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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산블라스 언덕 -라파즈, 별과 가장 가까운 수도

Now or Never

볼리비아의 라파즈는 지구 상에 있는 모든 나라의 수도 중에서 가장 별과 가까이에 있는 곳이다. 


남미에서 가장 낮은 저지대인 파타고니아를 출발한 해리는 서서히 고도를 높여 가며 세상에서 가장 해발 고도가 높은 수도, 라파즈에 도착했다. 그러자 칠레의 아타카마 사막을 거쳐 볼리비아의 우유니까지 오는 동안에는 별로 느끼지 못했던 고산병 증세가 바로 나타났다. 


해발 4천 미터에 위치한 라파즈는 대충 백두산 위에 지리산 하나를 더 얹은 높이라고 보면 된다. 뜬금없는 이야기지만 그래서인지 남미의 최빈국 볼리비아는 적어도 축구에서 만큼은 기라성 같은 남미 축구 강호들 사이에서 꽤나 선전하고 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축구강국인 브라질이나 아르헨티나의 대도시들은 모두 해안가 저지대에 있다. 그러니 이들 신계의 축구선수들도 라파즈에만 오면 바로 숨이 턱턱 막히면서 메시 앞에 선 슛돌이가 되어버린다. 또 이게 무슨 한일전도 아니고 몸값만 수백 억원에 달하는 축구 스타들이 볼리비아 한번 이겨보겠다고 고산병 후유증을 무릅쓰고 죽기살기로 뛰지도 않는다. 


라파즈의 해발고도에 대해서는 출처마다 숫자가 달랐다. 어느 곳에는 해발 3,600미터라고 나온다. 반면 4천 미터가 넘는 곳도 있다. 쓰는 사람마다 제각각 다른 이 해발 고도에 대한 궁금증은 이 도시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풀렸다. 라파즈는 도시 내의 수직 고도차가 무려 천 미터에 달하는 기묘한 곳이다. 


라파즈 여행자들은 한 번쯤 다 타보는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야 하는 도시 꼭대기의 해발 고도는 정확히 4,095미터였다. 반면 가장 낮은 곳의 해발 고도는 3천 미터를 약간 웃돌았다. 평균 고도는 3,600미터이다. 이 도시 꼭대기가 서울로 치면 관악산 꼭대기라는 말이 아니다. 라파즈에는 실제 사람들이 사는 집과 건물들이 천 미터 높이에 걸쳐 빼곡히 늘어서 있다.


국대 경기를 치르는 라파즈 F.C의 홈구장인 에스타디오 에르난도 실레스 경기장의 해발고도가 딱 3,637미터라고 한다. 이런 깎아지른 듯한 산 속에서 그나마 평지를 찾아 지은 곳이겠지만 그래도 굳이 4천 미터 꼭대기에 안 짓고 평균 고도에 지었다고 하니 그나마 원정을 온 주변 국가들에 대한 배려로 보이기도 한다.


언덕 아래에서 위까지 같은 도시의 고도차이가 천 미터씩 나는 이런 동네에서 걸어서 다닐 수는 없다. 택시와 버스도 있지만 이 곳에는 특이하게도 케이블카가 주요 교통수단으로 자리잡고 있다. 


라파즈의 케이블카는 남산 케이블카처럼 관광객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무려 10 개의 케이블카 노선이 마치 서울의 지하철 마냥 도시 곳곳을 거미줄처럼 연결한다. 중간 중간에 케이블카를 갈아탈 수 있는 환승역도 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라파즈의 케이블카는 다른 대도시의 지하철과 같은 역할을 한다.


출국 전 블로그 검색을 통해 이를 잘 알고 있는지라 우유니에서 산 고산병약을 라파즈로 가는 버스 안에서 미리 먹었지만 생전 처음 겪는 4천 미터 고산병이라는 것이 그리 만만한 것은 아니었다.


라파즈에 도착한 해리는 버스에서 내려 한 발짝 한 발짝 조심스레 걷기 시작했다. 조금만 발걸음을 재촉해도 숨이 가빠오고 가슴이 딱 막히는 통증이 찾아왔다. 이럴 때면 걷다 말고 멈춰 서서 통증이 사라지고 호흡이 돌아오기 만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캐리어 손잡이를 보행기 모냥 잡고 간신히 터미널 밖으로 나온 해리는 바로 택시를 잡아 타고 미리 예약해 놓은 게스트 하우스로 향했다. 라파즈에도 한인 민박은 있지만 몇 가지 이유로 그냥 현지 게스트 하우스에 묵기로 했다.


게스트 하우스에 도착하자마자 방에 들어가 일단 샤워부터 하고 한숨을 돌렸다. 남미 저지대에서 여정을 시작해 고산 지대로 올라오면 적응이 수월하다고 누가 그랬던가. 


‘정말이지 이거야말로 ‘어서 와, 라파즈는 처음이지’이거네. 이게 수월한 거야. 바로 여기 떨어졌으면 그냥 죽었겠네.


해리는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샤워를 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샤워를 마치고 나와서는 고산병약 한 알을 더 삼켰다.


샤워를 끝내고도 한참을 침대에서 휴식을 취한 후에 밖으로 나왔다. 라파즈의 도심은 예상대로 황량하고 낡은 건물들이 무질서하게 늘어선 곳이었다. 국민소득 1만 2천불인 칠레 정도면 선진국 행세를 할 수 있는 남미에서도 볼리비아는 최빈국 포지션이다. 


그러다 보니 적어도 남미 안에서 칠레 사람들의 선진국 부심은 알고 나서 보면 꽤 중증이다. 동남아시아에서 말레이시아 사람들이 바로 이웃의 인도네시아 사람들을 개 무시하듯이 같은 남미 안에서도 칠레 사람들은 파라과이나 볼리비아 사람들과 같은 취급을 받는 것을 아주 싫어한다.


하지만 적어도 이 곳의 야경만큼은 세상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한 장관을 자랑한다. 대도시 한복판에서 케이블카를 타고 오르내리며 천 미터 고도를 따라 수직으로 줄지어 들어선 건물의 불빛을 보는 것은 오직 라파즈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다만 낮에는 그다지 감흥을 느낄 수 없다. 그냥 삶에 찌든 후진국의 낡고 볼품없는 건물들이 수직으로 천 미터에 걸쳐 늘어선 광경을 볼 수 있을 뿐이다. 세상 어느 곳에서도 비슷한 것을 볼 수 없는 라파즈의 풍경을 즐기는 것은 어둠이 이 모든 추함과 더러움을 덮고 불빛이 그 자리를 대신하는 밤 시간의 일이다. 


아직 해가 지려면 멀었다. 해 진 후를 기약하며 해리는 게스트 하우스로 돌아왔다. 하지만 밤을 기다리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야경은 그 후에 생각할 일이다. 


거리를 한 바퀴 돌아본 해리는 길가 상점에서 작은 생수 한 병을 샀다. 나오는 길에 상점 옆에 앉아서 나뭇잎을 산더미처럼 쌓아 놓고 파는 행상 아주머니에게 나뭇잎도 한 무더기 샀다. 


이 나뭇잎이 바로 코카잎이다. 코카나무의 잎은 지금도 코카콜라의 주요 원료가 된다고 하지만 동시에 정제를 해서 코카인을 만드는 데에도 쓰인다. 코카잎은 콜라의 재료나 코카인으로 활용되기 훨씬 이전부터 안데스 산맥의 현지인들 사이에서 고산병 예방을 위해 상용되어 왔다. 


고산병은 해발 고도가 높은 지역에서 산소가 부족해서 생기는 증상이다. 그런데 코카잎을 우려 마시면 혈관이 확장되어 산소공급이 원활해지며 고산병 증세 완화에 도움이 된다. 그러니까 코카잎은 천연 비아그라 역할을 하기도 한다. 혈관을 확장시켜주니까 말이다. 코카잎을 구할 수 없는 히말라야에서는 반대로 비아그라를 고산병 약으로 쓴다. 어떤 약이건 혈관만 확장시켜주면 된다.


한국 돈 천원 정도를 주고 코카잎 한 무더기를 사서 방으로 온 해리는 우선 수돗물로 코카 잎을 씻었다. 생수병을 열고 한 모금 마신 해리는 씻은 코카 잎을 생수병 안에 한웅큼 집어넣었다. 일종의 코카차를 만든 것이다. 


국토 대부분이 고산 지대에 속한 볼리비아나 페루의 호텔에는 이 코카차를 아예 로비에 비치해 놓고 아무나 마실 수 있게 한다.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적응이 끝난 현지인들은 별 문제가 없지만 생전 처음 고지대에 도착해서 바로 해롱거리기 시작하는 여행객들을 위한 배려이다. 마트에 가면 코카잎을 티백에 넣은 코카차를 팔기도 하지만 그냥 길거리에서 한 무더기 사서 생수병에 넣는 것이 훨씬 가성비가 좋았다.


가정식 코카차까지 완비하여 고산병에 대한 적응준비를 마치고는 로비로 내려갔다. 소파에 앉아 한참을 이래저래 지나가는 사람들 구경을 하다보니 찾던 사람을 발견했다. 꼭 그 사람과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기 보다는 이런 사람을 만나려고 여기에 온 것이다.


멀리서 오는 모습만 봐도 기나긴 금발의 굵직한 레게머리를 한 것이 딱 철 지난 유럽 히피의 모습이었다. 아마 마지막으로 언제 머리를 감았는지는 본인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남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알록달록한 몸빼바지에 때에 찌든 칼라풀한 티셔츠까지 갖춰 입은 것이 전세계 게스트 하우스 어디를 가나 우글거리는 돈 없고 할 일 없고 시간 많은 전형적인 유럽 백패커의 모습이다. 하지만 상관없다. 딱 이런 놈을 만나기 위해 라파즈의 게스트 하우스를 찾아온 것이다.


자미르는 코소보에서 왔다고 했다. 그게 어디에 붙어있는 나라인지 알 듯 말듯 했지만 어디에서 왔건 간에 상관없다. 말로만 듣던 곳에 같이 갈 만한 동행을 구한 것 같다.


‘Do you know Route 36?

루트 36이라고 알아?


여행자들의 통상적인 인사를 대충 마친 해리가 지나가는 말처럼 물었다. 난데없이 말을 걸어온 낯선 동양남자가 귀챦은 듯 대꾸를 하는 둥 마는 둥 하던 자미르가 갑자기 눈을 크게 뜨더니 씨익하고 웃었다.


‘What? You wanna go to the place?

‘왜 너도 거기 갈라고?’


‘Why on earth do you think I have come to the piece of shit city like this?

아니면 내가 왜 이런 새 같은 동네에 왔겠냐’


‘Chill out Bro, it’s too early, we can go there tonight

진정해 임마, 지금은 너무 이르고 오늘 밤에 가자’


‘Is it closed now?

지금은 닫은 거야?’


‘They never close, at least since I got here, but it’s just too early. I’m not doing shit this early

아니, 절대 안 닫지, 적어도 내가 여기 온 이후로 닫은 걸 본적은 없어. 그래도 너무 일러, 이 시간에는 안가’


‘Cool, what time do we leave?

알았어. 몇 시쯤 갈까?’


‘I dunno, we go whenever we wanna go

글쎄다, 꼴리면 가는 거지, 넌 시간 정해 놓고 꼴리냐’


‘Perfect, I will meet you up here tonight, let’s say 10. Don’t leave without me.

잘났다. 오늘밤 10시쯤 여기서 다시 봐. 먼저 가지 마라’


‘Don’t worry, man, they ain’t going nowhere

걱정 붙들어 매라. 그게 어디 가겠냐’


코카잎이 가득 들어 있는 생수병을 본 자미르가 한 마디 덧붙였다.


‘You can do better than that there, man

거기 가면 더 좋은 거 많아’


해리는 코소보 히피를 로비에 남겨두고 다시 밖으로 나왔다. 시간도 때울 겸 겸사겸사 저녁을 먹기 위해서였다. 어차피 밤에 다시 만나기로 했는데 굳이 이미 반쯤 눈이 풀린 동유럽 양아치와 저녁까지 같이 먹을 필요는 없다. 


구글 맵 평점을 찾아볼 필요도 없이 근처에서 눈에 띄는 식당에 들어갔다. 대충 메뉴판을 살펴본 후에 스테이크와 맥주를 시켰다. 이 동네에서는 그냥 고기덩어리 구운 것이 제일 먹을만 할 것 같다. 


잠시 후 노란 색 플라스틱 접시에 까맣게 그을린 고기 한 덩어리와 감자 튀김, 양파와 토마토 조각 몇 개가 나왔다. 볼리비아 맥주 파세냐도 따라 나왔다. 역시 볼리비아 물가는 저렴했다. 스테이크와 맥주를 합쳐 한화로 만 원이 채 안되었다. 단 퀄리티도 딱 그 정도였다. 


아무리 남미가 한 때 사람보다 소가 많았다는 소고기의 본좌라고는 해도 칠레에서 괜찮은 스테이크집을 가려면 두툼한 고기 한덩어리에 가니쉬까지 해서 최소한 4,5만원은 줘야 한. 푸콘에서 유명하다는 스테이크 하우스에 한 두번 갔다가 그 후로는 정육점에서 고기를 사다 구워 먹은 이유도 매 끼 그렇게 사 먹기는 비용이 만만치 않아서였다. 


하지만 볼리비아 길거리 식당의 만 원짜리 스테이크와 4만원짜리 칠레 유명 스테이크 하우스 중에 고르라면 단연코 돈 값하는 칠레 스테이크를 고를 것이다. 볼리비아 물가가 싸긴 하지만 싼데는 다 이유가 있는 법, 갓성비까지는 아니다. 


썩 만족스럽지는 않아도 배는 부른 저녁을 먹고 난 해리는 다시금 식당 주변을 한 바퀴 돌기 시작했다.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며 하나 둘씩 도시의 가로등이 켜졌다. 한낮의 태양 아래 잔인할 정도로 민낯을 드러냈던 볼품없는 건물들이 부드러운 조명빨에 힘입어 낮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하고 있었다. 생얼을 감춘 도시는 곧 안데스의 여신으로 변신할 것이다.


‘태양의 신보다는 가로등의 여신이 더 관대하네.’


점점 모습을 드러내는 라파즈의 야경에 관심이 갔지만 오늘의 목표는 야경이 아니었다. 짧은 산책으로 저녁으로 먹은 스테이크만 대강 소화시키고는 바로 게스트 하우스로 돌아갔다.


10시라고는 했지만 해리는 9시 무렵부터 로비에 나와 앉아있었다. 방에서 특별히 할 일도 없었지만 코소보 히피가 딱 10시 맞춰서 나올 것 같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하룻밤을 공치기 싫은 해리는 로비에 나와 휴대폰으로 음악을 들으면서 네이버 신문기사를 읽고 있었다.


‘Hey, what’s up

어 왔어’


30 분쯤 앉아 있었을까, 자미르가 생각보다 일찍 내려왔다. 내심 속으로 일찍 나오기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Hey, ready to go?

안녕, 이제 갈까’


‘You pay for taxi, right?

택시비 니가 낼 거지?


‘Taxi only, you take care of your own shits

택시비 만이다. 딴 건 니가 알아서 해’


‘You bring small money, did you?

잔돈으로 가져왔지? 당근?’


갑자기 무슨 말을 하는지 감이 안 잡혔지만 해리는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Of course, I did, no worry

말이라고 하냐? 걱정 붙들어 매’


‘They never give you back changes, make sure you don’t give them anything over 200

거긴 거스름돈 따위는 주지 않아. 절대 200볼 짜리 이상은 내지 마라’


대답하는 폼이 영 마뜩챦았는지 왠일로 친절하게 부연설명까지 해 주었다. 순간 속이 철렁했다. 혹시 몰라 신용 카드는 여권과 함께 전부 방의 금고에 두고 나왔지만 지갑 속에는 5백 볼 짜리 지폐가 가득했다. 


얼마를 내야 할지 모르지만 그 정도는 있어야 할 것 같아 챙겨 나온 돈이다. 할 수 없다. 큰 돈 두고 올 테니 기다리라고 할 수는 없다. 


‘가서 정신 바짝 차리는 수 밖에.’


가서 정신이 차려질지는 알 수 없지만 아무튼 이제 그 방법 밖에는 없다.


자미르와 함께 게스트 하우스를 나온 해리는 앞장서 걸으며 게스트 하우스 앞에 줄지어 서있는 택시 하나에 올라타려고 했다. 순간 자미르가 어깨를 잡아당겼다.


‘What the hell are you doing, we don’t take a cab here

빙신아, 뭐하는 거야. 여기서 택시 안 타’


‘What? They work for cops?

왜? 쟤들 짭새 꼬봉이야?’


‘You never know, but we don’t shit where we sleep, we just don’t

난들 아냐, 그래도 니가 자는 데에서 지리는거 아니다. 바보냐?’


갑자기 현타가 온 해리는 조용히 자미르가 시키는 데로 따라갔다. 초짜 티를 안 내려고 최대한 쿨하게 행동하려고 애를 썼지만 연타석으로 바보 짓을 해버렸다. 뉴비는 늘 사소한 것에서 티를 내기 마련이다.


큰 길을 따라 한참을 걸어 내려간 자미르는 거리에 줄지어 서 있는 택시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지나가는 택시를 불러 세웠다. 정체가 탄로난 해리도 얌전히 자미르를 따라 택시에  올랐다.


한 20 분쯤 갔을까? 택시가 어딘지 모를 골목으로 들어가더니 어느 평범한 건물 앞 모퉁이에 멈춰 섰다. 말이 20 분이지 가파른 언덕길에 나 있는 꼬불꼬불한 길을 돌아왔기 때문에 실제 그렇게 먼 거리는 아니었을 것이다. 택시기사가 돌아왔다는 것이 아니라 원래 이 동네 길이 이 모양이다. 오죽하면 케이블카 노선만 10개를 만들었을까?


택시는 멈췄지만 자미르는 내리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기사는 아예 시동까지 꺼버렸다. 이제 해리는 먼저 행동하지 않고 얌전히 앉아서 시그널을 기다렸다. 잠시 후 어디선가 갑자기 사람 하나가 나타나더니 택시 문을 열었다. 자미르는 익숙한 듯 짧은 인사를 건네고 택시에서 내렸다. 해리도 기사가 달라는 데로 50 볼 짜리 지폐를 주고는 두 사람을 따라갔다.


이유는 모르지만 두 사람이 지하로 내려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왠지 이런 곳은 지하와 더 잘 어울렸다. 하지만 근처의 한 건물로 들어간 두 사람은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이들을 따라 3 층까지 올라간 해리는 문 틈으로 안을 들여다보고는 조금 실망했다. 


이런 곳에 와 본 적은 없지만 그냥 이 곳에 오면 영화에서처럼 호랑이 가죽을 깐 체스트필드 소파 위에 웨슬리 스나입스 같이 생긴 키 큰 흑인이 반들거리는 기지의 수트를 쫙 빼입고는 번쩍이는 로얄 오크와 금통 데이데이트를 양팔에 차고 시가를 물고 앉아 있을 줄 알았다. 


그리고 터질 듯한 비키니를 입은 흑발의 백인과 금발의 흑인 여성들이 소파에 기댄 채 그 옆을 둘러싸고 있다가 이 곳에 들어오는 낯선 동양인을 의아한 표정으로 쳐다보는 광경을 상상했다.


Route 36은 명성에 비해 초라했다. 조명과 가구, 분위기가 모두 필리핀이나 인도네시아 변두리에 있는 싸구려 로컬 클럽 같은 분위기였다. 표범 가죽을 두르고 시가를 입에 문 흑인도, 하얀 담비 털을 목에 걸친 금발의 미녀도 없었다. 


물론 다 나름의 이유는 있다. 수시로 옮겨 다녀야 하는 Route 36은 실내 인테리어에 투자할 이유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어차피 이 곳의 단골들이 인테리어를 보고 분위기 잡자고 오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실 소유주가 경찰이라는 소문도 있지만 어쨌든 동네 택시 기사들까지 다 아는 장소에서 천년 만년 영업을 할 수는 없다. 적어도 몇달에 한번씩은 장소를 옮기는 성의 정도는 보이는 것이 애써 못 본 척 해주는 공권력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일 것이다.


해리와 자미르는 안으로 들어가 지저분한 소파에 앉았다. 소파 앞 테이블에는 담배 꽁초가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3 층이지만 지하로 내려온 느낌이었다. 곧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Route 36은 3 층에 있지만 창문이 모두 검은 테이프로 단단히 봉해져 있어 안에서 밖을 내다보는 것도,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는 것도 불가능했다. 지금은 밤이지만 낮에도 햇빛 한 점 들어올 것 같지 않았다. 


아마 밤낮의 변화를 알 수 없게 해둔 이유가 카지노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한 번 들어온 이상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 필요도 없이 그냥 머물러 있으면 되는 것이다. 이 곳을 나가는 이유는 단 하나, 돈이 떨어졌을 때 뿐이다.


왜 지하에 있어야 할 곳이 굳이 3 층에 자리를 잡고 지하 분위기를 흉내 내는지는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볼리비아의 많은 건물들은 지하에는 필요한 기초 공사만 하고 사람이 살거나 장사를 할 공간을 만들지 않았다. 


땅값 비싼 도시라면 지하 공간까지 임대해서 알뜰살뜰 임대료를 뽑아 먹어야 하겠지만 이런 동네에서는 지하를 파는 비용이 들어올 임대료보다 더 많이 들 수도 있다. 건물을 지을 때 한층 위로 올리는 것보다 땅을 파서 지하실을 만드는 것이 훨씬 더 비용이 많이 든다. 이 곳에서는 지상 면적도 다 임대가 안 나가는 판에 생돈 들여 지하를 팔 일이 없는 것이다.


함께 들어간 두 사람은 소파에 조금 떨어져 앉았다. 이제는 굳이 붙어 다닐 필요가 없어졌다. 뉴비라는 것이 들통나는 바람에 머쓱해 진 해리는 택시비에 더해 자미르 입장료까지 내주었다. Route 36의 입장료는 택시비와 같은 1인당 50 볼이었다. 


택시비에 자미르 입장료까지 합쳐서 한국 돈으로 대략 만 원 조금 넘게 낸 셈이다. 그래도 이만하면 가이드비 치고는 싸게 막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여기까지 만이다. 이제부터는 각자 도생의 길로 들어서야 한다.

EDM이 나오는 라운지의 소파에 앉아서 기다리자 영화 속의 금발 미녀 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신경 써서 뽑은 듯한 여종업원이 다가왔다. 


‘You want some beer?

맥주 할 거 에요?


‘Why not

맥주 하지 뭐’


You want some coke, too?

콜라도 드려요?


‘I love coke, yes, please

콜라 좋지. 주세요’


잠시 후 종업원이 파세냐 한 병과 콜라 한 잔을, 아니 아주 작은 봉지에 담긴 콜라 한 봉지를 가지고 왔다.


보통 식당에서 20 볼 받는 볼리비아 맥주 파세냐를 여기서는 50 볼을 받는데 콜라는 150 볼이었다. 왜 자미르가 200 볼을 이야기했는지 알 것 같았다. 한번에 200 볼 이상을 낼 일은 없다. 500 볼 짜리를 낸다면 그것으로 끝이다. 거스름돈을 가져오기만 기다리겠지만 그 종업원을 또 볼 일은 적어도 그날은 없을 것이다.


라파즈를 떠나기 전날 밤, 해리는 꽤 오랫동안 미루어 두었던 그 유명한 야경을 보기 위해 케이블카를 타러 갔다. 


처음 라파즈에 왔을 때 정해 놓은 날짜 보다 하루가 더 지났다. 아니, 일주일이 더 지났나? 날짜에 대한 감각이 점점 무디어지는 것을 느끼며 이 곳을 떠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니 떠나야 한다고 생각하고 나서 다시 며칠이 지났는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이 들 때마다 해리는 자신의 뺨을 때렸다. 처음에는 한 대 세게 치면 정신이 조금 돌아왔지만 곧 게스트 하우스 침대에 앉아 하염없이 뺨을 때리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다. 소름이 돋았다. 떠나야 했다. Now or Never, 이 말이 폐부 깊숙이 찔러 들어왔다. Now or Never.


케이블카에서 내린 해리는 택시를 타고 게스트 하우스로 돌아왔다. 아니 돌아왔다고 생각은 했지만 웬일인지 잠시 택시에 앉아있었다. 기사도 가타부타 아무 말이 없이 시동을 끄고는 기다려 주었다. 잠시 후 해리는 자신이 앉아 있던 택시 문을 여는 아는 얼굴을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마지막 남은 정신을 끌어 모아 택시 문을 닫은 해리는 기사에게 Go Go 하면서 소리를 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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