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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산블라스 언덕 - 롱디, 이별

혜미와 우진

‘아니야, 됐어. 버스 타고 가는 게 더 편해. 오빠, 내가 직업이 공항 다니는 사람인 거 잊었어?’


‘그냥 데려다 주고 싶어서 그래. 앞으로 또 두 달 넘게 못 보는데.’


‘그러던가 그럼, 어쨌든 선물은 기대하지 마. 나 짐 많아.’


혜미가 남미 여행을 떠나기 전날, 두 사람은 우진이 공항에 나오는 문제로 작은 실랑이를 벌였다. 


말레이시아에서 롱디를 하던 여자친구가 피치 못할 사정으로 한국에 들어왔다. 그런데 얼마 있지도 않고 다시 남미로 혼자 여행을 떠나시겠단다. 그러니 공항까지 데려다 주겠다는 마음을 이해 못할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굳이 평일 날 반차까지 내고 공항에 나온다는 것은 조금 미안하고 또 부담스러웠다. 


‘아니, 내가 무슨 남미에 파병 나가는 것도 아니고.’


부담스럽긴 했지만 먼저 부탁을 한 것도 아니고 본인이 굳이 그러시겠다면 혜미 입장에서 편하기는 했다. 

아닌 게 아니라 분당 집에서 공항 버스를 타려면 이매역이나 서현역까지 나가야 했다. 이매역에서 조금 안쪽으로 들어간 혜미네 집에서 공항 버스 타는 곳까지 먼 거리는 아니었지만 문제는 캐리어였다. 두 달이 넘는 여행이라 짐이 만만치 않았다. 


처음에 혜미는 이 모든 짐을 오빠의 50리터짜리 대형 등산 배낭에 넣어보려고 했다. 하지만 50리터짜리 배낭은 세워놓은 크기 만으로도 혜미를 압도했다. 2/3쯤 짐을 채워 넣은 혜미는 시험삼아 배낭을 들어 보았다. 

간신히 배낭을 지고 일어설 수는 있었지만 이걸 등에 매고 남미의 언덕길을 오르내리는 것은 절대 무리라는 것 쯤은 두 번 안해봐도 알 수 있었다. 더구나 아직 채워야 할 짐이 더 있었다. 


혜미는 결국 26인치 캐리어를 선택했다. 26인치 캐리어에 백팩 하나로 짐을 정리했지만 이 캐리어를 끌고 공항버스 타는 곳까지 나가려면 택시를 타야 했다. 기왕 택시를 탄다면 굳이 가까운 이매역으로 가는 것보다는 조금 멀어도 공항 버스 노선이 여럿 있는 서현역으로 가는 것이 정답이다. 두 곳 모두 너무 가까운 거리인지라 차라리 모범택시를 부를까 고민하던 차에 우진이 공항까지 라이드를 자청하고 나선 것이다.

 

혜미가 한국에 돌아온다고 했을 때 우진은 혜미의 생각보다 더 좋아했다. 처음 에어 아시아 승무원으로 말레이시아에 갈 때만 해도 이렇게까지 얼굴 보기 힘들 줄은 몰랐던 것이다.


한국을 떠나기 전 혜미는 에어 아시아는 한국에도 취항하니까 자기는 아마 한 달에 최소한 한두 번은 한국에 올 거라고 했다. 원하면 매주 오는 것도 가능하겠지만 다른 곳도 가봐야 되니 ‘한국은 한달에 한 번만 올거야’라는 말을 남기고 말레이시아로 떠났다.


그리고 며칠 후에, 혜미는 우진에게 보이스톡을 걸어 말레이시아 국내선만 취항하는 에어 아시아와 장거리 국제선을 전담하는 에어 아시아 엑스의 차이를 울먹이는 목소리로 설명해 주었다. 


혜미가 취업한 곳은 국내선을 담당하는 에어 아시아였다. 에어 아시아와 에어아시아 엑스는 삼성전자와 삼성전기가 다른 회사인 것처럼 같은 그룹사에 이름도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회사였다. 


이제 혜미와 우진은 삼 개월에 한 번 얼굴을 보는 사이가 되었다. 일 년에 두 번은 혜미가 한국에 왔고 두 번은 우진이 말레이시아로 갔다. 


혜미가 한국에 올 때는 온전히 우진만 만나고 갈 수는 없었다. 두 번 중 한 번은 주로 설이나 추석 같은 명절을 끼고 오다 보니 친척집에 인사도 다녀야 했다. 또 해외취업에 성공한 혜미가 한국에 온다는 소식을 들은 친구들도 다 그룹 별로 얼굴보고 가라고 성화였다. 혜미가 한국에 올 때면 우진과는 잠깐 짬을 내 1박으로 짧은 여행을 가는 것과 몇 번 만나는 것이 다였다.


다만 우진이 말레이시아로 갈 때는 혜미가 온전히 우진 만을 위해 모든 시간을 비워 두었다. 패턴은 비슷했다. 쿠알라룸푸르에 도착해 하루 정도를 KLCC 주변 호텔에 묵는다. 


혜미가 사는 집에도 가 보았지만 룸메들과 같이 사는 곳이라 함께 묵을 수는 없었다. 단지내 게스트 룸에 지내는 방법도 있지만 혜미가 사는 아파트는 시내 보다는 공항에 가까운 곳이라 굳이 짧은 휴가 중에 그 곳에서 시간을 보낼 필요는 없었다. 


우진은 일주일 휴가를 내고 와서는 하루 이틀 정도만 쿠알라룸푸르에서 지냈다. 그간 혜미가 뚫어 놓은 호숫가의 식당과 수끼집, 파빌리온과 마사지 샵, 야시장을 순례하고는 두 사람은 곧바로 에어 아시아를 타고 주변의 다른 도시로 여행을 떠났다. 


제일 먼저 가까운 말라카에 다녀온 두 사람은 곧 말레이시아 안에서 점점 더 먼 곳으로 행선지를 늘려 갔다. 처음 여행에서 쿠알라룸푸르 일대를 샅샅이 훑고 난 우진은 이제 이 곳에 오래 머무를 이유가 없어졌다. 말레이시아 안에서도 에어 아시아 국내선을 타고 가볼만한 곳이 너무 많았다. 


자연스레 우진에게 쿠알라룸푸르는 혜미를 만나 인근 다른 지역으로 여행을 떠나는 경유지가 되었다. 두 사람은 그렇게 말라카를 필두로 랑카위, 조호바루와 싱가포르, 인도네시아의 발리를 여행했다. 마지막으로 다녀온 곳은 쿠칭이었다. 


우진은 특히나 쿠칭을 좋아했다. 한국사람에게는 조금 낯선 도시인 쿠칭은 말레이시아에서도 오지에 속하는 동말레이시아에 있는 사라왁주의 주도였다.


쿠알라룸푸르가 있는 말레이 반도는 서말레이시아, 사라왁이 있는 보르네오 섬의 말레이시아 영토는 동말레이시아라고 부른다. 혜미는 참을성을 가지고 동말레이시아와 서말레이시아의 차이를 간혹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도 헷갈려하는 우진에게 설명을 해주었다. 


원래 혜미는 동말레이시아에 있는 KK, 코타키나발루를 가자고 했다. 혜미가 카톡에 처음 KK라는 말을 썼을 때 우진은 KK가 말레이시아에서 쓰는 ㅋㅋ이라고 생각했다. 그게 말레이시아에서 흔히 쓰는 코타키나발루의 약자일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혜미에게 보이스톡으로 동말레이시아에 대한 설명을 듣고 난 우진은 코타키나발루 보다는 사라왁이라는 곳에 더 끌렸다. 


동말레이시아는 다시 사라왁과 사바라는 두 개의 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 사바 주에 있는 코타키나발루는 한국인들도 많이 가는 휴양지였다. 매일 같이 직장인들 퇴근 시간에 맞춘 직항편도 있어서 주말을 끼면 하루만 휴가를 내고 언제든지 다녀올 수 있는 곳이다. 이런 곳을 굳이 말레이시아에서 취업한 여자친구와 국내선을 갈아 타면서까지 갈 필요가 있을까?


반면 같은 동말레이시아 내에서도 사라왁 주는 코타키나발루가 있는 사바 주에 비해 관광객의 발길이 비교적 덜한 곳이었다. 그래서 쿠칭은 우진이 평소 생각하던 열대 낙원의 모습과 아주아주 조금은 비슷했다. 


세상에 때가 묻지 않은 곳이 어디 있을까만 그나마 외국 관광객이 비교적 뜸하게 찾는 사라왁은 수많은 관광객을 상대하는 전형적인 동남아시아 휴양지의 모습인 코타키나발루와는 다르게 우리가 간혹 꿈꾸는 때묻지 않은 열대 섬나라의 모습을 일부라도 간직하고 있었다. 


‘쿠칭 가면 뭐해?’


‘낚시!’


쿠칭까지 가서 뭐하고 놀면 잘 놀았다고 소문이 날까 하는 우진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혜미는 바로 낚시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사실 혜미도 쿠칭에서 낚시를 해본 적은 없다. 쿠칭에 수도 없이 가보았지만 한 번도 낚시는 커녕 주변을 제대로 둘러본 적도 없었다. 


쿠알라룸푸르에서 쿠칭은 퀵턴, 그러니까 승무원 뿐만 아니라 기장도 비행기에서 내리지 않고 타고 간 비행기 그대로 다시 출발지로 돌아오는 단거리 노선이었다. 물론 잠깐 내리기는 한다. 기내 청소를 할 동안만 말이다.

쿠칭에서 보내는 사흘이 우진에게는 마치 무릉도원에서 누리는 신선 놀음 같이 느껴졌다. 관광객을 태우는 낚시배도, 바코라는 국립공원도, 도처에 있는 로컬 식당들도 모두 휴양지라고 하기에는 조금 어설펐지만 혜미와 함께 말레이시아의 유명 관광지를 섭렵한 우진에게는 이 편이 더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나중에 은퇴하고 여기서 살아도 좋겠다.’


쿠칭의 노천 해산물 식당에서 타이거 맥주를 곁들여 타이거 새우를 우적우적 씹어 먹던 우진이 뜬금없는 말을 진지한 표정으로 던졌다. 


판교에서 게임 디자이너로 일하는 우진은 다른 많은 파이어족들처럼 뚜렷한 계획은 없어도 막연히 조기 은퇴를 꿈꾸곤 했다. 서울에서 조기 은퇴를 하려면 큰 돈이 필요하지만 이런 곳이라면 조금만 더 모으면 가능할 것 같았다. 


사실 누구나 이름 들어본 직장에서 업계 경력이 있으니 큰 욕심만 버린다면 얼마든지 쿠칭 같은 곳에서 원격으로 일하는 프리랜서로 생활비 정도는 벌면서 살 수도 있을 것이다. 실제 동남아시아 각 섬들에는 이미 그렇게 살고 있는 유럽이나 호주사람들이 많이 있다.


물론 이 행복한 시나리오는 2018년에 2천 만원 넘게 주고 샀던 비트코인이 본전치기는 해야 가능한 일이었다. 우진이 2천 만원대에 샀던 비트코인은 혜미와 함께 쿠칭을 찾은 2019년 여름이 되어서야 간신히 천 만원 대로 올라왔다. 그나마 얼마 전 오백 만원까지 빠졌을 때 팔지 않고 버틴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이 심심한 곳에서? 여기가 좋아?’


‘그냥 평온해. 사람 사는 곳 같아.’


‘그럼 오빠는 여기서 무병장수하세요. 난 그놈의 비트코인이 오빠 말 대로 일 억 찍으면 바로 은퇴하고 서울에서 늙어 죽을거야.’


말레이시아에서 승무원 생활을 시작한지 불과 일년 만에 혜미도 우진의 성화에 못 이겨 비트코인 투자를 시작했다. 항공운항과를 나온 혜미가 볼 때 산업디자인학과를 나와 IT 기업에 다니는 우진은 자기 주변에서 가장 컴퓨터에 능통한 전문가였다. 


당시 에어 아시아 승무원 2년 차가 비트코인에 투자할 수 있는 돈이 고작 천만 원 정도였던 것이 다행이었다.

처음에 혜미는 천 만원을 주고 산 0.5 비트코인이 바로 천 이백 만원이 되는 것을 보고는 새삼 고국에 두고 온 남자 친구에 대한 애틋한 사랑과 그리움이 진해지는 것을 느꼈다. 지난 일년 간 이국 땅, 아니 이국 하늘에서 고생하며 모은 천 만원이 순식간에 2백 오십 만원이 되는 것을 보았을 때는 비트코인과 함께 남자 친구도 손절해 버릴까 하는 고민을 진지하게 했지만 말이다. 


처음 와 본 쿠칭을 지나치게 애정하는 우진을 보며 혜미는 다음 여행지로 페낭을 떠올렸다. 인도양의 에메랄드라는 페낭, 실제로 가보면 조금은 오래 된, 철지난 왕관에 박혀있는 식민시대의 에메랄드 같은 느낌이 들지만 쿠칭을 좋아하는 남자라면 페낭도 좋아할 것 같았다.


쿠칭의 노천식당에서 혜미에게 페낭 이야기를 들은 우진은 역시나 좋아했다. 이번 휴가가 끝나기도 전에 다음 휴가지를 상상하며 한껏 들뜬 이 남자를 보며 혜미는 속으로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이 사람은 내가 말레이시아에 계속 있기를 바라는 것일까?’


우진의 진짜 속마음이야 알 바 없이 어쨌든 혜미는 이제 말레이시아를 떠나 한국으로 돌아왔다. 적어도 일 년 간은 다시 갈 일이 없을 것이다.


판교에서 오전 근무를 마친 우진은 혜미를 태우기 위해 바로 분당으로 넘어왔다. 


‘점심은 먹었어?’


‘어 회사에서 나오기 전에 샌드위치 하나 집어먹고 나왔어. 난 배 안 고파. 점심 먹었어?’


‘아침 늦게 먹어서 괜찮아. 공항 들어가면 라운지에서 뭐 핑거푸드라도 조금 집어먹을 거야.’


혹시 몰라 시간을 넉넉하게 잡고 나왔지만 우진은 특별히 점심을 먹으러 어디 들르거나 하지 않고 바로 동판교 IC로 나와 제2경인고속도로를 탔다. 판교에서 인천공항까지 한번에 이어지는 고속도로에 들어선 우진은 2차선으로 주행하며 테슬라3의 오토 파일럿을 켰다. 


시간도 넉넉한데 굳이 급하게 갈 필요는 없다. 오늘이 지나면 앞으로 최소한 두 달 간은 둘이서 이렇게 길게 이야기할 시간이 또 없을 것이다.


혜미가 남미를 가려는 데에 특별한 이유는 없다. 


‘그냥 좀 먼 데를 가보고 싶었어.’


우진도 그 기분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분당에서 강남역까지 승무원 학원을 다니며 그렇게 준비를 했건만 혜미는 대한항공과 아시아나에서 잇달아 고배를 마셨다. 승무원의 꿈을 포기할 수 없어 결국 대안으로 택한 곳이 에어 아시아였다. 


카타르 항공이나 에티하드 같은 곳도 외국인 승무원을 뽑지만 중동은 심리적으로나 물리적으로나 너무 멀었다. 물론 에어 아시아마저 떨어졌다면 지금쯤 아마 도하나 아부다비에 살고 있을지도 몰랐다. 


직장 때문에 가족이나 친구들과 헤어지는 것은 슬픈 일이지만 대신 해외 취업이라는 타이틀을 마음의 위안으로 삼았다. 그렇게 전세계를 누비는 글로벌 항공사 승무원의 꿈을 안고 타향으로 떠났건만 정작 3년 넘게 말레이시아 국내선만 죽어라고 타다가 한국으로 돌아온 것이다. 


혜미가 선택한 먼 곳은 남미였다. 유럽도 있지만 겨울에는 우리와 같은 북반구인 유럽보다는 계절이 반대인 남미가 더 나은 선택이다. 예상치 못했던 강제 휴직이지만 직장생활을 하면서 언제 또 이렇게 길게 여행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질지 몰랐다. 이럴 때는 가장 멀리, 또 최대한 길게 여행을 해보는 것이 누가 보아도 당연한 선택이었다.


‘다녀와서는? 계획은 있어?’


‘아직 잘 모르겠어. 일단 휴직이 일년이래. 그런데 그 일년 동안 마냥 놀 수도 없고.’


‘취업하려고?’


‘글쎄, 그냥 일반직장에 취업해서 내가 잘 다닐 수 있을까?’


아닌 게 아니라 혜미도 귀국 행 비행기 안에서부터 걱정이 태산이었다. 일 년 휴직이라지만 그게 일 년으로 끝날 지 아니면 상황이 나빠져서 더 연장이 될지는 아무도 몰랐다. 일 년이 지난 후에 정상운항이 된다고 해도 만약 노선을 줄인다면? 피치못해 구조조정을 한다면 이래 저래 비용이 더 드는 외국인 승무원부터 줄일 것은 누가 보아도 뻔한 일이었다. 


그럼 한국에서 취업을 할까? 비록 처음의 기대와는 달랐지만 그래도 혜미는 글로벌 항공사의 승무원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살았다. 대한항공이나 아시아나에 다니는 친구들도 적어도 말로는 선후배 군기 없는 에어 아시아가 부럽다며 립 서비스를 해주기도 했다. 


하지만 한국에서 혜미의 자부심을 충족시킬 만한 직장에 들어갈 수 있을까? 솔직히 잘 다닐 자신이 없다기 보다는 들어갈 자신이 없었다. 


처음에는 승무원 학원에 강사로 나가볼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항공사들이 있던 승무원들도 휴직을 시키는 마당에 새로 승무원을 뽑을 리가 없었다. 강남역과 분당 일대에 산재한 승무원 학원들은 모두 개점휴업 상태가 되었다. 


‘일단은 여행 좀 하면서 이거 저거 생각을 정리하고 올 거야.’


분당에서 인천공항까지 가는 동안 혜미는 우진에게 이런 자신의 속마음을 다 털어놓았다. 솔직히 잘 모르겠다고. 큰 돈 버는 직업은 아니지만 그래도 해외생활도 즐기고 좋은 경험한다는 자부심도 가지고 살았는데 한국에서 내가 이만한 직장을 다시 잡을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고. 그런데 지금 모른다고 앞으로도 계속 모르지는 않을 테니 여행하면서 생각을 조금 더 정리해 보겠다고 털어놓았다. 


우진은 잠자코 혜미의 말을 들어주었다. 간혹 맞장구를 치거나 질문을 하기도 했지만 대개 우진은 듣는 쪽이었다.


‘내가 이 오빠를 좋아하는 이유 중에 이게 두 번째는 되지.’


잠자코 운전에 열중하며, 아니 운전은 테슬라가 알아서 하고 있으니 혜미의 이야기에 열중하면서도 딱히 자신의 의견을 말하거나 충고를 하지는 않고 고개만 끄덕여 주는 우진을 보며 혜미는 생각했다. 


한 시간 가까이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해 자신의 입으로 설명을 하다 보니 혜미의 머리 속도 조금씩 정리가 되는 느낌이었다.


‘머리가 이렇게 빨리 정리되는데 그냥 남미 가지 말고 이대로 전국일주나 할까?’


속으로 막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찰나에 우진이 갑자기 쑤욱 하고 들어왔다.


‘집에서 결혼하라고는 안 해?’


‘결혼? 무슨, 요새 벌써 결혼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아직 멀었지.’


말은 이렇게 하면서도 혜미는 속으로 이미 여러 번 해본 계산을 다시 한번 하고 있었다. 


정말로 일년만 휴직을 한다면 내년에는 말레이시아에 돌아갈테고, 그때 혜미는 스물 아홉 살이 된다. 그리고 다시 처음 말레이시아에 갔을 때부터 지금까지 만큼의 시간이 흐르면, 그땐 몇살이지? 


이런 생각이 들자 기껏 정리가 되려던 머리 속이 갑자기 다시 복잡해지면서 짜증이 났다.


‘이 오빠 좋아하는 이유 중에 이걸 세번째 정도로 내려야겠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혜미는 역시 남미 여행을 떠나기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건 우진과 드라이브를 하면서 나눌 이야기가 아니었다. 


안데스 산속에서 세상 각지에서 온 사람들과 어울려 트레킹을 하고는 밤에 데킬라 한잔 원샷을 하다 보면 엉클어진 머리 속도 서서히 정돈이 될 것이다. 지금은 혼자 훌쩍 여행을 떠날 시점이다.


어느덧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자연스럽게 제1 터미널로 향하는 우진을 보고, 아니 지 멋대로 1 터미널로 가는 테슬라를 보며 혜미가 우진에게 말했다.


‘오빠, 2 터미널, 나 아에로 타고 가.’


‘아에로? 그거 또 말레이시아말이야?’


‘참나, 아에로 멕시코, 남미 가는 거 멕시코에서 환승이야.’


한 시간 넘게 테슬라에게 운전을 맡긴 우진은 이제 직접 운전하기 시작했다. 제2 터미널은 1 터미널을 지나고도 허허벌판 위를 한참 더 달려야 나온다. 


2 터미널에 도착한 우진은 지하로 내려가서 발레파킹을 맡기고는 차에서 내렸다. 직원이 꺼내 준 캐리어를 받아 든 우진은 잠자코 터미널 청사로 향했다. 백팩을 맨 혜미도 빠르게 따라가서는 팔짱을 꼈다.


‘오빠, 배 안 고파?’


‘배고파? 밥 먹고 들어 갈래?’


‘어, 갑자기 한식이 먹고 싶어졌어. 얼른 짐 부치고 얼큰한 거 먹으러 가자.’


아에로 멕시코를 찾아 탑승 수속을 마친 두 사람은 다시 지하로 내려가 한식집으로 향했다. 혜미는 해물 순두부를 시켜서 국물부터 한 숟가락 뜨고는 우진을 바라보았다.


‘아우, 이거지 이거, 남미 한식당에서도 이 맛이 나올까?’


‘뭐, 요새는 재료 공급이나 배송이 잘되니까 왠만한 한인타운 가면 다 비슷할 거야. 남미는 안 가봤지만.’


배가 살짝 고파진 것도, 한식이 먹고 싶은 것도 사실이지만 그보다는 우진을 그냥 보내기가 미안했다. 공항까지 오는 동안 별 말없이 자신의 말을 찬찬히 들어주는 우진을 보며 혜미는 미안한 마음과 함께 고마움을 동시에 느꼈다. 


남미 여행 이야기를 처음 꺼냈을 때 우진은 자기도 휴가를 낼테니 같이 가자고 했다. 하지만 멀쩡한 직장인이 그럴싸한 핑계 없이 한 달씩 휴가를 내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 쯤은 애초에 말을 꺼낸 본인도 잘 알고 있었다. 


우진이 휴가를 낼 수 있는 한도는 기껏해야 열흘에서 2주가 최대였다. 두 사람이 머리를 맞대고 브라질에서 출발해 아르헨티나와 칠레를 거쳐 북상하는 루트를 아무리 짜보아도 동선이 나오지 않았다. 반대 루트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예상대로 혜미 혼자 떠나게 되었지만 그래도 우진은 최대한 혜미와 일정을 맞추어 보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였다. 어차피 일찍 들어가봐야 라운지에 혼자 앉아 있을 텐데 굳이 긴 이별을 앞두고 그런 남자친구를 서둘러서 보낼 필요는 없었다.


지하 식당가에서 식사를 마친 두 사람은 출국장이 있는 터미널 3 층으로 다시 올라갔다. 보딩패스는 아까 받았으니 이제 검색대로 바로 가서 떠나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혜미는 자신의 손을 잡고 걷는 우진이 자꾸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것을 알아차렸다.


‘오빠, 뭐 찾아?’


‘어? 아니’


‘나 더 살 거 없어. 그냥 이제 바로 가면 돼.’


‘응, 그래, 알았어.’


우진은 혜미와 말을 하면서도 계속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피고 있었다. 혜미도 뭐가 있나 하면서 같이 둘러보았다. 


평범한 공항 풍경이었다. 항공사별 카운터를 지나 안쪽에 보안 검색대로 들어가는 출입문이 보였다. 


코로나라고 하면 사람들이 맥주만 떠올리던 2020년 1월의 인천공항 출국장은 연초부터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로 붐볐다. 검색대로 들어가는 입구에 벌써 줄이 길게 늘어서 있는 것이 보였다. 생각보다 줄이 긴 것을 확인한 혜미는 마음이 급해졌다. 


‘오빠, 줄이 벌써 기네, 나 갈게’


순간 우진의 눈에 공항 청사 한복판에 전시된 자동차가 보였다. 우진이 볼 때는 그 곳이 그나마 나아 보였다. 검색대 입구 앞은 그냥 돗대기 시장같았다.


‘혜미야, 잠깐 저기 차 좀 보고 가자.’


‘아니, 갑자기 무슨 차, 나 빨리 가야 돼.’


혜미는 뜬금없는 말에 어이없다는 듯이 짜증을 냈다. 그런 혜미의 손을 끌고 우진은 제네시스 GV80이 전시된 곳으로 향했다. 이 와중에 무슨 차 구경이냐는 듯 황당한 표정으로 우진을 쳐다보는 혜미의 눈에 GV80을 등지고 서서 한쪽 무릎을 꿇는 우진의 모습이 보였다. 뜻하지 않은 상황에 어이가 없다기보다 놀란 혜미는 벌어진 입을 두 손으로 가리며 우진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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