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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산블라스 언덕 -쿠스코, 첫 만남

예상 외로 남미의 버스들은 정시에 출발하고 제 시간에 도착했다. 생각해 보니 산티아고 같은 대도시를 제외하면 길이 막히는 경우를 거의 본 적이 없었다. 길이 막히지를 않으니 불가항력적인 사고만 아니면 대체로 시간 맞추어 버스들이 운행되었다. 


이른 아침 쿠스코 버스터미널에 도착한 해리는 터미널 앞에 줄지어 서 있는 택시를 잡아 타고 시내의 한인 민박으로 향했다. 아타카마 사막 이후에 오랜만에 묵어보는 한인 민박이었다. 우유니 소금사막 투어 중에도 한국 사람들을 만나 몇 마디 말을 섞기는 했지만 그래도 오랫만에 한국 말로 입담을 풀고 한식을 먹을 기회가 왔다. 


아침 9 시가 조금 넘어 민박 집에 도착한 해리는 바로 숙소에 짐을 풀고 샤워실을 찾았다. 대학생 시절이었다면 숙소에 짐을 맡기고 체크인 시간이 될 때까지 주위를 둘러보고 오거나 라운지에서 기다렸겠지만 지갑이 피곤한 거보다 몸이 피곤한 게 더 힘든 나이가 된 해리는 아예 전날부터 1인실 예약을 해 놓았다. 


여행 중이지만 처음 보는 사람들과의 약속을 앞두고 깔끔히 면도까지 마친 해리는 약속시간 보다 조금 이르게 아르마스 광장으로 향했다. 


‘아르마스 광장이라더니 역시나 성당은 안보이네’


시간도 남은 김에 광장 주변을 둘러보던 해리는 속으로 자신의 얕은 지식에 뿌듯해했다.


유럽과 남미 도시들 곳곳에는 대개 아르마스 광장이 있다. 아르마스는 스페인어로 무기를 뜻하는 말인데 이 명칭은 다른 도시나 국가들과 전투를 할 때 군인들이 집합하거나 무기를 만들던 장소에서 유래되었다. 


유럽의 광장은 도시별로 분위기는 유사하지만 그 유래에서는 차이가 난다. 많은 광장은 대성당 앞에 있다. 성당이라는 곳이 오늘날에는 종교 행사를 하는 건물에 불과하지만 당시 유럽에서 대성당을 짓는 것은 한 도시의 운명을 결정짓는 정치적인 일이었다. 


대성당이 있는 도시는 주교가 상주하는 지역 거점으로 종교적 거점일 뿐 아니라 정치와 상업의 중심지가 될 수 있다. 그래서 유럽 역사를 보면 이 대성당을 유치하기 위해 각 지역의 공작과 백작들은 자기 나라의 추기경이나 심지어 교황청을 등에 엎고 치열한 암투를 벌였다.


어렵게 따낸 대성당을 완성하기까지는 다시 수십 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대대로 영지를 세습하는 영주들은 자신이 끝을 못 보면 자식 대에 완성한다는 생각으로 공들여 성당을 지었다. 


물론 이들의 신앙심이 워낙에 두텁고 예술에 대한 열정이 더해져 그렇게 공들여 지었다고 믿고는 싶지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런 대역사에는 이권이 개입되기 마련이다. 대성당이 계획되면 돌을 캐는 채석장에서부터 추기경과 주교들의 빨대가 꽂히기 시작했다. 공들여 작업해서 어렵게 꽂은 빨대를 몇 년 만에 빼고 싶은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흐르고 대성당이 완공되고 나면 성당 앞에는 자재를 쌓아 두던 공터와 공터 주위를 둘러 수십 년에 걸쳐 형성된 상권이 그대로 남아 광장이 되었다. 바르셀로나에서 가우디가 짓다 말고 죽은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이 특이한 사례는 아니다. 원래 대성당은 그렇게 짓는 것이다.


물론 아르마스 광장이라서 성당이 안보인다는 생각은 완전히 틀린 것이었다. 명칭은 아르마스 광장이지만 광장 옆에는 바로 쿠스코 대성당이 있었다. 다만 그 외관이 해리의 눈에 유럽의 성당보다는 무슨 요새 건물처럼 보였을 뿐이다. 


잉카를 정복한 스페인은 잉카 제국의 창조신인 비라코차 신전을 허물고 그 토대 위에 카톨릭 대성당을 세웠다. 잉카 시절부터 광장이었던 이 곳에 스페인 군이 진을 치며 아르마스 광장으로 불리게 되었다.


약속한 시간 즈음에 카톡이 왔다.


‘어디 계세요?’


‘저 분수대 앞에 있어요’


‘저도요. 무슨 옷 입으셨어요?’


‘하얀 색 티에 베이지색 반바지 에요. 검은 색 아디다스 운동화’


순간 대학생 정도 되어 보이는 한국 여자 한 명이 해리에게 다가왔다. 꽤 큰 키에 아주 이쁘지는 않아도 눈매에서부터 독특한 분위기를 풍겼다.


‘안녕하세요’


‘아 네, 바로 뵙네요.’


‘잠시만요 한 분 더 오시기로 했는데 톡해볼께요.’


오픈채팅을 통한 여행자들의 접선 과정은 늘 비슷비슷했다. 잠시 후 또 한 명의 한국 여행자가 분수대로 다가왔다. 마추픽추를 함께 올라갈 일행은 이렇게 세 명이었다.


‘오늘 도착하셨으면 피곤하시겠네요’


‘아니에요 버스에서 그냥 푹 잤어요’


‘숙소는 어디에요?’


‘저기 아르마스 근처에 있는 한국 민박에 묵어요’


‘그러시군요. 식사 아직 안 하셨지요?’


‘네, 뭐 먹을까요? 전 진짜 여행 다니면서 신기한 것도 다 잘 먹어요.’


‘언니 저기 세비체집 갈까?’


‘그 집 좋지. 세비체 좋아하세요?’


‘아직 안 먹어 봤는데 오늘부터 좋아하면 되지요.’


‘그럼 거기로 가요. 바로 이 옆에 있어요.’


페루 전통 음식인 세비체는 생선회를 샐러드와 함께 레몬 즙에 적셔 먹는 일종의 회 무침이다. 세비체를 파는 식당은 아르마스 광장을 둘러싼 건물 2층에 있었다. 


‘창가자리가 없다네요,’


‘괜찮아요. 아르마스 광장은 이제 지겹게 볼 텐데요.’


자리에 앉아 이거 저거 메뉴를 고른 세 사람은 통성명을 하고 본격적으로 인사를 나누기 시작했다. 해리만 초면이고 이 둘은 이미 엊그제 만나 무지개산 비니쿤카까지 함께 다녀 왔다고 한다. 


‘비니쿤카 어땠어요? 힘들다고 다들 겁을 주던데.’


‘쿠스코에서 고도 적응하고 가면 갈 만해요. 걸어가면 힘들다고 해서 저희는 말 타고 갔어요.’


‘역시 고산병에도 금융치료가 잘 듣나 보네요.’


‘네 맞아요. 근데 말타는게 좀 비싸기는 해요.’


분수대에서 처음 만난 여자는 자신을 유투버하는 수하라고 소개했다. 


‘작년에 학교 졸업했고 유투브에서 주로 뷰티나 패션 아이템들 소개해요. 이번에는 여행 유투버가 됐네요.’


‘와 팔로워 많아요? 인기 많으시겠네요.’


‘아직 천 단위에요. 마추픽추 올려서 좀 늘었으면 좋겠어요.’


‘저는 승무원이에요. 이름은 혜미구요.’


뒤늦게 합류한 혜미가 자기 소개를 했다. 코로나 때문에 강제로 휴직 중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해리를 본 혜미는 그간 남미에서 숱하게 만난 퇴사자라고 생각했다. 절대 적어 보이지 않은 나이에 회사원 분위기를 풍기는 아저씨가 혼자서 쿠스코까지 왔다면 더 볼 것도 없었다.


‘우와 휴가가 50일이라구요?’


예상이 보기 좋게 빗나간 혜미와 수하가 탄성을 지르자 해리는 사람들을 만날 때 마다 되풀이했던 10년 차 휴가 이야기를 다시 한번 반복해야 했다.


조금은 밸런스가 어긋난 조합이지만 서로 간에 딱히 불만은 없어 보였다. 혜미와 수하가 볼 때 해리는 그냥 평범한 아저씨였다. 딱히 이상한 사람이거나 함께 다니기 불편한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사실 여행지에서 동행을 찾다 보면 이런 조합은 생각보다 흔하게 만들어진다.


식사를 마친 세 사람은 아르마스 광장 주변에 산재해 있는 여행사를 찾았다. 쿠스코에서 마추픽추를 가려면 몇 가지 버스와 기차편을 조합해야 한다. 쿠스코에 있는 현지 여행사를 가면 마추픽추까지 가는 교통편과 입장티켓까지 예약을 할 수 있다. 마추픽추는 유적지 보호를 위해 매일 정해진 인원만 입장시킨다. 


물론 하루 단위로 일정이 바뀌는 단체 여행객들이야 사전에 예약을 해야 하지만 하루 이틀 정도는 다른 것을 하면서 기다릴 수 있는 개별 여행자들은 그냥 쿠스코에 와서 예약을 하는 것이 보통이다.


막상 여행사에 가보니 마추픽추에 오르려면 이틀을 기다려야 했다. 모레 아침 일찍 여행사 승합차가 쿠스코 시내의 숙소를 돌며 여행객을 한 명씩 픽업할 것이다. 쿠스코 인근의 기차역으로 가서 기차를 타고 마추픽추 산 아래 마을까지 간다. 


여행사에서는 여기까지만 예약을 대행해주고 산 아래 마을에서 마추픽추 입구까지는 걸어 올라가던 버스를 타고 가던 각자의 선택이다. 물론 버스를 타면 마추픽추 바로 입구까지 편하게 데려다 준다고 한다.


예약을 마치고 나오려는데 노련한 사업가인 아주머니가 이들을 붙잡았다. 


‘마추픽추는 모레 가는데 내일은 뭐 하려고?’


‘음, 아직 생각 안 해봤는데 뭐하면 좋을까요?’


‘여기까지 와서 마추픽추만 보고 가려고? 비니쿤카니 성스러운 계곡이니 갈 데가 얼마나 많은데’


‘잠시만요 얘기 좀 해보구요.’


여행사 앞 좁은 골목에서 셋은 머리를 맞대고 의논을 시작했다. 해리도, 다른 두 사람도 딱히 다음날 계획은 없었다. 


‘내일 뭐 하는 게 좋을까요?’


‘저는 별로 특별한 계획은 없어요.’


‘비니쿤카는 다녀오셨다고 했지요?’


‘네, 언니랑 그저께 갔다왔어요. 다녀오니까 너무 힘들어서 어제는 그냥 쉬었구요.’


‘성스러운 계곡은 어떨까요? 성계투어가 있다는데.’


‘뭐 꼭 가야 하는 코스는 아니라는데 나쁠 것 같지는 않아요.’


‘그럼 내일은 성계에 갔다가 모레 마추픽추를 갈까요?’


‘네 좋아요. 그렇게 해요’


여행사에서 권하는 성계투어는 4륜 오토바이인 ATV를 타고 계곡 주변을 한바퀴 도는 것이었다. 버스 안에서 가만히 앉아만 있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다는 생각에 셋은 ATV 투어를 택했다.


모든 예약을 마치고 여행사를 나왔을 때는 아직 한낮이었다. 세 사람은 쿠스코 시내 구경을 시작했다. 쿠스코 시내에서 유명한 볼거리 중 하나는 잉카인들이 쌓아 올린 돌담이다. 집채까지는 아니지만 40인치 TV 크기는 너끈히 넘는 돌들을 바늘 하나 들어갈 여지도 안남기고 촘촘하게 쌓아 올린 벽이다. 


그 중 가장 유명한 돌이 12각돌이다. 이 돌덩어리가 유명해진 이유는 바로 12각 모서리 하나 하나마다 역시 남김없이 다른 돌덩이들로 꽉 맞물려서 채웠기 때문이다. 사실 12개의 모서리를 가진 돌이 그렇게까지 신기할 것은 없지만 쿠스코에서 12각돌을 찾아가는 이유는 이 돌 주위가 상점이나 식당, 카페들이 몰려 있는 핫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직 늦더위가 한창인 쿠스코에서 대낮에 돌아다니기는 너무 더웠다. 배부르게 식사를 하고 마추픽추 예약이라는 퀘스트까지 성공적으로 수행한 세 사람은 숙소에 돌아가 잠시 쉬었다가 저녁에 다시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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