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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산블라스 언덕 - 프롤로그

쿠스코 공항

‘이것 좀 봐요'


마스크를 쓴 라탐 항공 직원이 나누어 주는 비행기 티켓을 받아 든 혜미가 푸흡하는 웃음소리와 함께 해리를 돌아보았다. 혜미가 보여주는 티켓을 본 해리도 실소를 금지 못했다.


평범한 비행기 티켓 모양이었지만 그간 보아온 티켓과는 전혀 달랐다. 하얀 항공티켓 용지에 볼펜으로 급하게 쓴 듯한 혜미의 이름과 날짜, 목적지와 편 명이 적혀 있을 뿐이다. 부랴부랴 급조한 티가 나도 너무 났다. 코로나가 가져온 또 하나의 이색 풍경이다.


그날 이른 아침, 쿠스코 공항으로 향하는 코이카 버스에는 적막감이 감돌았다. 간혹 아는 얼굴이 탈 때면 눈인사를 했지만 그것도 잠시, 인사를 마친 후에는 담소 대신 모두들 굳은 표정으로 창밖만 바라보았다. 저마다 길면 긴 시간, 짧으면 짧은 시간 동안 나름대로 정이 든 쿠스코 시내 구석구석을 하나라도 놓칠 새라 마음에 담고 있었다.


해리와 혜미는 숙소 인근 아르마스 광장에서 버스를 탔다. 쿠스코에 있는 동안 하루에도 수 차례 치나가던 광장이지만 오늘 보는 것이 마지막이다. 이번 생애에 이 곳을 다시 올 일이 있을까? 늘 관광객과 페루사람들로 북적이던 아르마스 광장이지만 오늘은 온갖 짐을 바리바리 들고 있는 몇몇 한국인을 제외하면 썰렁하기 그지 없다.


코로나가 가져온 낯선 풍경이었다. 코로나라는 단어에 다른 뜻이 있다는 것을 안 지 불과 3개월 만에 세상이 달라졌다.


‘코로나 하면 맥주였는데’


해리는 속으로 싱거운 생각을 하며 피식 웃었다.


‘People, stop fucking asking us about the virus,

젠장, 우리한테 바이러스 질문 좀 그만해’


코로나가 본격적인 팬데믹으로 번지기 전인 2020년 1월, ‘코로나’ 맥주회사가 공식 트위터에 올린 짤막한 글이었다. 그래도 그 때는 이런 농담을 주고받을 여유라도 있었다.


지금은 아니다. 한국은 물론이고 미국이나 유럽의 선진국에서도 사람들이 병실이 없어 죽어 나가고 있다. 남미는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에콰도르 같은 곳은 수도 한복판에 코로나로 죽은 시신들이 즐비하게 늘어서기 시작했다. 세상에는 코로나에 걸린 사람들을 치료하기는 커녕 죽은 시체들을 치우기에도 행정력이 벅찬 국가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마추픽추의 관문인 쿠스코에서 페루의 수도 리마까지 한국인 여행객들을 태우고 가는 라탐 항공의 전세기는 그렇게 볼펜으로 찍찍 쓴 항공권을 손에 쥔 한국인 백 명을 태우고 쿠스코 국제공항을 출발했다. 1시간 조금 넘는 짧은 비행 후에 이 비행기는 폐쇄된 리마 국제공항 대신 인근의 군 공항에 착륙할 것이다.


비행기가 이륙하자 해리는 혜미의 손을 꼭 잡았다. 혜미는 해리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는 조금 뒤 잠이 들어버렸다. 긴장이 풀리면서 피로가 한꺼번에 찾아온 것이리라. 피로는 급작스레 끝나버린 긴 여행에서 온 피로만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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