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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하나 May 15. 2024

교활한 계급 사회의 정직한 소시민

자발적 가난을 시험해 보기로 했다.




집단적 인지 부조화    
 

저는 어렸을 때부터 아르바이트를 했습니다.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집안 사정도 아니었고, 또 집에 있기도 싫었거든요. 대학에 다닐 땐 흥미로운 문화가 유입되던 홍대 클럽에서 일했어요. 스마트폰, 유튜브는 고사하고 소리바다가 전부였던 시절, 원 없이 다양하고 전문적인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곳이 바로 홍대 클럽가였습니다. 홍대 클럽 문화가 ‘돈’이 되기 시작하자 사람들이 모이고 온갖 브랜드 협찬이 들끓기 시작하면서 힙합, 테크노, 트랜스, 록 등 전문적으로 세분화되었던 소규모의 동네 클럽들이 상업적인 대형 브랜드로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저 역시 작은 클럽에서 대형 클럽으로 일자리를 옮겼습니다. 저는 당시 대한민국 대형 클럽 1호에서 파티 기획 일을 하며 주말이면 소위 ‘VIP’를 관리했습니다. 모델, 연예인, 셀러브리티에게 VIP 팔찌를 채워주고 따로 마련된 입구와 통로로 안내해 중층에 마련된 부스로 안내했어요. 아직도 그 팔찌를 한 뭉텅이 주머니에 쑤셔 넣고 다니며 그걸 받으려는 사람들 앞에서 권력을 휘둘렀던 클럽 사장들이 눈에 선합니다. 그때 저는 알았습니다. 노는 것도 계층에 따라 나뉜다는 걸.      


패션지 에디터로 일 할 땐 명품 브랜드와 화려한 사람들을 주로 다루던 메이저 패션지에서 일할 때보다 인디 문화 씬을 상대했던 독립 잡지 판에서 더 큰 계급 차를 느꼈어요. ‘인디’하면 가난하고 배고프게 음악하는 뮤지션이라 생각하는 이들이 대부분인데, 인디 씬에서 꾸준히 음악하는 이들은 대부분 ‘금수저’였어요. 그렇지 않으면 인디 음악으로는 도저히 먹고살 수 없는 생태계를 가진 한국이니까요. 그러면서도 그들은 인디의 잉여스러움을 내세워 멋을 부렸습니다. 인디 레이블 대표가 마트에서 장 보듯 고급 수입차를 결제하고는 “오늘 기분이 별로라 차 한 대 샀어”라고 하는데, 괜한 배신감이 드는 저 자신에게 더 실망하기도 했습니다. 점점 자격지심과 피해의식에 매몰되는 자신이 싫었습니다. 부유한 환경에서 나고 자란 그들의 여유로운 천성에 비해 저는 아무리 노력해도 늘 조바심 내고 스스로 닦달하며 출발선부터 다른 게임에서 어떻게든 좋은 결과를 내보겠다고 고군분투했으니까요. 그런 의도를 가지고 참가한 게임에서 저는 이길 리 없었습니다.     

 

나름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환경 덕에 경쟁에 특화된 인간이라 스스로 여겼는데, 그게 아니었다는 걸 서서히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부자가 되지 못하면 내 삶은 실패한, 가치 없는 삶인 건가? 그때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습니다. 이렇게 계속 살다가는 안 되겠다 싶었어요. 기만의 기술을 부려 누군가를 낙오시켜야 내가 올라선다는 사회의 불문율에도 동의할 수 없었고요. 앞으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하는 질문에 오랫동안 답을 못 찾고 방황하다 스스로 실험을 해보기로 했습니다. 잡지계와 문화계, 서울과 한국을 떠나 아무도 나를 모르는 해외의 시골 외딴섬으로 떠난 거죠. 그곳에서 오래 살다 보니 계급 사회를 피부로 느낄 일이 훨씬 줄어들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비행기를 탈 때면 여지없이 계급 사회를 압축해 놓은 듯한 무거운 공기를 느낍니다. 승객들은 여러 등급으로 나뉘어 라운지, 클럽, 수화물, 입장 순서 등에 다른 서비스를 받지요. 늘 이코노미석 승객인 제가 바랄 수 있는 건 그저 좋은 운 뿐입니다. 서로 불편한 자리에 앉지 않고 싶은 마음이니까요. 이코노미의 소음으로부터 완벽히 차단된 사람들은 비즈니스석 넓은 좌석에서 우아하게 샴페인을 들이키죠. 운이 안 좋아 전쟁 같은 비행을 마치고 내릴 때 슬쩍 보여주는 비즈니스석은 또 한 번 제 처지와 좌석을 상기시킵니다. 그리고 생각하죠. ‘더 열심히 일해서, 더 돈을 많이 벌어서, 다음엔 비즈니스석에 앉아야지.’     


비행기는 사고 시 좌석을 가리지 않습니다. 비행기가 추락하면 이코노미든 비즈니스든 어차피 죽는 건 똑같죠. 인스타그램 인플루언서 모델 커플이 럭셔리 크루즈에 초대받아 상류층의 일상을 맛보는 영화 <슬픔의 삼각형> 보셨나요? 순항하던 크루즈는 전복되고, 생존자들은 무인도에 표류하게 되죠. 세계적인 석유 부호의 럭셔리 브랜드도 무인도에선 소용이 없습니다. 육체적 힘과 생존 능력이 중요한 곳에서 기존의 계급은 전복됩니다. 크루즈에선 가장 하층 계급이었던 기술자가 무인도에선 권력을 쥐게 됩니다. 그래도 죽기 전 이왕이면 비즈니스석에 타고 싶은 건 어쩔 수 없는 인간의 본능인가 봅니다. 어쩌면 우리가 태어나 자라면서 학교, 클럽, 비행기 등 온갖 곳에서 은연중에 보고 듣고 배운 모든 경험으로 굳어진 믿음일 수도 있겠네요.    

 

ⓒ 슬픔의 삼각형



여러분은 어떤가요? 비행기 안의 비즈니스석과 이코노미석의 구분을 없애고 중간 레벨 정도의 좌석을 만들어 승객 모두 비슷한 가격을 내고 평등한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게 낫다고 생각하나요? 아니면, 좌석의 구분을 그대로 두고 돈을 더 내는 사람이 더 좋은 서비스를 받는 것이 나을까요? 살면서 어떤 경험들이 여러분에겐 벗어날 수 없는 계급 사회의 현실을 직시하게 하나요? 그리고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충분히 이야기하고 있나요?      


우리는 사회적 불평등과 차별에 너무 익숙해져 별다른 비판 없이 이를 받아들이죠. 계층의 이동이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는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돈이 있으면 존중받아야 한다고, 돈이 있으면 능력이 있는 거라고, 불평등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더 많아지고 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을 버는 것은 죄가 아니다’라는 개념이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고, 부유한 사람들은 사회의 롤 모델로 존경받는 요즘이니까요. 어떤 면에서 우리는 사회적 불평등을 피할 수 없는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체념을 한 걸 지도 모르겠어요.      


많은 사람들이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를 내면화해 제도적 특권과 구조적 장벽의 역할을 인식하고 비판하기보다는 개인의 성공이 노력과 재능에 달려 있다고 믿습니다. 사람들은 부와 물질적 성공이 궁극적인 목표죠. 이를 달성한 사람은 우월하다고 믿도록 사회는 끊임없이 우리를 세뇌합니다. 연봉의 숫자가 그 사람의 인생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고, 경제적 부를 얻지 못한 사람은 ‘실패자’ ‘루저’가 되죠. ‘금수저’도 아니면서 인권 변호사가 된 제 친구는 ‘제 실속도 못 차리고 영웅 놀이하는 호구’라며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립니다. 그가 가진 도덕적 양심과 풍요로운 공감 능력과 따뜻한 마음은 돈으로 가치를 매길 수 없어 사람들 눈에는 보이질 않나 봅니다. 어쩌면 우리는 부의 불평등이라는 가혹한 현실에 직면하면서 불편한 진실을 직시하기보다는 제도적 불평등의 존재를 합리화해 버리는 집단적 인지 부조화를 겪고 있는 건 아닐까요?        



      





인간은 불평등을 혐오하도록 태어났다

과학자들이 흥미로운 실험을 했습니다. 두 마리의 원숭이에게 각각 돌멩이를 잔뜩 줍니다. 그리고 그 돌멩이를 하나씩 돌려줄 때마다 보상을 해주죠. 한 원숭이에게는 돌멩이를 돌려받을 때마다 오이를 하나씩 주었고, 또 다른 원숭이에게는 보상으로 포도를 주었습니다. 원숭이는 포도를 오이보다 10배 이상 좋아합니다. 계속 이런 일이 반복되자 오이를 받는 원숭이는 결국 오이를 집어던지고 철장을 흔들며 시위하듯 화를 냅니다. 포도를 받은 원숭이는 감정의 동요 없이 계속해서 돌멩이를 돌려주고 포도를 받아먹습니다. 결국 오이를 받은 원숭이는 돌멩이 자체를 건네는 걸 그만두고는 철장 한구석에 앉아 씩씩거립니다.

     

과학자들은 말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영장류와 인류는 본능적으로 불평등을 혐오하는 뇌를 가지고 태어났다고, 인간은 진화의 역사에 뿌리를 둔 공정성을 선호하는 본능적 욕구를 가지고 있다고 말이죠. 불평등을 인식하면 인간의 뇌는 자신의 이익과 안녕을 보호하기 위해 불안감이나 불편함을 느낍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평등을 추구하는 존재라는 것이죠. 우리는 모두 존엄성과 가치가 있는 개인으로 동등한 대우를 받을 자격이 있다고 믿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불평등한 상황에 처했을 때 불편함과 혐오를 느끼는 건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인류의 역사를 봐도 그렇죠. 인간은 불평등에 맞서 끊임없이 투쟁해 왔습니다. 프랑스혁명, 미국 독립 전쟁, 수많은 민권 운동 등은 모두 불평등한 사회 구조에 저항한 평등을 위한 노력의 결과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동시에 불평등을 받아들이고 숭배하기도 합니다. 사회 계층, 경제적 지위, 권력, 인종, 성별 등에 따라 사람들은 서로 다른 대우를 받습니다. 이러한 불평등은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데 기여한다는 주장도 있죠. 이에 더해 인간은 타고난 경쟁 본능을 가지고 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 경쟁하며 나아가고, 성공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불평등이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뇌과학과 행동 심리를 연구하는 과학자들은 최근 새로운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부자는 아이들에게 부유한 뇌까지 물려준다는 거죠소득 수준이 낮은 국가나 지역의 아이들은 늘 경제적 압박과 스트레스에 만성적으로 노출된 부모 밑에서 자라며 뇌 발달에 부정적인 영향을 받습니다. 저도 어렸을 때부터 경제적으로 힘들어했던 엄마가 하는 말과 행동을 듣고 보며 돈에 대한 적대심을 키웠습니다. 돈은 고통을 유발하는 ‘악마’라고 생각했죠. 그래서 더 돈을 벌기 위해 아등바등했습니다. 돈과 나 자신을 동일시하며 내가 돈이 많아지면 저 역시 대단한 사람이 될 거라 믿었죠. 그럴수록 풍요로움은 제 삶에서 멀어졌고, 영혼을 갉아먹는 박탈감에 시달렸습니다. “부자 되세요” “돈 많이 버세요” “대박 나세요”라는 말들로 넘쳐나기 시작한 한국 사회에서 돈은 제 인생에 너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이러나 나중에 죽을 때 내 인생을 돌아보면 ‘돈을 벌고, 돈을 쓰고, 죽었다’가 될 것만 같아 두려웠습니다.           

         








자발적 가난을 실험해 보기로 했다
     

뒤늦게라도 제 인생을 바로 잡고 싶어 바다와 정글만 있는 외딴 시골섬 꼬따오로 갔습니다. 자발적 가난의 한가운데에 제 발로 들어갔습니다. 서울에서 벌던 수입의 1/3도 안 되었지만 제 삶은 훨씬 여유로워졌고, 풍부해졌고, 아름다워졌습니다. 서울에 비해 지출은 1/6으로 줄었거든요. 그 섬에선 누구도 서로의 연봉을 묻거나 비교하며 자책하지 않습니다. 섬 위아래로 7km, 양옆으로 3km가 전부인 이곳엔 집들이 고만고만합니다. 전 세계에서 저와 비슷한 이유로 자신의 나라를 떠나 이곳으로 모여든 사람들은 어떤 집안 출신이든, 돈이 얼마가 있든, 이전에 판사였든, 의사였든, 기업 CEO였든 알아채기가 힘듭니다. 섬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굴러만 다니면 되는 스쿠터를 탑니다. 한 번은 방콕의 금수저 젊은 친구들이 람보르기니와 페라리를 배에 싣고 그 작은 섬에 들어왔는데, 최대 시속 제한이 40km/h에 주차장도 없는 섬에서 모든 섬사람들의 눈총을 받으며 민폐만 끼치다 도망치듯 섬을 떠났습니다. 그 섬에선 멋진 차를 경이로움과 부러움에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는 이가 없었습니다. 그 가치를 알아주는 이가 없으니 샤넬도, 루이비통도, 입생로랑도 그 섬에선 무의미합니다. 소유의 개념은 개인의 것이 아닌 공동체의 것입니다. 대한민국, 서울이라는 도시는 이 세상에 그런 곳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그런 곳이 정말 있었습니다. 저는 수년 동안 그런 환경과 사회와 사람들에 둘러싸여 살며 그동안 도시의 계급 사회에서 교육받고 세뇌당한 달콤한 신화를 떨쳐버릴 수 있었습니다.  

    

섬에서 만난 외국 친구들은 한국에 대해 잘 알지 못했습니다. 유튜브나 한국영화, 드라마를 통해 본 모습이 다죠. 한국에서 사는 것에 대해 묻는 유럽 친구들에게 저는 늘 이렇게 답했습니다. “한국은 돈이 많으면 정말 살기 좋은 나라야. 세금도 조금 내고, 불법 투기도 합법으로 변모시킬 수 있지. 돈만 있으면 검사도 판사도 내 편이거든. 삼성, LG, 현대 같은 한국의 대기업은 모두 경영권을 세습해. 그들의 능력은 상관없어. 돈이 많으면 사회적으로 존경받고 추앙받을 수 있어. 반대로 돈이 없으면 내 인격의 깊이와 성장에 관계없이 쓸모없는 사람이라 무시당하지. 한국은 돈이 곧 종교인 나라야.”      


한국이라는 나라야말로, 한국에 사는 우리들이야 말로 인지부조화를 앓고 있는 게 아닐까요? 현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뉴스만 보면 한국이 굉장한 나라들 사이에 우뚝 선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한국은 불평등 문제가 가장 심각하고 우울증, 자살률이 가장 높은 나라입니다. 대한민국의 상위 10%의 소득이 전체 소득의 약 40%를 차지하고 있고하위 10%는 약 2%에 불과합니다. 부의 분배는 소득 분배보다 훨씬 더 불평등합니다. 한국 사회의 부를 차지하는 상위 10%가 전체 부의 약 60%를 넘게 보유하고 있으니까요. 경제를 살린다는 명분으로 기업에 유리한 정책을 펴는 현 정부 덕에 비정규직 비율은 40%에 육박합니다. 세계적인 경제 전문가와 연구진은 한국의 재벌 중심 경제 구조와 정규직/비정규직의 심각한 격차기상천외한 가격을 자랑하는 주택 가격소득 격차에 따른 교육 기회의 불평등 같은 한국 사회의 고질적인 문제를 근본적으로 뜯어고치지 않으면 돌이킬 수 없는 양극화의 길을 걷게 될 거라고 이미 오래전부터 경고해 왔습니다.      


우리는 그 말을 듣지 않았죠. 언제나 나라의 경제를 살린다는 명분으로 온갖 편법과 불법을 저지른 재벌들은 법망을 피해 가고그 법을 만드는 사람들은 재벌에 유리하게 판을 짜고또 그 법을 수호하고 집행하는 사람들은 재벌을 보호합니다. 한국 사회에서 타인과의 비교는 태어나면서부터 자연스럽게 시작됩니다. 제가 어렸을 적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이 없었다는 게 축복으로 느껴질 만큼 요즘 아이들은 태어날 때부터 기록과 경쟁에 익숙해집니다. 마음만 먹으면 아이들의 부모는 지구 반대편에 사는 억만장자의 의식주와 아이들의 모습, 심지어 키우는 개가 입는 옷과 타고 다니는 유모차까지 따라 사고 있으니까요.      


신뢰를 잃은 정부는 무능하고 비열해 교육, 노동, 세제 개혁과 지역 개발, 사회 안전망 확충은 고사하고 있던 시스템마저 붕괴시키고 있으니 방치된 사람들은 각자도생, 저마다의 치열한 ‘오징어게임’을 매일 치르고 있습니다. 다 같이 잘 살고서로 나누고공평하게 나누자는 말는 요구는 사회에서 성숙하게 토론을 거치기도 전에 걸핏하면 포퓰리즘공산주의사회주의라며 전 세계 유일한 분단국가의 트라우마로 이용만 되고 맙니다그 사이 한국은 근로 현장에서 노동자가 가장 많이 죽는 나라, 노동자의 권익을 대변하는 노동조합의 수가 가장 적은 나라가 되었습니다. 엘리베이터에 함께 탄 청소노동자를 두고 “너, 엄마 말 안 들으면 나중에 커서 저 아저씨처럼 된다”라고 부끄러움 없이 말하는 젊은 엄마는 배울 만큼 배우고 교양을 뽐내고 다니는 우리의 평범한 이웃이니까요. 어쩌면 저 자신의 모습일 수도 있겠네요. 그래서 더 무기력해지는 것 같아요. 전 세계에 퍼진 독버섯 같은 불평등 문제엔 답이 있기나 한 걸까요?              








어쩌면 우리에겐 희망이 있을지도 몰라
     

계급 사회와 불평등, 인간 본성 등 사회적 메시지를 담은 영화 <더 플랫폼>에서 거대한 수직 구조물 안에 사람들이 수감되어 있습니다. 하루에 한 번 내려오는 플랫폼에 있는 음식을 먹는데, 플랫폼 꼭대기 층에 있는 사람들이 먹을 만큼 먹고 남은 음식이 아래층으로 내려옵니다. 아래층으로 갈수록 음식은 점점 줄어들고, 잔인한 생존 경쟁이 벌어지죠. 플랫폼에 수감된 자들은 이곳이 몇 층으로 되어있는지 조차 모릅니다. ‘설국열차의 수직 버전’이지만 크게 다른 점은 한 달마다 다른 층으로 랜덤하게 이동합니다. 강렬한 메시지와 잔혹하고 충격적인 장면은 유감스럽게도 우리가 사는 현실 사회와 다를 게 없어 더 씁쓸합니다. (<더 플랫폼>은 넷플릭스에 서비스되고 있습니다. <기생충> <슬픔의 삼각형>과 함께 계급 사회 TOP3 영화로 꼽고 싶습니다. 안 보셨다면 강력 추천합니다.)

 

ⓒ 더 플랫폼



제가 <기생충>을 좋아하는 이유는 한국 사회 내부의 계급 사회뿐 아니라 강대국에 둘러싸인 한국의 아이러니한 숙명을 녹여냈기 때문입니다. ‘케빈’ ‘제시카’는 연세대, 서울대를 나온 척하며 일부러 영어를 섞어 씁니다. 한국이라는 나라의 미국에 대한 콤플렉스가 그대로 드러나죠. 정치, 행정, 사회, 경제, 모든 부분에서 미국을 잘도 따라가는 한국은 여전히 미국 국기를 흔들며 미국에 간도 쓸개도 빼줍니다. 

     

‘유리천장’이라는 단어는 ‘유리바닥’으로 대체되었다고 합니다. 유리바닥으로 상류층의 생활을 슬쩍 보여는 주지만 누구든 올라오려고 하면 바닥 아래로 밟아 버리기 때문이라죠. 하층민이 있어야 상류층이 빛납니다. 사회의 밑바닥이 드러나면 야만의 시대가 도래합니다일제강점기 시절 일제에 대항하던 동포가 서로 배신하며 적이 되었던 것처럼, 백인우월주의에 차별받는 유색인종이 서로 분풀이하는 것처럼, 부자와 기득권의 횡포에 공정한 분배에서 소외된 가난한 이들끼리 서로 괴롭히며 죽입니다. 재벌가의 안위를 걱정하는 사람이 대기업의 책임하에 부주의하게 운영되는 산업 현장에서 사망한 젊은 노동자에겐 눈길조차 주지 않죠. 서로를 밟고 올라서봤자 강화유리로 만들어진 바닥뿐인데, 그 신기루 같은 판타지에 일생을 바칩니다. 그러면서 알게 모르게 우리는 서로에게 너무 많은 상처를 주고, 나쁜 짓을 합니다.     


 


<기생충>이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 한해 앞서, 일본 영화 <어느 가족>이 황금종려상을 받았죠. 당시 일본은 이 영화의 수상 사실을 드러내고 기뻐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오히려 일본 사회의 어두운 면이 전 세계에 알려진 걸 반기지 않는 눈치였다고 해요. 한국은 그런 거 없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설국열차> <기생충> <오징어게임> 등 극단적인 계급 사회와 물질만능주의를 풍자한 영화로 세계 무대에 선 한국은 사회의 어두운 이면과 치부마저도 컨텐츠로 승화했죠. 적어도 우리는 일본처럼 감추고 없는 척모르는 척하는 대신 적어도 드러내고 인정합니다그래서 어쩌면 한국은 일본처럼 영영 무기력한 블랙홀에 침잠해 있는 대신 그 뻔뻔함과 역동성으로 기발한 탈출구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요                






        

모든 정부는 거짓말을 한다
     

꼬따오에서 만난 유럽 친구들 중에서도 나고 자랄 때부터 삶에 밴 여유를 가진 친구들이 있습니다. 살면서 몇 년, 꼬따오 같은 섬에서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도 훗날 고향으로 돌아가 먹고살 걱정이 없습니다. 그래서 삶을 바라보는 시선이나 삶을 대하는 자세도 훨씬 관대하고 여유로웠습니다. 실수를 실패라 부르지 않고, 과거나 미래보다 현재에 집중합니다. 부러웠죠. 스웨덴에서 사업을 하고 있던 친구에게 물으니 수입의 반을 세금으로 내고 있지만 그에 대한 불만이 전혀 없더군요. 부의 일정 기준을 넘으면 돈으로 돈을 버는 불로소득이 많아지니 이에 대한 누진세를 걷는 정부가 그에 합당한 복지 시스템을 투명하게 운영한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어떻게든 세금을 덜 내려고 정치와 사법, 언론, 사회 전반 시스템에 유착해 유리한 법을 만들고 처벌을 피해 가는 미국과 한국과는 근본부터 다른 사회의식이 충격적이었습니다.

      

한국은 보편적 기본소득과 의료, 교육 등의 사회 안전망을 강화하는 데 노력을 쏟지 않습니다. 그 대신 부자들의 세금을 깎아주는 데 혈안이 돼 있습니다그래야 자비로운 부자들이 돈을 많이 써 한국의 경제에 기여해 그들의 부에 기대어 사는 빈곤층으로의 낙수효과가 생긴다는 현 정보의 논리는 무능하고 무식하고 낡고심지어 나쁘기까지 합니다부자에게 세금을 부과하면 누가 열심히 일하고 부를 창출하려고 하겠냐고 주장하는 대한민국 정부는 절망적입니다. 국제통화기금(IMF)의 연구에 따르면 높은 세율이 경제 성장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또한, 부유층에 대한 세금 인상이 경제 활동을 크게 감소시키지 않으며, 예산 및 정책 우선순위 센터(CBPP)의 연구에 따르면 높은 세율은 더 많은 사람들에게 혜택을 주는 공공재와 서비스에 투자할 수 있기 때문에 실제로 경제 활동 증가로 이어질 수 있다고 합니다. 부유층에서 빈곤층으로 부를 재분배해 소득 불평등을 감소하면더 많은 사람들에게 혜택을 주는 공공재 및 서비스를 위한 수익 창출이 높아지고부유층에 더 높은 세율로 세금이 부과될 때 자선 단체에 기부할 가능성이 더 높아진다는 연구 결과도 많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사회적 불평등은 집단적 대응이 필요한 집단적 문제입니다함께 협력하고, 지식을 공유하고, 소외된 지역사회를 지원함으로써 우리는 보다 정의롭고 공평한 사회를 만들 수 있습니다. 정책 결정 과정이 포용적이어야 하고, 다양한 관점과 소외된 커뮤니티의 관점을 대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저소득층을 대표하는 국회의원, 성소수자를 대표하는 국회의원, 군인의 인권을 요구하는 국회의원, 장애인의 권리를 요구하는 국회의원, 환경 문제를 전문으로 다루는 국회의원, 소멸하는 지역과 농촌을 대표하는 국회의원을 우리는 왜 국회로 보내지 못하는 걸까요?

      

계급 사회의 불평등은 너무나도 교묘하고 교활해서 기득권이 만든 교육, 행정, 정치, 사회 시스템에서 나고 자란 우리는 한 번도 다가서지 못한 부의 신기루를 좇으며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라고 교육받습니다. 부의 불평등의 교활한 본질을 인식하고 이를 영속화하는 보이지 않는 계층 구조에 도전함으로써 우리는 모두가 동등한 기회와 자원존엄성을 누릴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현 상태에 도전하려는 집단적 의지는 보다 공평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향한 첫걸음입니다. 지금, 우리가 하지 않으면 영영 늦습니다.

      

개인의 재능과 노력만이 성공의 유일한 결정 요인이라는 관념에 도전해야 합니다. 사회적 불평등을 용인하지 말아야 합니다. 패스트 패션과 커피농장의 아동 및 노동자 학대를 따지면서도 한국의 노동자들이 인권을 말하는 데엔 무심해지는 모순을 우리 스스로 버려야 합니다. 사회 시스템의 가치에 억지로 맞춰 살려 노력하지 말고, 나만의 가치관대로 살아야 합니다. 

     

체념 말고 분노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공정성평등정의를 강조하는 강력한 도덕적 원칙과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불평등을 목격하거나 경험하면 분노, 좌절감, 혐오감 등 강한 감정적 반응을 일으킵니다. 우리가 바로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능력과 노력을 통해 성공하려만 하지 말고, 물질적 부를 얻으려고만 하지 말고, 공동체의 삶을 개선하고 사회에 기여하는 데 더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우리 모두 함께 쏟아야 합니다.      


내면화된 이데올로기를 비판하고 이에 도전하며 변화를 만들 수 있는 아이들을 길러내야 합니다. 돈을 많이 벌어야 행복해진다고 가르치는 걸 지금 당장 그만둬야 합니다. 개인의 부와 물질적 성공보다는 함께 하는 협력과 성공,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대안적 역할 모델을 아이들에게 보여줘야 합니다. 저는 화려한 패션잡지, 문화예술계에 일하면서 막대한 부를 가졌지만 우울증과 무기력, 허무와 상실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너무 많이 목격했습니다. 여러분 또한 목격자라는 걸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저는 정부와 시스템 대신 이웃과 커뮤니티를 믿습니다. 저와 당신, 우리가 모두 용기를 내야 합니다. 교활한 계급 사회의 정직한 소시민으로서 희망을 말하는 책임과 의무를 저버려선 안 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온 이유와 목적, 사명은 소유가 아닌 나눔이기 때문입니다.


저와 함께 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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