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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하나 May 08. 2024

숲으로 간 고래

어느 도시파업자의 무해한 욕심. 


도시파업자의 무해한 욕심




“이 책은 도시파업자가 바다에서 완성한 무해한 욕심에 대한 이야기다.”     


제가 서울에서의 패션지 에디터로서의 삶을 정리한 이후, 태국 남동부 작은 외딴섬에서 다이버로 살며 쓴 책 <서울에서 도망칠 용기>를 펴낼 때 후배 에디터 예진이가 써준 추천사의 한 문장입니다. 이 문장에서도 특히 ‘도시파업자’라는 단어가 저에겐 늘 반짝거려요.      


도시에서 나고 자란 저는 한 번도 선택권을 가져본 적이 없었습니다. 어떤 곳에서 어떻게 살고 싶은지 생각해 본 적도 없었어요. 그저 그 견고하고 촘촘한 도시의 생태계에서 낙오되지 않으려, 온전히 살아남기 위해 모든 걸 쏟아붓기만 했던 저를 멈춰 세운 건 바로 까만 밤하늘에 쏟아진 별빛이었습니다. 모순적이었어요. 인위적으로 밝힌 도시의 빛에 눈이 멀어 밤은 자고로 어두워야 하고, 그 어둠이 짙을수록 별과 달이 빛난다는, 그 단순하고도 자연스러운 이치를 아주 오랫동안 잊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도시에 사는 동안 저는 밤이 되어도 잠들지 못했고, 그 인공의 빛을 차지하기 위해 목적지 없는 길을 끝도 없이 달리며 혹여나 그 빛이 내 것이 되진 않을까 전전긍긍하며 살았나 봅니다.      


태어나 처음 바닷속에 들어가 숨을 쉬고 나온 날, 일본 이시가키섬 해변을 걸으며 새까만 밤하늘과 반짝이는 별빛에 압도되었습니다. 초현실적인 느낌이었어요. 온 우주에 저만 있는 것 같은데 전혀 낯설거나 무섭지 않았죠. 불과 하루 전까지만 해도 저는 서울이라는 도시가 상징하는 삶에 갇혀 있었어요. 인터넷 속도가 조금이라도 느려지면 초조해지고, 잠시라도 존재에 대한 자기 증명을 하지 않으면 불안을 견딜 수 없어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에 매달려 지내던 전형적인 도시인이었지요. 저뿐만 아니라 도시에 사는 모든 사람이 ‘지금, 이게 맞아?’ 하면서도 누구도 멈추지 않아 더 미쳐 돌아가는 눈치 게임을 하며 스스로 가혹한 세상을 만드는 데 일조하거나 적어도 방조하고 있었습니다.      


적당한 때를 알고 찾아온 단절은 축복입니다도시의 빛 공해가 없어 온전히 어둠으로 내려앉은 밤, 자연의 이치에 따라 달과 별이 빛을 뿜던 밤, 그 밤이 제 삶엔 참 간절했거든요. 거대한 우주에서 한 톨의 먼지만큼도 안 되는 저 자신을 대면했던 그 밤, 어쩌면 저는 그래서 더 자유로워질 수도 있겠다는 용기를 얻었습니다. 도시 문명과의 단절이 축복이 된 그날 밤도시에서 나고 자란 제가 태어나 처음으로 도시에서의 삶을 의심하기 시작했으니까요     







덜 존재하는 삶
 

사람이 선 곳이 바뀌면 풍경이 바뀐다고 하지요. 도시로 돌아온 이후, 저는 태어나고 자라 모든 게 너무 당연해서 단 한 번도 제대로 돌아본 적 없었던, 제가 사는 환경을 관찰하기 시작했습니다. 눈을 뜨고 침대에서 벗어나 마주치는 풍경과 사람들, 그리고 다시 침대로 돌아와 하루를 마무리하는 제 모습을 하나씩 뜯어봤죠. 저는 늘 누군가의 시선을 의식하고 무언가에 쫓기며 끊임없이 평가받고 있었어요. 정작 저를 감시하고 쫓거나 평가하는 실체는 어디에도 없었는데 말이죠. 저에게 서울이라는 도시는, 없던 환영을 만들어서라도 끊임없이 쉬지 않고 누군가, 그리고 스스로와 싸우게 만드는 외롭고 서글픈 곳이었어요. ‘멜랑꼴리 한 낭만’이라는 위안도 습관이 되어 영혼을 잠식하는 불안이 되어버렸지요.      


잘 모르겠어요. 그때 서울을 떠날 수만 있다면 어디든 갈 작정이었는지, 아니면 제가 가려던 곳이 꼬따오라는 섬이었기에 서울을 떠날 수 있었는지는. 하지만 태어나 처음으로 제가 살 곳을 스스로 선택했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어요. 한 번도 의심해 본 적 없는 도시에서의 위태로운 생존 대신 하루하루 살아있음에 감사하고 축하할 수 있는 삶이 있다면 저는 위험을 감수해 보기로 했습니다. 매일 아침 출퇴근길 전철 안에서 바라보던 서울의 밤을 수놓은 아파트의 불빛이 선망 가득한 아름다움에서 서슬 퍼런 욕망으로 변해갈 무렵, 저는 기어코 서울을 떠나기로 결심했습니다. 서울이라는 공간과 그곳을 채우는 사람들과의 지속적인 상호 작용으로 채워진 저란 사람 자체를, 너무 늦어 손 쓸 수 없어지기 전에 바꿔보고 싶었어요.       


서울을 떠나고 나서야 알았습니다. 도시의 삶에 익숙해지기 위해 제가 한 노력은 허망했단 걸. 문밖을 나서는 순간부터 나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위해 꾸미고, 자꾸만 무언가를 사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쓰지도 않고 쌓아만 둘 물건들을 사기 바빴지요. 서울의 패션과 문화를 뒤덮었던 ‘에코’와 ‘웰빙’이라는 키워드마저도 더 많은 소비와 효율의 진작을 위한 상술에 불과했고, 도시의 물질만능주의는 더욱 미쳐 돌아갔습니다. 편리함과 효율성이 최고의 덕목인 도시에서 나조차 편리하고 효율적인 인간이 되도록 강요받고 있는 것도 모른 채 원하는 건 무엇이든 빠르고 편하게 얻을 수 있는 도시의 미덕이 공허함으로 변하는지도 모르고스스로 … … 를 외치며 스스로 들볶았어요     


물론 저 역시 밤 한강을 수놓은 아파트 불빛 중 하나를 마음에 품어본 적이 있습니다. 언젠가부터 그 불빛을 흠모하고 욕망하는 제 마음의 건강하지 못한 상태를 알아채기 시작했죠. 과연 인생의 남은 시간 전부를 바치고 걸어서 가질만한 가치의 불빛인가에 대한 답은 저마다 다를 겁니다. 그 불빛이 일생의 목적이라 해도 저는 그 사람을 비난하지 않아요. 하지만 저에게만큼은 그 불빛의 경제적 가치를 끝없이 세뇌시키는 도시의 삶이 극심한 고통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만큼 강하지 못하고 무리에서 낙오된 실패자가 될까 봐 솔직하게 이야기하지도 못했죠.      


어렸을 적 토목건축 일을 하는 아빠에게 물은 적이 있습니다. 고층 아파트의 한 칸을 분양받는 건 하늘의 소유권을 갖는 거냐고. 어린 눈에는 그게 얼마나 비싼지도 모른 채 그저 허망한 하늘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걸로 보였나 봅니다. 지금도 저에겐 왜 사람들이 평생을 담보로 은행에서 빌린 돈으로 박스 한 칸을 얻고는 층간소음으로 다투고 비슷한 평수끼리 편을 먹고 서로를 갉아먹는지 이해할 수 없지만, 저는 귀를 막고 눈을 가리고 저만의 삶에 집중하기로 합니다. 온 영혼을 끌어다 아파트 불빛 하나 분양받는 계약서에 서명하는 대신 저는 온 우주의 달빛과 별빛, 세상의 다양한 사람들, 엄청난 여행과 모험을 선택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눈을 뜨면 바다와 산이 보이는 작고 외딴섬으로 떠났습니다. 그제야 깨달았어요. 저는 자연과 가까이 살아야 하는 사람이란 걸. 아니, 인간은 본래 자연과 가까이 살수록 자연(自然, 사람의 힘이 더해지지 아니하고 세상에 스스로 존재하거나 우주에 저절로 이루어지는 모든 존재나 상태)스럽다는 걸. 아이러니하게도 도시에서 나고 자란 저는 경쟁과 비교에 특화된, 스트레스가 주는 아드레날린에 중독된 사람이었습니다. 그 스트레스마저 자기 계발과 성장에 자양분이 된다는 사회 시스템에 가스라이팅되어 저는 부자연스럽고 이치에 맞지 않는 삶을 억지로 살아오고 있었어요. 자연 속에 들어오기 전까지 저는 제가 굉장히 적극적이고 진취적이고 호전적인 사람인 줄 알고 살아왔습니다. 자연 속에 들어와서야 오랫동안 제가 우울증과 불안장애에 고통받고 있었단 걸 알아챘습니다. 도시에선 스스로 상태를 살필 엄두도, 그걸 솔직하게 마주하고 드러낼 용기도 없었으니까요. 



그러자 비로소 제 삶이 다시 보이더라고요. 하루를 살기 위해 저에게 진정 필요한 것을 따져보기로 했어요. 아침에 일어나 간단하게 아침을 먹고 운동과 명상을 하고, 스쿠터를 타고 5분 정도 달려 다이빙 센터에 일을 하러 갑니다. 일을 마치면 선셋을 배경으로 해변을 걷고 역시 간단한 저녁을 먹죠.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을 만큼의 물과 음식, 단출한 옷 한 벌, 침대 하나면 충분했습니다. 그제야 제가 어떤 라이프스타일에 맞는 사람인지, 어떻게 사는 게 행복한 사람인지, 무엇을 원하는 사람인지, 또 앞으로 어떻게 살고 싶은 사람인지 알게 됐어요. 더 이상 쓰지 않는 신용카드와 메이크업 제품, 화려한 옷가지, 부탁할 일이 없으면 웬만해선 연락도 않는 연락처를 정리하기 시작했습니다. 


역설적으로 이 모든 건 도시에서의 삶이 있었기에 가능한 깨달음이었어요. 자연 가까운 곳에서 나고 자랐다면 오히려 반대로 도시의 삶을 선망하며 살았겠죠. 매일 같이 바닷속에서 하루의 반 이상을 보냈던 태국 남동부 작은 외딴섬 꼬따오에서의 시간은 저에겐 삶의 본질에 가장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바다라는 자연 속에서 저는 먼지보다 작은 존재임과 동시에 우주만큼 거대한 존재라는 걸 알게 됐습니다. 비에 젖지도, 추위에 얼지도, 파도에 흔들리지도 않는 넓은 바다의 성품을 배웠습니다.      







숲으로 간 고래


수년간 바닷속에서 살던 저는 얼마 전 한국의 깊은 숲 속으로 돌아왔습니다. 망망대해를 헤엄치던 고래 한 마리가 숲으로 온 거죠. 바닷속과 숲 속의 압력 차에 시차까지 적응 중입니다. 숲 속엔 바다 대신 호수가 있어요. 바다가 그립지만 곁으로 갈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한 고마운 선물입니다. 호수는 파도도 폭풍도 없어 더 고요해 자신을 비춰보기 훨씬 좋아요. 스스로 알아채는 깨달음의 과정은 도심 속이든 바닷속이든 정글 속이든 숲 속이든, 어디서든 이뤄집니다.      


계절에 따라 꽃과 나무가 옷을 갈아입고 고라니가 뛰어다니며 바람이 노래하는 숲 속에서 저는 매일 같이 성장하고 자기를 계발하며 ‘플러스’ 수치를 기록하라는 도시의 속삭임으로부터 멀찌감치 거리를 둡니다. 바다가 저에게 그러했듯 숲은 늘 관대합니다. 제가 온전히 느끼는 모든 감정은 숲에 스며들고, 숲은 제 감정을, 그리고 저를 품어주죠. 제가 우울한 며칠 동안 거무튀튀했던 숲은 제가 생기를 되찾으면 뽀얀 초록색으로 옷을 갈아입고 온갖 꽃들로 치장합니다. 제 기분과 마음 상태에 따라 숲의 낯빛도 변해요. 도시에 살 땐 안 그랬어요. 도시의 콘크리트 벽은 제 감정을 그대로 받아 쳐내기만 했죠. 도시에서 저는 그 반사된 감정에 더 우울해지거나 괴팍해기지만 했습니다.      


숲 속 생활은 내가 먹고 버린 것을 직접 태우며 내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끊임없이 자신의 내면을 탐구할 수 있는 곳입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고요한 숲 속의 공기가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를 울려 퍼지게 하고, 간질거리는 봄바람에 춤추는 나뭇잎과 급할 것 없이 흘러가는 구름은 자잘하게 시간을 쪼개 살며 스스로 존재를 증명하려 애쓰지 않습니다. 버스라도 타려면 40여 분은 걸어 나가야 하고 배달 음식이나 물건 배송은 엄두도 못 내는 곳이지만, 이곳에서의 제 삶은 과거도 아닌, 미래도 아닌, ‘지금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당연하다 여기며 살았던 많은 것을 버리고 비우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지금은 그 비워진 시간을 온전히 나로 채우며 행복하고 충만해집니다. 숲에서 살면 심심해서 어쩌나, 할 수도 있지만 헨리 데이비스 소로우가 <월든>에서 말하듯 시선을 내면으로 돌려보면 마음속에서 천 개의 지방을 발견하게 되고, 아직 답사하지 않은 그곳들을 여행하며 자기라는 우주의 전문가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 하루, 내가 얼마만큼의 시간을 희생해 얼마만큼의 돈을 벌어, 또 얼마만큼의 소비를 했는지, 그래서 내가 그토록 세상에 증명하고픈 나의 가치는 무엇인지, 고민하고 자괴하는 데 시간을 쓰지 않았다는 것에 감사합니다. 수십억에 달하는 아파트의 인공 불빛과 0이 많이 붙으면 무조건 좋다는 그 직업의 명함을 빼고, 두터운 메이크업을 지우고, 화려한 명품 옷을 벗으면 나는 어떤 사람으로 남을지 돌아보고 고민하는 시간을 쓸 수 있음에 감사합니다. 온전히 삶의 경험에서 얻은 실수와 실패와 양심에서 우러난 지혜를 탐구할 수 있음에 감사합니다. 저는 도시에서 공허하기만 했던 제가, 그래서 끊임없이 무언가를 찾아 헤매던 제가 더 이상 그립지 않아요. 평화롭고 고요한 숲 속의 고래 같은 제가 꽤 마음에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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