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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산블라스 언덕 - 쿠스코에 남은 두 사람


쿠스코에 해리와 혜미 둘만 남았다. 수하는 마추픽추에 다녀온 다음 날 아침 일찍 비행기를 타고 리마로 떠났다. 이미 석 달 가까이를 남미에서 보낸 수하의 다음 여정은 쿠바였다. 리마에서 이틀을 머물고 아바나로 갔다가 귀국한다고 했다.


짧고 굵은 사흘을 함께 보낸 세 사람은 마추픽추에서 돌아오는 밴에서 내려 아르마스 광장에 선 채로 짧은 작별인사를 했다. 다시 어딘가에 들어가서 인사를 나누기에는 시간도 늦고, 너무 피곤했던 탓이다. 남은 두 사람은 수하의 유투브를 구독 신청하고는 귀국하면 영상부터 빨리 올리라는 말을 인사로 남기고 헤어졌다.


‘그저께 방에 여자 데리고 오셨어요? 밤에 여자 목소리가 크게 들리던데요.’


마추픽추에 다녀온 다음 날 아침이었다. 늦잠을 자고 싶었지만 한식으로 나오는 아침식사를 이틀 연속 포기할 수는 없었다. 느지막히 1층 식당으로 내려간 해리에게 스태프로 일하는 여자 분이 날선 목소리로 물었다.


‘아, 같이 투어 했던 동행분들이 오셔서 라면 끓여 먹고 금방 갔어요.’


‘게스트는 출입이 안되요. 앞으로는 꼭 지켜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다시는 안 그럴게요.’


아침밥을 먹다 말고 난데없이 훈계를 들은 해리는 조신하게 대답했다. 생각해보니 해리가 잘못했다. 민박집 공용 거실에 외부인을 함부로 데리고 들어가면 안되는 것이다. 2층을 통으로 쓰다 보니 별 생각없이 한 행동이다. 거기다가 신이 난 김에 음악까지 틀어 놓고는 자정이 다 되도록 마음껏 웃고 떠들었으니 단단히 민폐를 끼친 셈이다.


‘뭐, 또 그럴 일이 있을까.’


셋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긴 했지만 아직 혜미와 친해졌는지는 잘 모르겠다. 혜미도 왠지 해리와 둘이서만 이야기하거나 함께 걷는 것은 조금 꺼리는 눈치였다. 어제 수하와 작별인사를 하면서도 쿠스코에 둘만 남는 해리와 혜미는 다음날 뭘 할까 하는 이야기는 굳이 하지 않고 헤어졌다.


혼도 난 김에 아침상을 일찍 물리고는 방으로 돌아가 침대에 누운 채로 곰곰이 생각했다. 어떻게 할까? 폰을 꺼내 잠시 망설이다가 다시 폰을 내려놓고는 모자란 잠을 청하기로 했다.


굳이 먼저 연락은 안 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아직 다음 여정이 정해져 있지는 않았지만 리마에서 출발하는 귀국행 비행 편까지는 열흘 가까이 남아있었다. 근 두 달에 걸친 휴가도 이제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쿠스코에서 이삼 일 더 시간을 보내다가 나스카를 거쳐 리마로 가면 스케쥴이 딱 맞을 것이다.


공중에서만 보인다는 지상화를 보기 위해 경비행기를 탈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마음이 들뜨기 시작했다. 나스카 지상화, 마추픽추 못지 않게 남미에서 꼭 보아야할 곳이다.


마추픽추 도장 깨기에는 성공했지만 쿠스코 인근에는 아직 무지개산 비니쿤카 같은 유명한 포인트들이 더 남아있었다. 사흘을 정신없이 재미있게 보냈으니 이제 혼자만의 차분한 시간을 갖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아무도 없는 민박집 2층은 고요하기만 했다. 해리는 딱 점심때 까지만 더 자기로 하고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혜미는 정오가 다 되도록 이불 속에 있었다. 역시 사흘 간의 강행군을 마치고 나니 온몸이 쑤시고 아팠다. 아침이 되자 도미토리의 다른 여행객들이 들고 나가는 소리에 잠은 깼지만 눈은 떠지지가 않았다. 조용히 눈을 감고 누워 있는 사이에 다시 사방이 조용해졌다.


침대 6개가 나란히 있는 방에는 혜미까지 총 4명이 있었다. 칠레에서 왔다는 대학생 두 명과 눈 인사만 하고 특별히 말을 나누지는 않아 어디서 온 누구인지는 모르는 금발머리 여자 하나. 이들이 나가고 난 도미토리에 다시 적막이 찾아왔다.


잠시 선잠이 들었다가 깬 혜미가 기지개를 키며 몸을 뒤척였다. 갑작스레 허벅지 쪽에 찌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악하는 소리와 함께 벌떡 일어나 이불을 들쳐보니 잠옷삼아 입은 반바지 아래로 여전히 시퍼런 멍이 보였다. 어제보다 색깔이 조금은 옅어진 듯 보였지만 여전히 건드리면 아팠다.


‘하긴 네발 달린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 뒤집혔으니 이것도 교통사고는 교통사고지.’


어쩌다 보니 여태 파스 하나 못 사 붙이고 그냥 참아 왔다. 쿠스코 약국에도 물파스는 있겠지만 사고가 난 그제와 마추픽추에 다녀온 어제는 도통 약국을 찾을 짬이 안났다.


오늘은 여유가 있으니 약국부터 찾아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고는 다시 침대에 누웠다. 침대에 다시 눕긴 했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온몸이 뻐근하고 피곤한 와중에도 마음이 싱숭생숭하면서 약간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어제와는 다른 오늘, 딱 그거였다.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를 지난 사흘과는 달리 오늘은 아무런 약속도, 일정도 없다.


산블라스 언덕에서부터 성스러운 계곡으로, 꾸이 구이집, 라면과 피스코, 그리고 마추픽추 정상과 오얀따이땀보 시냇가의 카페로 이어졌던 일들이 갑자기 꿈같이 느껴졌다. 정신없이 달리는 청룡 열차 안에서 눈을 감고 으아악 소리를 지르다가 눈을 떠보니 내 방 내 침대인 것 같은 그런 느낌.


갑자기 정신이 든 사람처럼 혜미는 휴대폰을 꺼내 보았다. 해리와 수하가 있는 단톡방에는 아무 새로운 메시지 표시가 없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톡방에 들어가 보았다.


어제 밤, 늦은 시간에 아르마스 광장에서 작별인사를 한 후에도 아쉬운 마음에 숙소에 가서 주고받은 톡들이 잔뜩 있었다. 먼저 떠나는 수하가 남긴 진한 아쉬움과 작별인사, 조심히 가라며 한국 가면 꼭 다시 보자고 남은 두 사람이 보낸 톡들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오늘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다. 단톡방 말고는 해리가 보낸 톡은 따로 없다. 아니 두 사람은 그동안 개인적으로 톡을 주고 받은 적이 한번도 없었다. 해리와의 대화는 언제나 셋이 있는 단톡방과 셋이 만났을 때의 대화가 전부였다.


그거 말고도 새로운 톡은 많았다. 엄마에게 온 톡과 가족 단톡방의 새로운 메시지 6개 표시, 친구들, 그리고 우진에게 온 메시지. 우진의 톡방에는 5라는 숫자가 선명했다. 안 열어봐도 어떤 이야기일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잠시 망설이다 해리에게 카톡을 보냈다.


혜미에게 카톡이 왔을 때 해리는 아르마스 광장 남쪽에 위치한 코리칸차 박물관에 있었다.


코리칸차는 잉카의 태양신을 모시던 신전이다. 물론 태양 신전은 스페인 정복자들이 진작에 모두 허물어 버렸고, 잉카의 창조신인 비라코차 신전을 허물고 세워진 쿠스코 대성당과 마찬가지로 태양신전이 있던 자리에는 산토 도밍고 성당이 들어서 있다.


정복당한 신의 기운은 정복한 신의 기운으로 누르는 것일까? 그래도 정복자 스페인은 패배한 태양신의 마음을 조금은 달래 주려는 듯, 산토 도밍고 성당 바로 옆에 코리칸차 박물관을 세워 태양신과 잉카 유적을 전시했다.


머나먼 쿠스코까지 와서 굳이 자그마한 박물관을 찾은 이유는 별로 할 일이 없기 때문이었다. 해가 중천이 되어서야 민박을 나온 해리는 아르마스 광장 옆에 있는 카페에서 커피 한잔을 마시며 오늘 할 일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딱히 생각나는 것은 없었다. 오전에 생각했던 비니쿤카는 아침에 눈 뜨고 바로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마추픽추와 마찬가지로 사전에 예약을 하고 아침에 숙소로 픽업오는 버스를 타고 가야 하는 해발 5천미터의 고산 트레킹 코스였다.


비니쿤카 생각이 난 해리는 페루 오픈 채팅방에 들어가서 비니쿤카 투어 동행을 구하는 사람이 있는지 찾아보았다. 페루방과 남미방을 모두 훑어보았지만 내일이나 모레 가자는 사람은 없었다. 모두 엊그제 끝난 일정이거나 사나흘 뒤에 간다는 사람들만 있었다.


해리는 직접 비니쿤카 동행을 구한다는 글을 올리려고 하다가 조금 이상한 느낌이 들어 그만 두었다. 페루와 남미 오픈채팅방에는 남미를 여행 중인 혜미도 당연히 들어와 있고 수시로 확인을 하는 곳이다. 애초에 세 사람이 만난 곳도 이곳 페루 오픈채팅방이었다. 비니쿤카 동행을 찾는 글을 올리면 당연히 혜미도 볼 것이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친 해리는 막 작성하려던 문장을 지우고는 오픈채팅방에서 나왔다. 어제 이후로 혜미와 한번도 따로 연락을 하지는 않았다. 숙소에 들어가 잠자리에 들기 전까지 주고받은 단톡방에서도 오늘과 이후에 대한 이야기는 서로 약속이나 한 듯이 하지 않았다.


이렇게 조용히 마무리되는 것일까? 그리고 한국에 가서 연락이 닿으면 수하와 다시 셋이 만나려나? 아마 그러지 않을 확률이 더 높았다.


혼자 다니는 여행자들은 여행지에서 무수히 많은 사람들과 만났다 헤어진다. 혼자 있고 싶지는 않은 순간에 함께 있어준 것만으로 고마운 이들과 어울려 그 순간을 즐기지만 스쳐가는 여정을 굳이 부여잡고 맞추려 드는 경우는 드물다. 대개 ‘한국에서 다시 봐요’, ‘연락할게요’ 라는 말을 작별인사처럼 남기고 헤어진다. 그리고 각자의 폰으로 찍은 사진을 묶음 사진으로 공유한 후에 다시 말을 거는 경우는 드물다.


그보다 더 이어지고 싶은 인연이었다면 그런 고민을 할 것도 없이 두 사람은 이미 함께 있을 것이다.


‘아저씨, 이따가 쇼핑하러 갈래요?’


그래도 지금 바로 다른 동행을 찾는다고 글을 올리는 것은 조금 예의 없어 보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던 순간, 혜미에게 카톡이 왔다. 미리보기로 대강 내용을 파악한 해리는 잠시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박물관 정원의 벤치에 앉았다.


사실 자연스러운 흐름일지도 몰랐다. 지난 사흘간 같이 달린 혜미도 오늘은 늦잠을 잤을 것이고, 아마 특별한 일정은 없을 것이다. 며칠 전부터 혜미는 가족과 친구들 선물을 산다며 돌아다녔지만 아직 사지는 않았다. 오늘 같이 한가한 날에 몰아서 쇼핑을 하려는 것이 당연한 것일 수도 있다.


여기서 해리가 다른 일정이 있다거나 선약이 있다고 한다면 아마도 둘 사이의 인연은 이것으로 마무리될 것이다.


순간 망설였다. 꼭 다시 봐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차피 해리도 오늘 특별한 일은 없다. 딱히 살 것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함께 쇼핑을 하고 저녁이라도 같이 먹을 사람이 있으면 좋을 것 같다.


잠시 뜸을 들인 후 답장을 보냈다.


‘좋지요. 지금 박물관에 와있는데 몇 시에 볼까요?


‘저 조금 전에 일어나서 아직 아무 준비도 못했어요. 식사 먼저 드시고 3시쯤 어떠세요?’


‘좋아요. 그럼 3시에 분수대에서 봐요.’


‘네 이따 뵈요~’


갑자기 할 일이 생긴 해리는 시계를 봤다. 이제 막 한시가 조금 넘었다.


‘진짜 피곤했나 보네’


남은 시간 동안 점심이나 먹을 생각으로 구글맵을 켜고 주변 음식점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한 시가 다 되어서야 침대 밖으로 나온 혜미는 먼저 해리와 카톡을 주고 받고는 근처 중국 식당으로 갔다. 주문을 하고 자는 동안에 한국에서 온 카톡을 모두 꼼꼼히 읽었다. 부모님이나 우진에게 전화를 하고는 싶었지만 페루에서 점심이면 한국은 새벽이다. 모두들 한국 시간으로 그날 자정에 메시지를 보낸 것이다.


점심을 먹고 나서는 약국을 찾아야 했다. 밥 먹고 약국에 들렀다가 숙소로 돌아와 파스를 바르고 세 시까지 아르마스 광장으로 다시 나오려면 시간이 빠듯했다.


현지에서 치파라고 불리는 중국식당은 남미 어디를 가나 흔했다. 이제는 밥이 좀 먹고 싶어 치파를 찾은 혜미는 마침 나온 볶음밥을 빠르게 흡입하면서 부모님에게 온 카톡부터 답장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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