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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산블라스 언덕 - 긴 휴가

발리와 푸콘

'우와, 휴가가 45일이라구요?'


'10년에 한번이에요. 이번에 미친 척하고 구정 연휴랑 붙여서 50일 좀 넘게 쓰게 되었지요'


여행을 다니다 만난 이들에게 묻는 질문 중 하나가 휴가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 여행지에서 만난 직장인들 사이에서 이런 대화가 점점 늘고 있다. 


‘휴가로 오신 거에요?’ 


‘아니요. 퇴사했어요.’


해리는 휴가라고 대답할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휴가가 며칠이냐는 질문에 답을 하다 보니 다시 대화가 길어진다. 


10년마다 한번씩 주어지는 긴 휴가. 헛되이 쓸 수는 없다. 구정 연휴까지 붙여서 50일 넘게 받은 긴 휴가를 보낼 후보지로 파리의 요리 학교와 런던의 꽃꽂이 학원까지 모든 선택지를 고민한 끝에 해리는 발리의 서핑캠프로 행선지를 정했다. 


퇴사라는 말이 유행처럼 번지면서 여행지마다 퇴사하고 머리 식히러 왔다는 이들이 점점 늘고 있다. 이제 세상 어디를 가나 한국인들이 찾을 만한 게스트 하우스나 한인 민박에는 이들 퇴사족들이 주류를 차지하고 있다. 


이 곳 발리의 서핑캠프도 마찬가지였다. 저마다의 사연을 안고 수개월 전에 한국을 떠난 이들은 발리에 자리를 잡고 서핑에 빠져들었다. 발리의 고인물이 되어버린 퇴사족들은 한 눈에 보아도 뉴비들과는 결이 다른 구릿빛 피부를 자랑한다.


해리도 그 마음을 이해할 수는 있었다. 대책 없는 퇴사는 아니었지만 직장생활이 답답해지면 유학을 핑계로 사표를 던지고는 학기가 시작되기 전에 뉴질랜드로, 유럽으로 훌쩍 여행을 떠나곤 했다. 덕분에 팔자에 없는 유학을 두번이나 다녀오게 되었지만 말이다. 


그 때만 해도 그런 식으로 여행을 떠나서 어느 한 곳에 고여 있는 사람들은 대개 유럽이나 일본에서 온 친구들이었다. 이제 한국도 슬슬 그 대열에 합류하기 시작했다. 


늘 그런 식이었다. 여행 패턴도, 운동 열풍도, 와인이나 수제 버거 유행도 한국은 늘 선진국 보다 두어 발자국 뒤에서 따라가곤 했다. 그러다 보니 패턴이 빤히 보였다.


'서핑은 얼마나 갈까?' 


대학생은 물론이고 중고등학생들까지 너도나도 볼링을 치던 시절이 있었다. 중간고사를 마친 해리가 친구들과 찾던 볼링장은 지금은 대부분 사라졌다. 남은 곳들은 번쩍이는 조명을 달고 락볼링장으로 변신했다. 이후 스노우보드가 핫한 인싸템으로 각광을 받다 시들해져 갔고, 인라인스케이트와 라틴댄스가 그 뒤를 따랐다. 


그 모든 것을 찔끔찔끔 하다 보니 이제 서서히 유행하기 시작한 서핑캠프에까지 오게 된 것이다. 물론 그런 생각을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아저씨가 라떼를 찾는 것은 스타벅스에서 만이다. 그냥 이 순간에는 이 곳에서 이들과 발리의 파도와 비치클럽을 즐기면 그만이다. 


어제는 핀스, 오늘은 포테이토 헤드, 내일은 옴니아, 이런 식으로 아침에는 파도를 타고 오후에 쉬다가 저녁이면 비치클럽을 다니는 일상이 이어졌다. 물론 이는 발리에 처음 오는 뉴비들 한정이다. 


구릿빛의 고인물들은 저녁이면 조용히 수영장에 누워 책을 보거나 시장에서 사온 로컬 재료로 요리를 한다. 예전에 이미 발리의 클럽과 바를 모두 섭렵한 이들은 이제 한국에서와 마찬가지로 평온한 일상을 이어가며 그 속에서 각자 자신들의 취미를 즐길 뿐이다.


비치클럽이 지겨워진 사람들은 택시를 타고 정글에 둘러 싸인 우붓으로 머리를 식히러 간다. 도처에 산재한 요가원으로 유명한 우붓이지만 내륙인 우붓에도 나름의 클럽이 있다. 해변에는 비치 클럽이 있다면 우붓에는 리버클럽이 있다. 단지 해변과 강가의 차이가 있을 뿐, 노는 형태는 비슷했다. 


그렇게 몇 주가 지나자 해리 역시 이 생활이 슬슬 무료해지기 시작했다. 스스로가 고이기 시작했다는 느낌이 들자 떠날 때가 왔음을 직감했다. 


이 곳을 뜨기로 마음을 먹었지만 휴가는 아직 한달쯤 남아있었다. 어디로 갈까? 이럴 땐 평소 안 가봤지만 짧은 휴가로는 가보기 힘든 곳이 정답이다. 남극? 아니 가보기는 힘들지만 가면 재미난 곳. 답은 정해졌다. 남미로 가자. 마추픽추에 올라보고 우유니 사막을 거닐어 보아야겠다. 


발리에서 남미로 가는 직항은 아직 없다. 호주를 거쳐 남미로 가나 서울을 거쳐 가나 거기서 거기였다. 옷도 챙길 겸 서울에 들른 해리는 이틀을 쉬고는 파리를 거쳐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가는 에어프랑스에 몸을 실었다. 댈러스나 휴스턴을 거쳐 가면 몇 시간 절약되지만 환승객들도 줄을 지어 악명높은 미국 입국심사를 받아야 하는 미국 환승에 넌덜머리가 난터라 자연스레 파리 경유를 택했다. 


텍사스 경유에 비해 파리 경유를 택해야 하는 이유는 또 있다. 바로 오는 길에 하루쯤 스톱오버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루를 머문다면 텍사스 보다는 파리가 단연코 나은 선택이다. 파리는 오는 길에 들르기로 했다. 그래야 쇼핑을 할 수 있으니까. 


푸콘


푸콘은 화산으로 둘러싸인 자그마한 칠레의 호수마을이다. 파타고니아가 광활한 풍경으로 사람을 압도한다면 푸콘은 그 이름처럼 찾는 이들을 푸근하게 안아주는 곳이다. 발리를 떠난 후 부에노스아이레스와 파타고니아를 지나 푸콘에 도착한 해리는 프렌치 안데스라는 작은 게스트 하우스에 묵었다. 


프렌치 안데스는 이름처럼 프랑스인이 안데스 산자락에 운영하는 곳인데, 나름 찾는 이들이 많아 장사가 잘 되는지 같은 거리에 2호점까지 있다. 


며칠 지내다 보니 이 곳의 직원들은 청소아주머니를 제외하면 모두 프랑스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대개 프랑스에서 관광학이나 호텔경영학을 전공하는 학생인데 휴학을 하고 6개월에서 1년 정도 인턴십 계약으로 이곳에 왔다고 한다. 핑계 김에 전공 경험과 남미 여행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은 이들은 늘 웃는 표정이었다.


‘Hey, I didn’t really mean to jump into you guys’ conversation, but did you actually say 6 months in Pucon?

잠깐만요, 끼어들 생각은 없었는데 진짜 푸콘에서만 6개월째라고 했나요?’


인근의 화산투어를 다녀와 노곤한 몸으로 프렌치 안데스의 라운지 소파에 앉아 책장을 뒤적이던 해리의 귀에 갑자기 옆 테이블의 대화가 들어왔다. 아니 예의상 던진 추임새와는 반대로 무료한 김에 주변사람들 대화에 끼어들 핑계가 반가운 것인지도 몰랐다. 


마찬가지로 대화에 불쑥 끼어든 낯선 동양인이 영 싫지는 않았던지 비키와 레미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덩치 큰 흑인인 비키는 남아공에서, 아담하고 귀엽게 생긴 백인인 레미는 프랑스에서 왔다고 했다. 안데스 산속의 산장에서 와인 잔을 기울이며 긴긴 밤을 담소로 보내던 이들은 낯선 이에게 선뜻 곁을 내주었다. 어차피 이러자고 혼자 여행을 떠난 것 아니었는가? 이 둘도 이곳에서 며칠 전 알게 된 사이였다.


6개월째 푸콘에 머무르고 있는 것은 레미였다. 앱 개발자인 레미는 아예 맥북 하나 만을 챙겨 들고 고향 리옹을 떠나 이 곳으로 왔다. 프로젝트 막바지를 제외하면 하루 서너 시간만 작업을 하고 나머지는 주변을 돌아다니거나 그냥 쉰다는 레미는 같은 나라 사람이 운영하는 프렌치 안데스에서 장기 투숙 중이었다. 


우리로 치면 한국 사람이 파리 한인 민박에 장기투숙하는 느낌이랄까. 레미에게 이 곳은 주기적으로 새로운 사람들이 계속 들고 나는 학교 기숙사와 같은 곳이었다.


앱 개발자라는 직업 특성 상 일을 하기 위해 꼭 프랑스에 있을 필요는 없었다. 가정이 있다면 모를까, 프랑스에서는 나름 대도시에 속하지만 한국 기준으로 볼 때는 작은 소도시에 불과한 리옹에 가만히 앉아서 하루 종일 코딩만 하며 세월을 보내기에 레미는 너무 젊었다. 


세상이 궁금했던 레미는 맥북 하나만을 챙겨들고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하던 일을 계속 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우연히 들른 푸콘에서 같은 나라 사람들과 어울려 시간을 보내다 보니 어느새 6개월이 흐른 것이다.


덩치만큼 성격도 좋은 아프리카 흑인인 비키는 정작 자신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다. 그냥 고향에서 비즈니스를 하다가 여행을 떠났다고 했다. 


여행지에서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의 배경에 대해서는 서로 시시콜콜히 묻지도, 또 딱히 궁금해 하지도 않았다. 스스로 입을 열고 말을 해주면 그때 가서 공감하고 맞장구를 치는 것으로 족했다.


이들이 딴 와인을 함께 마시다 보니 해리도 뭔가를 가지고 와야 했다. 셋이 나누어 마시면서 금세 바닥을 들어낸 와인병을 보며 해리는 냉장고에서 전날 산 피스코를 들고 왔다. 피스코를 본 레미와 비키는 환호성을 질렀다. 


와인을 다시 한번 증류해서 만든 브랜디의 일종인 피스코는 남미의 꼬냑이라고도 불리는 독한 술이다. 큰 거 한 병에 한국 돈으로 만원도 안하지만 잘 만든 증류주답게 아무리 마셔도 다음 날 숙취가 없어 남미 여행객들이 즐겨 마시는 술이다. 


와인으로 살짝 취기가 돈 세 사람은 본격적으로 얼음을 넣은 피스코 잔에 레몬을 짜서 마시며 술판을 벌이기 시작했다.


먼 이국 땅에서 만난 여행자들인지라 첫만남에서도 어색함은 없다. 국적도, 직업도, 나이도, 쓰는 언어도 모두 다르지만 이들에게는 커다란 공통점이 있다. 바로 여행을 좋아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국적과 직업을 초월하여 모두가 함께 공유할 수 있는 경험이 있다. 다름아닌 이 곳까지 오게 된 과정이다. 두 세명이 모여 앉으면 일단 이것만 가지고도 한시간 넘게 떠들면서 와인 한 두 병은 금새 비울 수 있다. 


이미 심박수가 올라간 상태로 도착한 낯선 여행지에서 누군가에게 들려주고 싶어 입이 근질거렸던 최근의 여행 경험을 이야기할 절호의 기회인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 고향에 돌아가 만날 그 누구보다도 이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공감해주는 사람들과 함께 여행이야기로 수다를 떨다 보면 안 친해지기가 오히려 더 힘들다. 알코올은 거들 뿐, 여행이 알아서 다한다.


남아공을 떠난 비키는 다른 곳을 거치지 않고 바로 남미로 왔다. 브라질을 한 바퀴 돌며 이과수 폭포를 보았다는 비키는 정작 아프리카에 있는 빅토리아 폭포는 가 본 적이 없다고 했다. 말이 같은 아프리카이지 비키의 고향인 남아공에서 빅토리아 폭포가 있는 짐바브웨는 남아공에서 남미 보다 더 가기가 어려운 곳이다.


말도 안되는 소리로 들리겠지만 아프리카 어느 한 나라에서 다른 아프리카 나라로 비행기를 타고 가려면 파리까지 가서 경유를 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최빈국들이 즐비한 아프리카 사정 상 어느 한 나라에서 다른 나라까지 비행기를 타고 가서 비즈니스를 하거나 여행을 할 만한 수요가 없는 것이다. 


반면 옛 식민 모국인 프랑스는 말도 잘 통하는 예전 식민지에 가서 사업을 하거나 하다못해 여행이라도 하려는 사람들이 제법 적지 않다. 그러다 보니 아프리카로 가는 항공편은 전세계에서 파리 드골 공항에 가장 많을 수 밖에 없다. 아프리카 각 나라들을 연결하는 허브 공항 역할을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드골 공항이 하게 된 것이다. 


만약에 그 거리를 육로로 간다면 정글을 뚫고 사바나를 건너 수백 키로미터를 털털 거리는 시골 버스를 갈아타며 도시에서 도시로 국경 몇 개를 지나며 이동을 해야 한다. 


길이 워낙에 열악하다 보니 내륙의 물류를 담당하는 트럭기사들은 불과 백키로도 안되는 거리를 며칠에 걸려 가는 경우가 태반이다. 이런 이유로 먹고 살 만한 아프리카 사람들도 대부분은 바로 인접국가가 아닌 이상 같은 아프리카의 다른 나라에 가본 적이 별로 없다.


리옹을 떠난 레미는 먼저 학생 시절 대강 둘러본 유럽을 다시 한번 한바퀴 돈 후에 미국을 거쳐서 남미로 왔다. 뉴욕에서 미국 여행을 시작한 레미는 곧 한 때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남부 루이지애나의 주도인 뉴올리언즈로 향했다. 


미국이나 아시아 기준으로는 아담한 중소도시에 불과한 리옹 출신의 레미에게 처음 가본 뉴욕은 신선하고 재미나지만 오래 정붙이고 머무르기에는 너무 복잡하고 비싼 곳이었다. 그래서 짧은 뉴욕 일정을 뒤로 하고는 프랑스의 옛 식민지, 루이지애나로 향한 것이다.


수백 년 전에 프랑스의 지배를 받은 적이 있다지만 지금은 엄연히 미국 영토인 뉴올리언즈에 프랑스 사람들은 무슨 향수가 있길래 그 먼 곳까지 갔을까? 


우리 같은 이방인들에게는 의아하게 들리겠지만 루이지애나는 여전히 미국 속의 작은 프랑스로 남아있다. 관광객들은 도시나 거리 이름에 남아있는 지명과 마디그라 Mardi Gras 같은 축제 문화를 보고 옛 프랑스의 정취를 느낄지도 모르지만 실제 루이지애나에 남아있는 프랑스의 잔재는 이보다 훨씬 뿌리가 깊다. 


그게 어느 정도냐 하면 루이지애나는 다른 모든 미국의 주들이 따르는 영미법 체계가 아닌 나폴레옹 법전에 기반한 대륙법을 따른다. 애초에 루이지애나 주법 자체가 프랑스 법을 기본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이 후 미국 영토가 되면서 영미법 규정들이 일부 도입은 되었지만 루이지애나는 법체계부터 다른 모든 미국의 주와는 사못 다르고, 법체계와 떼어 놓을 수 없는 행정체계 역시 쓰는 용어부터가 다르다. 


미국의 변호사 자격은 국가 자격이 아닌 주 단위의 자격증이다. 그래서 미국 변호사라고 하지 않고 뉴욕주 변호사, 캘리포니아 변호사라고 부르는 것이다. 하지만 같은 언어와 문화권인데다 주별로 법체계가 크게 다르지는 않아 메사추세츠주에 있는 하버드 로스쿨을 나와서 뉴욕 주 변호사 자격을 따고 워싱턴 D.C에서 변호사 업무를 하는 것이 가능하다. 


반면 루이지애나 변호사는 배운 법의 체계 부터가 다르기 때문에 루이지애나를 벗어날 수 없다. 루이지애나 변호사가 다른 주에 가서 일하기도 힘들지만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딥 사우스 Deep South라는 지리적 여건 못지않게 이런 점들까지 더해지며 루이지애나는 미국 남부에서도 고립된 섬처럼 남게 되었다.


하지만 여행자 신분인 레미에게 뉴올리언즈는 법체계의 유사성을 넘어선 기묘한 곳이었다. 프랑스의 정취가 남아있다고 하지만 이는 정확히 말해 식민 시대 프랑스의 정취인 것이다. 21세기 프랑스에서 온 레미에게 뉴올리언즈는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사극에서나 보던 옛날로 돌아간 듯한 느낌을 주었다. 중앙아시아 고려인 마을에 간 한국인 여행자들의 기분이 이와 비슷할 지도 모른다.


민속촌에 온 것 같았던 뉴올리언즈를 떠난 레미는 남쪽으로 여정을 계속해서 플로리다를 횡단하고 쿠바로, 다시 멕시코를 통해 남미로 넘어왔다가 안데스 산자락에 도착해서야 비로소 마음을 풀고 한 곳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아니 너무 오랜 여행에 지쳐 더 이상 돌아다니고 싶지 않은 시점에 도착한 곳이 이 곳 푸콘이었는지도 모른다. 


이유야 어쨌든 레미는 안데스 자락의 아담한 호수 마을에서 같은 나라 사람들이 운영하는 게스트 하우스에 자리를 잡고 본격적으로 원래 하던 일 – 앱개발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해리의 발리 이야기를 끝으로 전세계 구석구석을 하나씩 돌며 펼쳐졌던 각자의 여행담이 시들해지면서 조금씩 취기가 오른 세 사람은 이번에는 여행을 했던 나라들의 서로 다른 영어 억양을 흉내 내며 낄낄거리기 시작했다. 


레미가 남미사람들의 스페인어 억양이 섞인 영어로 포문을 열자 비키가 ‘땡뀨 껌어겐’으로 요약되는 인도식 억양을 흉내 내고, 해리는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본사람 영어발음을 따라했다. 


미국에서 학교를 다닐 때의 일이다. 야스오라는 일본 친구가 큰 실수를 했다. 회계학 중간고사에서 그만 만점을 맞아버린 것이다. 채점이 끝난 시험지를 나누어 주던 교수님은 자기 시험에서 몇 년 만에 만점이 나왔다며 바로 야스오를 지목해 일어나라고 했다. 그리고는 어떻게 공부했는지 학우들에게 알려달라는 본인에게는 아주 쉽지만 누군가에게는 매우 어려운 주문을 했다.


불쌍한 야스오는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일어나 한참을 궁리한 끝에 이렇게 말했다.


‘아노…아이 스터디드 하도, 예스, 아이 스터디드 배리 하도’


갑자기 예전 미국 친구들이 농담처럼 하던 말이 생각났다. 잘 알다시피 미국애들은 영국식 발음을 섹시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다 보니 영국식 영어를 따라하는 각자의 비결이 있고, 이걸 가지고 하는 농담도 있다. 


영국식 영어를 하는 비결 중 하나는 입안에 큰 눈깔사탕을 하나 물었다고 생각하고 말을 하는 것이다. 그러면 하우스 House가 호우스라고 영국식으로 발음이 된다. 이미 몇 잔째 마신 피스코 잔을 들고 라운지 소파에 기대어 아무 말에나 웃을 준비가 되어있는 두 사람을 향해 누구에게랄 것 없이 말을 던졌다.


‘You gotta imagine that you have a big candy in your mouth and say anything

입안에 큼직한 사탕이 있다고 생각하고 아무 말이나 해봐’


‘Like this? Listen’

이렇게 말이야? 들어봐’


해리의 말을 받은 레미가 갑자기 완벽한 영국식 억양으로 말을 하기 시작했다. 허긴 프랑스 사람들에게 영국식 발음을 흉내내는 것은 한국 사람들이 일본 말투를 흉내 내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Oh-la-la, you really sound like a British Bee-it-ch’

‘야 너 진짜 영국 상언니처럼 말한다’


긴긴밤을 무료하게 보내지 않기 위한 시답지 않은 농담을 주고받으며 웃고 떠들다 보니 자정이 넘었다. 가뜩이나 고요한 안데스 산속의 밤이 깊어갔다. 셋이서 와인 한 병에 피스코 한 병을 다 비우기는 무리였다. 피스코를 1/3쯤 남기고는 모두들 알딸딸해지며 조금씩 웃음 소리가 잦아들었다.


이런 밤에 조용히 혼자 들어가서 잠을 청하고 싶은 사람이 있을까? 피스코가 줄어들고 웃음소리도 잦아들면서 분위기가 조금씩 묘하게 흘러갔다. 느낌이 통했을까? 레미와 해리가 서로 쳐다보고 웃는 빈도가 늘기 시작했다. 비키는 유쾌했지만 조금 부담스러웠다. 물론 이건 비키한테도 물어봐야 한다. 이 꼴을 본 비키가 쿨하게 하품을 하면서 일어났다. 


‘Hey guys, I have to go to bed, sleep tight,

야, 나 먼저 들어가 잘래, 잘자라.’


셋이 놀았으니 뒷정리도 같이 하는 것이 매너지만 이럴 땐 또 아무 말없이 조용히 사라져주는 것이 배려였다. 비키가 들어가고 딱히 할 말이 없어 피스코 한 잔씩을 더 따랐지만 별로 술생각이 없기는 레미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잠시 동안 잔을 들고 홀짝거리는 시늉을 했다. 보는 사람도, 뭐라고 할 사람도 없지만 비키가 일어나자마자 바로 뒤이어 일어나는 것은 스스로에게도 조금 뻘쭘한 일이다. 형식적으로 입술을 몇 번 축이고는 해리가 한마디 던졌다.


‘Time to sleep’

잘 시간이네


‘Getting sleepy?

졸려?’


‘Not really, but should sleep for tomorrow’

꼭 그런 건 아닌데 내일 또 일어나야지


피스코에 짜서 넣은 레몬껍데기만 대충 쓰레기통에 비우고 빈 잔은 싱크대에 그대로 두었다. 


‘설거지는 내일 아침 일찍 와서 해야지.’ 


지금 여기서 달그닥 달그닥 유리잔 부딪치는 소리를 내는 것은 최악 중의 최악이다. 고요하게 가라앉은 안데스의 밤 분위기를 틈타 와인과 피스코가 깊숙히 끌고 내려가 준 분위기를 갑자기 날카로운 소리로 멱살 잡아 수면 위로 하드캐리하는 격이다.


레미의 방은 가파른 나무 계단을 올라가야 하는 2층이었다. 해리의 방은 1층이지만 잠자코 레미를 따라갔다.


‘I will walk you to your room

방까지 데려다 줄게.’


예의상 추임새 같은 멘트를 던지자 레미는 ‘Merci, 고마워’하며 짧게 프랑스어로 대답했다.


맨정신에도 위험스러울 정도로 가파른 나무 계단을 오르며 해리는 자연스럽게 레미의 팔을 잡고 부축을 해주었다.


피스코를 반 병 넘게 비우며 알딸딸 해졌지만 아직 휘청거릴 정도로 만취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레미는 이끄는 데로 가만히 몸을 맡겼다. 사실 두 사람 다 비슷하게 취한지라 누구 하나만 발을 헛디뎌도 함께 굴러떨어질 판이다.  


방문 앞에 도착한 해리가 레미의 팔을 잡은 손을 자연스레 얼굴 쪽으로 올렸다.  엄지손가락으로 레미의 뺨을 어루만지기 시작하며 다른 손가락으로는 귓불을 쓰다듬었다. 눈을 반쯤 감은 채로 예상했던 손길을 느끼던 레미는 잠시 후 눈을 살포시 감으며 턱을 들었다. 어깨를 감쌌던 왼손을 풀어 양손으로 레미의 뺨을 감싸 쥔 해리는 엄지손가락으로 부드럽게 눈가를 스치며 먼저 자신의 이마를 레미의 이마에 갖다 대었다. 아주 살짝 레미가 다시 눈을 뜨려는 순간 입술을 마주했다. 레미는 뜨던 눈을 다시 감고 입술을 조금씩 벌리기 시작했다. 레미의 혀에서는 씁쓸한 피스코의 뒷맛과 쌉쌀한 레몬향이 함께 났다. ‘나한테도 같은 맛이 나겠지’라고 해리가 생각하는 순간 레미가 오른손으로 방문을 열었다. 딸깍 손잡이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자 해리는 자연스럽게 방문 안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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