주춤 버스에 올랐다. 미리 예약한 2층 창가에 자리잡고 창 밖을 내다보았다. 레미는 여전히 벤치 뒤에 그대로 서 있었다. 승객을 모두 태운 버스가 출발하기 위해 후진을 하고는 왼쪽으로 방향을 돌려 나아가기 시작했다. 영화의 한 장면처럼 버스를 따라오지는 않았지만 레미는 해리와 계속 눈을 맞추고 있었다. 


터미널 입구를 빠져나온 버스가 우회전을 하면서 같은 자리에서 미동도 없이 서있는 레미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차창너머 보이는 해리의 얼굴이 터미널의 담장 뒤편으로 들어가는 마지막 순간에 레미는 손을 흔들었다. 아니 손을 들었다고 해리는 생각했다.


장거리 버스를 타면 습관처럼 듣는 음악도 켜지 않고 한참을 창밖만 바라보던 해리는 푸콘 시내를 벗어나 시골길로 접어들 무렵에야 휴대폰을 꺼냈다. 그동안 레미와 쓰던 왓츠앱을 열고는 한참을 망설인 끝에 짧은 두 단어를 적었다.


‘Moi aussi

나도’


잠시 후 해리의 메시지 옆에 레미가 읽었음을 알리는 파란색 체크 표시 두개가 떴다. 하지만 아무런 답이 없었다. 산티아고로 가는 버스 안에서 수시로 폰을 확인했지만 계속 아무 말이 없었다. 남미의 선진국인 칠레이지만 도시 외곽으로 나가면 3G통신마저도 간혹 끊기는 구간이 있다. 다음날 이른 아침 산티아고에 도착할 무렵, 잠에서 깨자마자 다시 폰을 꺼내 확인했지만 역시 아무 말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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