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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하나 Apr 04. 2021

종이 빨대가 바다를 살릴 수 있을까

넷플릭스 오리지널 다큐멘터리 <씨스피라시>



바다를 터 삼아 평생 먹고살겠다고 한국을 떠나 태국 남동부 외딴섬으로 떠난 게 5년 전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바다에 뛰어들어 해마다 나를 찾는 고래상어를 알아볼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다이빙을 하지 않는 사람들은 백이면 백 “다이빙하면 상어에 물리지 않느냐”라고 묻는데 그럴 때마다 <죠스>를 만든 스티븐 스필버그가 원망스러울 정도다. 한 해에 상어에 물려 죽거나 다치는 인간은 백 명도 안 된다. 그에 비해 인간이 돈을 위해 죽이는 상어는 수백만 마리다. 이제는 하도 잡아 잡힐 것도 없다. 상어는 죽어 마땅한, 나쁜 해양 생물이란 이미지, 다시 한번 상어를 잘 알지도 못하면서 어설프게 다룬 영화감독이나 미디어, 언론을 원망할 뿐이다. 다이버로 내가 매일 마주한 바다는 생명, 그 자체다. 하지만 늘 ‘당장 급하지 않은’ 일이다. 왜냐하면 보통 사람들은 바닷속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엔 놀랄 만큼 무뎌지기 때문이다. 


다이버들은 매일같이 바닷속에 뛰어든다. 바다를 나와도 해변에서 빈둥댄다. 잠자는 시간에도 바다를 꿈꾸는 우리는 지금 이 지구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우리는 일주일에 한 번쯤 다이브 센터에서 맥주를 마시며 대형 스크린으로 다큐멘터리를 본다. 다이버 커뮤니티 사이에서 회자되는 <체이싱 코랄> <블루 플래닛> <나의 문어 선생님> 같은 작품들이다. (<블루 플래닛>을 제외한 두 편은 모두 넷플릭스에서 만나볼 수 있다.) 이미 같은 걸 수십 번 본 우리들이 여전히 플레이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동안 바닷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못 보고 평생 살았던 새로운 다이버가 우리의 커뮤니티에 조인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새로 탄생한 다이버들이 마지막 희망이라 생각한다. 그동안 우리가 직접 목격한 모든 것을 다이빙 코스에 녹여 환경 문제와 해결 방안을 가르친다. 그리고 경험 많고 경력이 오래된 나 같은 시니어 급 다이빙 강사들은 모든 다이버들에게 롤 모델이 되어야 한다. 


인간이 피부를 보호하기 위해 바르는 선크림이 바닷속 산호를 죽이고, 인스타그램에 한 번 올리겠다고 찍는 사진을 위해 물고기를 모이게 하려고 먹이를 주는 행위가 결국 물고기를 죽이게 하는 행위라는 걸 알린다. 근본적으로 모든 건 인간의 탐욕 때문이다. 그래서 선크림을 쓰지 말고 자외선에 노출돼 고통받으란 게 아니다. 근본적인 문제를 알면 솔루션은 언제나 찾을 수 있다. 요즘 우리는 바닷속 산호를 파괴하지 않는 성분으로 만든 선크림 브랜드를 교육생 다이버들에게 알리고 권한다. 플라스틱 사용 자제를 위해 섬 곳곳에 물을 리필할 수 있는 스테이션을 만들고, 일회용 플라스틱 물병 대신 재사용 물병을 가지고 오면 무료로 물을 이용할 수 있도록 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주기적으로 해변으로 떠밀려온 플라스틱 쓰레기를 줍고 모래사장에 버려진 담배꽁초를 줍는다. 


어떤 몰지각한 인간들은 에메랄드 빛 바다를 보러 지구 반 바퀴를 날아온 건 자신들이면서도 조류의 방향 변화로 해변에 떠밀려온 쓰레기를 보고 “이 섬은 관광지라 황폐화됐네, 이제 여기 오면 안 되겠네.” 같은, 정말 뭣도 모르는 소리를 떠들고 있다. ‘이 해변의 플라스틱 쓰레기가 너희 나라에서 네가 버리고 온 걸지도 몰라, 정말 모르는 거야.’ 하지만 나는 이 말을 소리 내어 하진 못한다. 그저 마음이 아플 뿐이다. 


바다를 사랑하고 거기에 기대어 사는 사람으로서 가끔씩 나는 너무 ‘날로 먹는다’는 생각으로 양심에 가책을 느낄 때가 있다. 바다,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은, 그저 ‘스스로 그러한’ 자연을 통해 생계를 이어가는 돈을 번다는 게 늘 나를 더욱더 겸손하게 한다. 바다가 화나 태풍이 휘몰아치면 항구에 정박되어 출렁이는 배들을 보며 인간이 자연 앞에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 다시금 깨닫는다. 하지만 내가 계속 도시에 살았다면, 죽을 때까지 깨닫지 못했을 당연하고 단순한 진리이기도 하다. 



3월 24일 공개된 넷플릭스 오리지널 다큐멘터리 <씨스피라시>의 감독 알리 타브리지(Ali Tabrizi) 역시 그렇다. 나처럼 바다를 사랑하고 고래를 꿈꾸며 해변에 떠밀려온 쓰레기를 청소하고 플라스틱 빨대 대신 종이 빨대를, 플라스틱 백 대신 에코 백을, 플라스틱 물병 대신 재사용 물병을 쓰는 평범한 청년이다. 이미 실천과 행동에 앞장서고 있으나 풀리지 않는 질문들이 그를 괴롭힌다. 알리는 보이지 않는 바닷속에 실타래처럼 교묘하게 엉켜있고 서로가 서로를 뒷받침하는 바다 파괴의 주요인들을 따라 일본을 비롯해 태국, 스코틀랜드까지 여행한다. 결국 ‘바다(Sea)’와 ‘음모(Consipiracy)’를 결합한 제목처럼 바다를 둘러싼 세계 각국의 정부와 국제기구들의 비리와 은폐를 폭로하는 문제적 다큐멘터리가 되었다. 그저 플라스틱을 줄이면 될 줄 알았던 바다 환경 문제가 국제적으로 거대한 정치 세력과 글로벌 기업의 이익 활동과 연관되어 있다니! 감독은 당혹감과 허탈감을 감추지 못한다. 









돌고래들을 몰아넣고 대학살을 자행하는 일본 타이지의 검붉은 피바다를 시작으로 감독의 시선은 샥스핀 때문에 한해에만 수백만 마리 이상 희생되는 상어들을 따라 홍콩으로 향한다. 먹이사슬에서 최고 포식자인 상어가 사라지면 어떻게 되는지 간과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이후 감독은 바다의 쓰레기 중 플라스틱은 1%도 차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플라스틱이 물론 문제이긴 하지만 더 큰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바다에 떠다니는 쓰레기 반(49%)은 상업 어선들이 물고기를 잡기 위해 사용하고 바다에 버린 플라스틱 어망이다. 이쯤 되니 감독은 배신감이 느껴진다. 전 세계 수많은 바다 환경 단체들이 이 문제에 함구하고 플라스틱 사용에만 호들갑 떠는 걸 이해하지 못한다. 환경 단체와 글로벌 해산물 가공 기업은 검은 커넥션이 있다. 감독은 더 나아가 대형 상업 어선들의 저인망 어업, 부수 어업(8마리의 참치를 잡기 위해 45마리의 돌고래가 아무 이유 없이 부수 어획으로 죽이고 버려진다), 불법어업, 어업 노예 노동 착취 문제를 짚어낸다. 그리고 그의 발걸음은 결국 전통적인 포경업으로 고래의 씨가 말라버리는 요즘, 대안으로까지 제시되는 스코틀랜드의 피바다로 귀결된다. 지구 반대편에서 버린 플라스틱 쓰레기 하나가 내가 사는 섬까지 떠밀려오듯 모든 건 연결되어 있고 죽어가며 신음하는 바다는 다음 차례는 인간이라 경고하고 있다. 이 경고가 너무나 선명한데 정보가 넘쳐흐르는 현대 사회에서도 모른다, 상관없다 해버리면 정말 우린 희망이 없는 것이다.


적나라하고 직설적인 감독의 스타일은 말 그대로 빵빵 때려 붓는다.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기로 작정하고 만든 다큐멘터리이다. 넷플릭스에 공개되자마자 다큐멘터리 부문 1위에 올라서니 여기에 인터뷰이로 출연한 ‘플라스틱 오염 연대’ ‘지구 섬 협회’ ‘오세아나’ 같은 비영리 환경단체들이 자신들의 인터뷰 내용이 왜곡되어 편집됐다고 주장하며 논란이다. 나는 이에 반대한다. 다큐멘터리는 뉴스가 아니다. 감독의 메시지가 있고, 그의 주장을 뒷받침할 자료나 증거를 쓰는 데에 있어서 일관된 방향성이 있는 게 당연하다. 자신들이 하지도 않은 말을 만들어 썼다면 문제이지만, 다큐멘터리에서 환경 단체 관계자들의 인터뷰는 왜곡되지 않았다. 


우리는 마음만 먹으면 지구 반대편, 혹은 남극이나 북극에서 갓 잡아 올린 해산물을 식탁에 올릴 수 있는 시대를 살고 있다. 저녁 시간이 지날 때 즈음, 홈쇼핑에선 노르웨이산 피시 오일로 만들었다는 오메가 쓰리를 파는 데 혈안이 되어있는 쇼 호스트를 심심치 않게 만날 수 있다. “맛있겠다, 노르웨이산 연어래.” 우리가 젓가락으로 집어 든 그 연어 한 점은 오폐수와 오가닉 폐기물로 가득한 거대 양식장에서, 알을 낳기 위해 그 험난하고 거센 조류를 거슬러 집으로 돌아간다는 연어가 고향으로 돌아가는 대신 일평생 원만 돌며 뱅글뱅글 헤엄치다 잡힌 회색빛 살점이다. 상품 가치를 위해 비즈니스 맨들은 여기에 넣을 주황색 색소의 농도를 컬러 차트를 보고 결정한다. 해산물뿐 아니라 우리 식탁에 올라오는 모든 먹거리들이 어디서부터 어떤 과정을 거쳐 오는지 생각해야 한다. 인간이 돈과 이익을 위해 욕망에 가득 찬 우리의 식탁 위에 음식을 올려놓기까지 무슨 짓까지 하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 하지만 쉽지 않다. 식탁에 오른 음식은 너무 맛있고, 새벽 배송, 총알 배송으로 손가락 터치 한 번이면 모든 게 너무 빠르다. 문 앞에 배달된 식재료를 받고, 먹고 난 쓰레기는 문 앞에 둔다. 우리는 보이는 것만 본다. 도시에 사는 사람들일수록 더 그렇다. 



죽어가는 바다를 위해 플라스틱 사용을 줄이고 재사용 물병을 들고 다니는 것도 중요하지만, 전 세계적으로 ‘눈 가리고 아웅’ 식으로 지속되는 무분별한 어획을 막지 않으면 종이 빨대는 절대로 죽어가는 바다를 살릴 수 없다. 지금까지 내가 본 대부분의 환경 관련 다큐멘터리나 과학자들의 논문에선 이대로 가다간 2050년까지 바닷속 산호도, 물고기도 모두 씨가 말라 바닷속은 그야말로 ‘무덤’이 될 거라 경고한다. 종이 빨대가 썩기도 전에 바다가 죽어버릴지도 모른다. 바다가 죽으면 다음은 바로 인간의 차례다. 우리는 이 경고를 충분히 받아왔다. 더 이상 몰랐다고 핑계 댈 수도 없다. 기억하자, 2050년. 그럼에도 누군가는 여전히 집을 사고 주식을 하며 슈퍼카를 꿈꾸고 명품백을 들었다 놨다 할 것이다. 재개발, 규제 풀고 돈 잘 벌게 해 주겠다는 시장 후보를 뽑을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 파괴와 소멸, 팬데믹의 시대, ‘어떻게 살 것인가’는 개인의 선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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