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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산블라스 언덕 - 계속, 푸콘

해리와 레미

해리는 푸콘에서 사흘을 더 있었다. 푸콘은 할 것은 많지 않아도 무료하지는 않은 동네였다. 푸콘의 호숫가에는 특이하게도 검은 모래가 깔려 있다. 주변에 있는 비야리카 화산 때문이다. 호숫가의 검은 모래는 현무암이 갈려 만들어진 모래였다. 


특별히 할 일이 없으면 이 검은 모래사장으로 가서 태닝 베드에 타월을 깔고 누웠다. 이미 발리에서 서핑을 하느라 그을릴 대로 그을린 해리의 몸을 보고 레미는 웃었다. 


선탠이 지루해지면 작디 작은 푸콘 시내를 걸어 다녔다. 프랑스 사람들이 건너와서 게스트 하우스를 오픈할 정도로 유럽인들이 많이 찾는 푸콘이다. 그러다 보니 푸콘 시내의 상점과 레스토랑은 수는 적어도 내용은 알찼다. 


레미가 아침에 후다닥 일을 마치고 나면 낮에는 이 레스토랑들을 하나씩 호핑하며 브런치나 점심을 먹었고, 저녁에는 프렌치 안데스에 돌아와 식사를 차렸다. 매끼 사먹는 비용도 비용이지만 하루 종일 돌아다니면서 뭔가를 할 정도로 푸콘이 번잡한 동네는 아니었다. 


세상 어디를 가나 가장 간편하게 요리할 수 있는 것이 프라이팬과 고기 한덩어리만 있으면 되는 스테이크 아닐까? 더구나 이 곳은 드넓은 평원에서 키운 소를 전세계에 수출하는 남미였다. 이웃 브라질이나 아르헨티나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칠레 사람들 역시 와인과 함께 스테이크에 대한 자부심이 하늘을 찔렀다. 


찰스 다윈은 종의 기원으로 인류 역사에 한 획을 그었지만 사실 종의 기원을 쓰기 전에 먼저 ‘비글호 항해기’라는 책을 통해 세상에 자신의 이름을 알렸다. 비글호는 다윈이 세계 일주를 위해 탔던 배의 이름이다. 


이 책은 종의 기원 같은 진화에 대한 책이 아니라 찰스 다윈이 갓 25살 먹은 선장 피츠로이와 함께3년에 걸쳐 세계를 일주한 기록을 모은 여행기이다. 파타고니아에 있는 ‘불타는 고구마’ 피츠로이 봉우리가 이 선장의 이름을 딴 것이다. 이 여행기에서 다윈은 당시에도 이미 널리 자리잡은 남미의 소고기 문화에 대해 이런 기록을 남겼다. 


남미의 목동으로 알려진 가우초들은 하루에 소를 한 마리씩 잡아먹는다는 것이다. 


이 말도 안되는 소리가 말이 되는 것이 내륙의 초지에서 항구까지 수백 마리의 소떼를 몰고 가다 보면 필연적으로 죽거나 낙오하는 소들이 나온다. 없어진 소들 중 얼마가 이 자연로스 분이었는지 일일이 따지기 힘든 것이다. 게다가 가뜩이나 인력이 부족한 당시 남미에서는 솜씨 좋은 가우초가 갑이었다. 오죽하면 그 넓은 평원에 농사를 지을 사람이 없어서 그냥 소 떼를 풀어서 키웠을까. 


그러니 일손 부족한 남미에서 농장주들이 없어진 소 마리수까지 하나하나 따지고 들다가는 기껏 소를 다 키워 놓고도 항구까지 몰고 갈 사람을 못 구해 유럽으로 수출할 시기를 놓치는 불상사가 생긴다. 그래서 울며 겨자 먹기로 가우초들의 갑질을 못본 척 한 것이었다. 


이렇게 흔한 것이 소고기였으니 우리 조상들처럼 질긴 고기는 다져서 떡갈비로 해먹고 내장은 따로 모아 끓여 먹는 식문화는 나올 수가 없었다. 그 흔한 소고기 중에 가장 맛 좋은 부위만 미디엄 레어로 구워 먹은 식습관이 남미의 고기 문화로 정착했다. 아사도니 슈하스코니 하는 남미식 고기집에 가면 질 좋은 고기 부위만을 골라 미디엄 레어로 구워 슬쩍 소금만 뿌려 먹는다.


19세기의 가우초 만큼은 아니겠지만 오늘날의 칠레에도 마트 옆에 붙은 정육점에 가면 한국과는 비교도 안될 저렴한 가격에 질 좋은 소고기를 살 수 있다. 


해리와 레미도 몇 번 안되는 저녁식사를 스테이크로 해결했다. 내 손으로 잡아왔건 마트에서 사왔건 남의 살을 불에 굽는 것은 세상 어디를 가나 남자들의 퀘스트였다. 해리가 프라이팬에 버터를 올리고 달구는 동안 레미는 냄비에 물을 올리고 파스타를 삶았다. 


파스타 봉지를 뜯는 레미를 보며 해리는 예전 프랑스에서 어학연수를 할 때가 생각나 피식 웃었다. 파스타가 동양에서는 뭔가 있어 보이는 요리일지 모르지만 유럽에서 파스타, 특히 생면이 아닌 수퍼에서 사온 건면을 끓여 역시 수퍼에서 파는 병에 든 소스를 끼얹어 먹는 가정식 파스타는 딱 우리나라 라면의 이미지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러다 보니 어학원에 모인 학생들끼리 돌아가면서 숙소에서 밥을 해먹을 때 해리가 파스타를 해준다고 하면 한국 학생들은 ‘어머, 오빠 멋있어’를 연발했지만 정작 독일이나 이탈리아에서 온 친구들은 시큰둥했다. 


‘야, 파스타는 집에서 밥하기 싫을 때 혼자 끓여먹는거쟎아. 날로 먹을려고 하지 말고 너네 나라 요리해줘.’


이런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레미는 마트에서 사온 건면을 끓이고 병소스를 덜어 약간의 고명 정도를 추가하면서 갖은 생색을 다 내고 있었다. ‘이게 우리 엄마한테 배운 레시피인데 말이지’하면서.


그런 레미를 보고 해리는 그냥 귀엽다는 듯이 웃으며 ‘진짜? 우와’하며 공감의 박수만 쳐댔다. 어차피 끝이 정해진 관계였다. 하루 이틀 남은 시간을 굳이 생면이니 건면이니 트집을 잡다 헤어질 필요는 없다.


프렌치 안데스에는 널찍한 정원이 있다. 스테이크와 파스타로 배를 채운 두 사람은 와인잔을 들고 정원의 풀밭으로 나왔다. 나무로 만든 피크닉 테이블에 앉아 와인잔을 기울이다 하품이 나오면 옆에 있는 비치체어에 누워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프랑스 직원들이 모여 사는 별채에서 왁자지껄한 웃음소리와 함께 음악소리가 들렸다. 대학 시절, 지구 반대편의 안데스 산장에서 월급을 받으며 젊은 나날을 보내는 이들에게는 하루하루가 파티의 연속이었다. 


해리가 오기 전에는 레미도 가끔 별채에서 같은 나라 사람들과 어울려 저녁 시간을 보내곤 했다. 하지만 그날 밤은 아니었다. 해리는 다다음날 떠나기로 되어 있었다. 푸콘에서도 계속 일을 하는 레미와 달리 휴가로 남미에 온 해리의 귀국 날짜는 정해져 있었다. 


굳이 따지고 들자면 이 후 일정인 우유니와 마추픽추를 모두 포기하고 푸콘에서 레미와 함께 있다가 바로 페루의 수도 리마로 가서 귀국 행 비행기를 탈 수도 있었다. 아니면 세상 어느 곳에서나 인터넷과 맥북만 있으면 일을 계속 할 수 있는 레미가 해리와 함께 볼리비아로, 다시 페루로 여행을 함께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다 보면 한국까지도 함께 갈까? 


하지만 두 사람 다 말은 안 해도 느끼고는 있었다. 그 정도까지는 아니란 것을 말이다. 스쳐가는 인연의 종류와 깊이는 사람마다 다양하겠지만 이번 인연은 푸콘의 기억을 조금 더 푸근하게 해주는 정도로 충분하다는 것 쯤은 굳이 입밖에 내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은 비치 체어에 누워 여행자들의 영원한 이야기거리인 그동안 돌아다닌 나라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프랑스에서 나고 자란 레미는 유럽은 구석구석 여행했지만 아시아에 가본 적은 없다. 하지만 한국 만큼은 잘 알고 있었다. 


레미가 한국에 대해 알고 있는 이유는 우습게도 BTS가 아니라 아모레퍼시픽 때문이었다. 레미 뿐만 아니라 친구들도 모두 설화수가 좋다며 쓴다고 했다. 대학시절 유럽 배낭여행을 가면 어머니와 여자친구 선물로 겔랑과 랑콤을 사와야 했던 해리에게는 세상 참 돌고 돈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이야기였다. 


여기서 국뽕을 한 국자쯤 걷어내고 생각해보면 세상 어디서나 유행에 민감한 젊은 층은 늘 새로운 브랜드를 찾는다. 지금 프랑스의 젊은 세대들은 너무 오랫동안 유명해서 식상한 프랑스 화장품 대신 물 건너온 아시아 화장품을 쓰는 것을 쿨하다고 생각한다.  


여기에 K-Pop과 한드의 영향이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사실 엄마가 쓰던 랑콤 대신 쿨내 나는 새 브랜드를 찾던 프랑스 여대생들이 제일 먼저 선택한 브랜드는 아모레퍼시픽이 아니라 일본의 시셰이도였다. 90년대에 이미 샹젤리제 거리에는 시셰이도의 대형 플랙십 스토어가 들어서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조금 흐른 후 여기에 한국의 화장품 브랜드가 가세한 것이다. 


‘설화수라니, 마몽드가 아니길 다행이네’


레미의 이야기를 듣던 해리가 순간 피식하고 웃었다.


한 때 태평양의 주력 브랜드였던 ‘마몽드 Ma Monde’는 프랑스어로 ‘나의 세계’라는 뜻이다. 그런데 사실 이게 완전히 틀린 표현이다. Monde는 세계가 맞지만 영어로 My를 뜻하는 프랑스어 Ma는 여성형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유럽언어에는 모든 명사에 성이 붙는다. 프랑스어에서 Monde는 남성이다. 따라서 여성형 소유격 Ma가 아닌 남성형 소유격 Mon이 붙어 ‘Mon Monde’가 되어야 한다. 마몽드가 아닌 몽몽드가 맞는 말이다. 


‘문법에 안 맞으면 다른 단어를 쓰면 되지 굳이 그렇게까지 해서라도 몽드라는 단어를 써야 했을까?’


순간 해리는 궁금해졌다. 프랑스 사람들은 마몽드를 어떻게 생각할까?


‘Tu connais ma monde?

마몽드라고 알아?”


‘Ma monde? Non. C’est mon monde. Le monde est masculine.

마몽드? 뭐라니. 몽몽드야. 몽드는 남성이거든.’


‘Je sais, mais ma monde est une marque de cosmétiques Corénne.

나도 알아, 근데 마몽드는 한국 화장품 브랜드야’


Vraiment? Pourquoi ma monde? Ca n’a pas de sens. Je ne comprends pas

진짜? 왜 마몽드야? 말이 안되는데? 이해안가네.


‘C’est la même compagnie qui fabrique 설화수 aussi.

그거 설화수 만드는 회사랑 같은 회사야’


오래 안쓰다 보니 짧아진 해리의 프랑스어로 더 이상의 설명은 무리였다. 영어로 설명할까 하다가 어깨를 으쓱하고는 다음 이야기로 넘어갔다.


레미와 친구들이 설화수를 쓴다는 이야기가 해리에게 신선하게 들렸다면 레미는 해리가 들려주는 알제리 이야기를 좋아했다. 해리는 예전 북아프리카 지역에 대한 투자를 이래저래 검토하면서 알제리와 튀니지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 적이 있었다. 


여행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처음에 해리는 전에 가본 프랑스와 유럽 도시들 이야기를 꺼냈다. 하지만 그 곳은 이미 레미가 얼마 전에 다녀온 곳이거나 나고 자란 곳이다. 허긴 프랑스 사람이 한국사람을 붙잡고 가로수길 이야기를 늘어놓으면 처음에나 흥미롭지 언제까지 재미있겠는가? 


하지만 알제리 이야기는 달랐다. 일본이 현해탄 너머 한국을 35년 간 식민지배 했다면, 프랑스는 역시 지중해 바로 건너편에 있는 알제리를 무려 130년 동안이나 식민지배를 했다. 그런데 프랑스 사람들에게 알제리는 무언가 아픈 손가락 같은 곳이어서 가깝기도 하고 말도 통하는 곳이지만 막상 잘 가지는 않는 곳이다.


프랑스는 2차 세계 대전 중에 다급해진 다른 유럽열강들과 마찬가지로 식민지들에게 참전과 군사적 지원을 강요했다. 그리고 종전 후 그 대가로 마지못해 이들의 독립을 승인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사하라 사막에 묻힌 알제리의 천연자원을 쏙쏙 뽑아먹던 프랑스는 그 와중에도 끝까지 알제리를 놓치지 않으려고 발버둥쳤다. 광활한 사하라 사막을 가장 넓게 차지하고 있는 알제리는 천연가스 매장량만 세계 2위인 자원 대국이다. 바로 지중해 건너 파이프만 꽂으면 그 가스나 석유를 본국까지 그대로 들여올 수 있다. 이미 양차 대전을 통해 프랑스는 사하라 사막에 숱하게 빨대를 꽂아 쪽쪽 빨아온 석유와 가스 덕을 크게 본 참이다. 


그러니 프랑스로서는 아프리카의 식민지들을 다 독립시키는 와중에도 알제리 만큼은 모른 척 하고 그냥 킵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2차 세계 대전 당시 독립 하나만을 바라보고 무려 30만 명이 프랑스군으로 입대해 목숨 걸고 싸워 준 알제리로서는 당연히 받아들일 수 없는 생각이었다. 


종전 이후에도 프랑스가 미적거리자 알제리에서 곧장 독립을 요구하는 시위가 일어났다. 프랑스는 학살로 답을 했다.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1945년에만 당시 8백만 알제리 인구의 5%가 넘는 4만 5천명의 알제리인이 죽었다. 가해자인 프랑스의 공식 집계조차 2만 명이었다. 


당연한 수순으로 알제리는 프랑스에 전쟁을 선포했고, 독립을 쟁취하기까지 2백만 명이 넘는 알제리인이 더 죽었다. 당시 알제리 국민 네 명 중 한 명이 프랑스와 싸우다 죽은 것이다. 


프랑스 역시 전사자가 십만 명에 달하자 전쟁 반대 여론이 거세게 일어났다. 2차 세계 대전에서 간신히 살아 돌아온 전우들이 다시 사막 위에서 죽어 나가는 꼴을 본 군부에서 반발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렇게 양쪽 모두 합쳐 수백 만 명이 죽고 나서야 알제리는 비로소 독립에 성공했다. 


자유와 평등, 박애가 어쩌고 하면서 프랑스 혁명 정신에 슬쩍 와인과 치즈를 끼워 전세계에 팔아먹는 프랑스로서는 불과 수십 년 전에 벌어진 알제리 대학살은 마치 독일의 유대인 학살이나 일제의 정신대처럼 쉬쉬 하고 싶은 부끄러운 과거이다. 


반면 인구의 1/4이 몰살당한 알제리는 이 전쟁을 결코 잊지 않고 있다. 


알제리 출신이지만 프랑스 문학의 거장으로 알려진 알베르 까뮈의 작품은 한국에서도 널리 읽혀지고 있지만, 정작 모국인 알제리에서 대문호 까뮈 따위는 잊혀진 이름이다. 심지어 고향인 오랑에 세워진 까뮈의 노벨문학상 기념비는 고향 사람들 손에 의해 진즉에 파괴되었다. 


알제리에서 태어났지만 프랑스에 살며 알제리가 프랑스의 일부로 남기를 바랬던 까뮈가 독립에 반대했기 때문이다. 독립전쟁에서 대학살을 겪은 알제리 사람들에게 까뮈는 이완용 이상도 이하도 아닌 인물일 뿐이다. 수도 알저에 세워진 잔 다르크 동상마저 끌어내려 목을 베는 마당에 알제리 이완용의 기념비가 무사할 리 없었다. 


그렇게 양국의 관계가 험악해지자 알제리에 살던 프랑스 사람들은 전쟁 중에 대거 귀국했다. 이 후에도 알제리에 가본 프랑스 사람은 사업이나 공무상 가본 몇을 제외하고는 그리 많지 않다. 프랑스가 알제리에 대해 쉬쉬한다면, 알제리는 프랑스에 대해 여전히 이를 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레미에게는 지구 반대편에서 온 해리가 한 때 알제리를 제 집처럼 드나들었다는 사실이 마냥 신기하기만 했다.


‘Harry Oppa, tell me the story one more time

해리오빠 그 이야기 또 해줘’


둘이 정원에 앉아 꽁냥거리는 꼴을 본 비키가 맥주병을 들고 밖으로 나오자 레미는 이제 입에 붙기 시작한 오빠라는 단어를 써가며 알제리 이야기를 재촉했다.


‘I mean the “Idi Ain story”

그거, 이디 아민 이야기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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